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 고란살과 나르키소스

외로움과 자기몰입의 흥미로운 교집합

by 흔덕헌

제10화 : 고란살(孤鸞殺)과 나르키소스(Narcissus)

외로움과 자기몰입의 흥미로운 교집합



고란살(孤鸞殺), 외로운 새의 울음


고란살은 한자로 외로울 ‘고(孤)’, 난새 ‘란(鸞)’을 쓴다. 난새는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새인데, 모양이 봉황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홍루몽에도 등장하고 원효의 이야기나 기타 고서에도 여러 차례 이 새가 등장한다. 보루네오섬에 서식하는 ‘청란’이라는 새가 모티브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청란을 영상으로 찾아보니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며 귀한 격이 느껴졌다.


이 난새가 고란살의 한 글자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란살은 주로 여성의 사주에서 배우자 운이 약하거나, 혼자 고독한 시간이 많아지는 살(殺)로 풀이된다. 예전에는 부군이 축첩(畜妾)하거나 탈부(奪夫) 당한다는 독수공방의 살로 보았다. 특히 일주가 고란살인 경우 고독하게 사는 경우가 많다. 흔히 역마로 불리는 인사신해(寅巳申亥)의 지지가 바탕이 되어 천간에 글자가 배치되는데 보통 다음의 5개 기둥을 고란살이라 한다. 갑인(甲寅), 을사(乙巳), 정사(丁巳), 무신(戊申), 신해(辛亥)가 고란살이다.


그렇지만 모든 살이 그렇듯 이 고란살도 원국에 따라 해석의 적용이 다양하며, 격국의 귀천에 따라 나쁘게도 좋게도 해석할 수 있다. 단 치우친 사주, 조후가 얼어있는 경우에는 고란살의 정도도 심해진다.


난새의 에피소드 : 거울 속의 나를 사랑한 새


고란살에서 ‘난새 란(鸞)’자를 쓴 이유인 슬픈 설화가 있다. 옛날 한 왕이 아름다운 난새 한 마리를 얻었는데, 이 새가 자기 짝을 못 찾아 외로워했다. 이 새는 마음에 드는 자기 짝을 찾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 되는 새인데 말이다. 슬픔에 잠겨있던 난새는 어느 날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한 새를 보게 된다.

처음으로 이상형을 발견한 난새는 상대에게 구애의 몸짓을 하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구애의 상대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것을 알게 되고 충격에 피를 토하고 죽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고란살은 이처럼 스스로 고고하고 자신이 잘났다 여기기 때문에 고독을 자처하는 느낌이 강하다. 독립심이 강하고 생활력도 뛰어나며, 에너지도 세고 영리하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춤을 추는 난새처럼 자기 세계가 뚜렷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힘이 강하다. 따라서 고란살이 있어 고통이 있다면, 혼자만의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거나, 주말부부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관계가 오히려 액운을 막는 비결이 되기도 한다.


‘혼자서도 빛나는 난새’가 될 것인지 아니면 ‘외로움에 갇힌 난새’가 될 것인지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음양이 조화롭게 합이 되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무리 고독을 자처한들 근원적인 외로움은 그들의 마음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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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나르키소스, 그리스 신화 속 고란살


난새의 설화를 들으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서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는 ‘나르시시즘’의 용어를 만든 인물로,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어느 날 사냥을 하다 지친 나르키소스가 숲속의 맑은 샘물을 마시려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는 그것이 자신인 줄 모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믿으며 사랑에 빠진다. 그가 입을 맞추려 하면 물결이 일어 그 모습이 사라지고, 손을 대면 흩어져 버리자 그 존재를 소유할 수 없다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결국 그 수면에 비친 존재가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런 그가 죽은 자리에 핀 꽃이 바로 수선화다. 고개를 숙인 채 물가를 바라보는 꽃.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난새의 설화와 많이 닮았다.


고란살과 나르시시즘의 명리학과 심리학


나르시시즘은 프로이트에 의해 대중화된 용어로, 외적인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상태를 말한다. 심리학적으로는 결국 ‘취약한 자아’를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로 본다. 나르키소스는 타자(Other)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마치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SNS에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고 전시하지만, 정작 타인과 깊은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립’과도 닮아있다.

또한 그가 가진 외모적 아름다움은 생명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정체와 죽음을 부르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그 물가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변화를 거부하고 완벽한 이미지 속에 갇힌 영혼을 상징한다. 고란살의 난새와 같은 모습이다.


‘거울’에 갇힌 운명 - ‘투사(Projection)’


물속에 갇힌 자신의 그림자를 타자로 착각해 사랑에 빠지는 나르키소스. 심리학적 해석에서는 그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나의 완벽한 이미지’를 타인에게서 찾으려 한다고 본다.

고란살의 경우도 이들은 대체로 눈이 높고 기준이 까다롭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내 완벽한 세계관을 채워줄 부속품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상대가 나의 기대(거울)를 충족하지 못하면 금방 실망하고 다시 고독의 방으로 돌아간다.

결국 둘 다 거울에 갇힌 운명, ‘투사(Projection)’의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물속의 허상을 잡으려다 죽은 것처럼, 우리도 ‘내가 만든 나의 이미지’에 갇히면 괴로워진다. 고란살의 외로움 역시 ‘나는 특별해야 해’ 혹은 ‘상대는 완벽해야 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결국 이 고독과 자기애의 문제는 ‘집착을 내려놓는 수행’으로 귀결된다.


“거울에서 그리고 물가에서 고개를 들면, 비로소 넓은 숲과 하늘이 보인다.”


2026년 2월 5일, 병오년 갑인월 경술일(식신의 날에 식상으로 마음을 풀어낸다), 글쓴이 흔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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