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를 3 회독 중이다.
그 당시 만연했던 별의별 인권탄압 사례가 개인의 일생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미친 아주 담담히 그려진다. 눈물 없이 책장을 넘기기 어렵다. 살아있는 것이 치욕이자 고통인 '선주'의 이야기를 넘기다가 문득, 학교에 다니던 시절이 떠올랐다.
한강 소설의 배경인 박정희 정권 때뿐만 아니라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 문민정부라 자칭했던 김영삼 정권 때조차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전경·의경의 과잉진압과 검문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나조차 학교 근처에서 가방을 뒤지는 검열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학교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면 운동권이 아닌 평범한 학생들도 전경·의경에게 끌려가 소위 '닭장차'에 갇혀 경찰서로 연행되곤 했다. 전경·의경들이 쏘아 올린 최루탄 가스가 캠퍼스를 뒤덮었고, 우리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숨을 헐떡여야 했다.
29년 전 여름방학, 나는 개강을 앞두고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친 후 친구들과 함께 백양로로 걸어 나왔다. 학생회관 앞에 학생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고문치사 당한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추모 퍼포먼스와 함께 여러 행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던 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정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정문 밖에는 철모를 눌러쓴 전의경들이 방패를 세우고 쇠파이프를 움켜쥔 채 구름 떼처럼 몰려 있었다. 숨 막힐 듯 긴장된 공기가 캠퍼스까지 흘러 들어왔다.
그때,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 언니 학교에 있어. 공대 건물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서둘러 공대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학교 선배들이랑… 같이 왔어……"
머뭇거리는 동생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도 집에 가는데, 네가 왜 우리 학교에 남아 있어? 빨리 가자. 의경들이 밖에 한가득이야. 위험해!"
고집 센 동생은 내 손가락을 빼내고 학교에 남았다.
그 당시 김영삼 정권 시절에도 신촌 곳곳에 전의경 버스가 주둔하는 광경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분위기는 달랐다. 공기 자체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결국 전의경들은 신성해야 할 대학 캠퍼스 안으로 쳐들어왔다. 건물을 부수고 쇠파이프가 학생들의 머리와 등을 내리쳤다. 비명이 터졌고, 내 또래 학생들이 끌려갔다. 며칠 동안 헬리콥터가 저공비행하며 물대포와 최루탄을 쏟아부었다. 학생들의 인권은 짓밟혔다. 그 와중에 ‘발포’까지 있었다. 결국 대학생 한 명이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사망했다. 그렇게 2만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에 갇혀있어야 했고, 5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끌려갔다.
하지만 언론은 전의경의 폭력적인 진압 사실을 철저히 감추고 축소했다. 오히려 학생들을 가해자로 몰아갔다. 내가 학교에서 직접 본 광경과 TV화면에서 보이는 광경은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였다.
동생은 담을 넘어 도망가다가 발을 다친 채 경찰서에 끌려갔다. 얼마 후 사복경찰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잠바를 걸친 평범한 옷차림의 남자 두 명은 눈빛이 날카롭고 말투 또한 매서웠다. 평범한 대학생이자, 마음이 약해 젊은 죽음을 외면하지 못했던 내 동생을 사상범 취급하며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그들 모습에 나는 황당함과 굴욕을 느꼈다. 지금은 고등학생들도 추천 도서로 읽는 한국 근대사 책이 그때는 금서 취급을 당했다. 옷장 깊숙이 감춰둔 책들을 들킬까 봐 가슴은 두근거렸고 손가락은 떨렸다. 다행히 아무것도 찾지 못한 형사들은 집을 나섰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엄마와 나는 그제야 한숨을 깊게 쉬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한데, 왜 그들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고 일반 시민을 탄압해야만 했나?
권력에 대한 더러운 욕망 때문에 얼마 전에도 또 하나의 거대한 국가적 폭력이 있었다.
소년이 우리에게 왔으니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바뀌지 못한 것들이 있다.
명령에 복종해 학생들을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광주민주화항쟁 때 시위한 어린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들, 여성과 노인 등 일반시민까지 폭행하고 사살한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강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던진 질문이 나를 강타한다.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년이 가버리지 않고 다시 온 것처럼,
가슴속이 타올랐던 29년 전의 여름 또한 더 이상 반복되어도 은폐되거나 왜곡되어도 안된다.
#한강 #소년이온다 #광주민주화항쟁 #인권탄압 #1996년연세대사태 #국가적폭력 #인간이란무엇인가
*대표 이미지 : 연세대 정문은 불도저에 뜯겨 나갔다. 출처: 민플러스, 사진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96년 8월 20일, 연세대 종합관 진압 장면. 출처: 민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