어쩌다 보니 밴쿠버, D-0
현실은 길고, 기억은 짧다.
그래서 지금은 괴롭고, 추억은 예쁜 걸까.
지난 24주 간의 밴쿠버 어학연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은 사뭇 어색하고,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정겨운데 왠지 지난날들이 꿈처럼 흩어진 것만 같다.
차갑게 식은 가을 공기처럼 싸늘한 현실을 마주했다.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초조함을 야기한다.
따뜻하게 나를 맞이하는 이들에게 무엇이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은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그럴 때면,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에 숨어 타오르는 행복을 지켜보던 밴쿠버를 떠올린다.
향긋한 봄비가 반겨주던 봄날부터 여름이 왜 푸른색인지 알 것만 같던 시원 청명한 나날들, 단풍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늘과 바닥에 수 놓인 알록달록한 나뭇잎을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조금 더 여유로웠고, 걱정 없었고, 밝았다.
대책 없이 뭐든 하면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살겠지 생각하며 공부에 최선을 다했다.
아, 맞아. 나는 하면 한다는 애였지.
레벨 5에서 7까지 낙제 없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고,
아이엘츠 총점 7.0을 달성해 봤고,
좋은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곳도 여행해 봤다.
목표를 세우면 달성했고,
내가 문제였던 걸까 싶었던 한국에서의 나쁜 경험을 잊을 수 있게 좋은 사람들, 귀인들을 여럿 마주했다.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이제는 다시 한국인으로서, 고국에서 제대로 행복해볼 생각이다.
뜻깊은 경험 마음에 품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살아가보자.
어쩌다 보니 대신, 말하는 대로의 세상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