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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헌문학 Oct 25. 2021

욥이 된 여인, 빛과의 숨바꼭질. <밀양>의 시험

-빛의 부재, 빛의 발견 『밀양』

욥이 된 여인, 빛과의 숨바꼭질 

빛의 부재, 빛의 발견 『밀양』


‘구원의 길은 좁고 험난하다. 마치 맨 발로 면도날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이.’ 

-Maugham, William Somerset, 《면도날》


우리 시대 욥 여인의 수난 


- “그 날들이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이 나에게 임했구나. 

나는 그런 악한 날에 대비하여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구나." 

욥은 이런 이유로 인하여 큰 슬픔에 빠졌다. 그는 마음이 어지러워서 쉬지 못했다

...............

(욥기 30; 27)


이신애(전도연 분)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사고사한 남편의 고향으로 낙향해온 젊은 미망인이다. 그런 그녀의 순애보적 행보에 밀양 주민들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신파적 선택을 오버의 포즈로 보고 신통찮아하며 비꼬는 시선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이곳에서 이내 시험에 들어 엄청난 내적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는 이 영화의 인상적인 홍보 카피였던 것을 상기하자.


어찌 보면 다소 편집스럽다 할 수도 있을 자존감 높은 그녀가 밀양에 발을 들이며 시작되는 좌절과 통곡, 자존에 대한 완벽한 박탈, 그리고 회생의 이야기. 영화『밀양』(secret sunshine, 이창동, 2007)은 드라마투르기에 있어선 각종 간증 프로그램들에서 접해온 범속한 신파 중 하나 중 하나로 여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감독 이창동은 극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 배면되어 있던 부조리와 용서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철학적 아우라를 한 편 우화적 상황의 영화언어로 구체화하였다. 재현이라기보다는 구질구질한 현실 한 가운데 절망과 구원 따위의 비범한 주제의식이 살아있는 이창동 식 영화버전으로의 재창조였다 하겠다. 비주얼이나 소재 상의 참신함이나 스펙터클과는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감독의 영화들은 소시민의 비루하고 비천한 일상을 충일하게 담아 흉터 진 삶의 단면을 드러내는 문예영화의 문법에 근접해있다. 


지난 해 영화계 초미의 화제가 되었던 ‘세계 영화계에 인정받은 배우의 호연’ 외에도, 이처럼 인간의 보편 존재론을 설파하는 다분히 문예적인 어조의 영화가 지난 2007년 이백 만을 훌쩍 상회한 관객 수를 동원하고 대중의 가슴 깊은 데 팽팽하고 뜨거운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동인이란 과연 또 무엇이었던가. 이는 밀양의 ‘비밀스러운 빛의 요소란 진정 무엇이었나'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괴력의 빛의 실재를 대면키 위해 우리 시대 욥이 된 그녀의 밀양(secret sunshine) 이야기를 좇는다. 그 비밀스런 빛의 실체를 찾으려면 이신애 파멸과 구원의 진행과정과 심리를 알아야 한다.


소도시 ‘密陽’이 시험하는 숨바꼭질 놀이의 주인공인 이신애. 피아니스트가 되고자했던 왕년의 꿈은 애초에 좌절되었고 남편도 세상을 떠 홀로 남겨진 여인이다. 단 한 번의 회상 씬이나 사진 한 장으로도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간간이 제시되는 암시들에 따르면 이신애의 남편은 내연녀 문제로 신애에게 상처를 주었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버린 상황이다. 이신애의 남편은 이 악몽같은 비극의 막중한 배후로 『밀양』 내 짙은 그림자로 시종 실존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밀양으로 이사를 와 행한 일이란 남편의 분신이라 할 아들을 웅변학원에 등록시켜 뒷바라지에 힘쓴 것, 자신을 업수이 보지 못하도록 재테크에 관심을 보이며 은근히 재력을 갖춘 양 허영스런 언행을 연출했던 것 따위다. 이러한 단서와 복선을 살피면 평범한 미망인으로 보이던 신애는 배신당한 미망인이라는 자신의 처지에서 상처받은 자존감과 의지의 자아를 지켜내려 남편의 배신사실도 인정치 않은 채로 희생적 순애보와 물질적 허풍으로 치장하는 것으로 골 깊은 염증을 가려보고자 했던, 애초부터 고요한 절망에 빠져있던 위태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정작 본게임이란 이제부터다. 밀양에서의 새 삶이 일상화될 즈음, 그녀에게는 이성을 추스르기 힘들 정도의 파괴적인 시련이 찾아온다. 오늘의 욥으로 선택된 한 사람이 겪는 시험의 과정, 고난의 수난기를 들여다보자.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주눅 들지 않을 아이로 키워주겠다는 약속에 아이를 맡길 수 있었던 이웃집 웅변학원장은 개인의 금전적 이유로 신애의 아들을 유괴해 살해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부조리한 폭력으로 복원 불가능한 상실의 트라우마를 지닌 이의 내면은 과연 어떻게 내파되어갈 것인가? 혹은, 어떻게 절망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결국엔 어떠한 내적 구원의 과정을 거쳐 회생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그녀 내적 변화과정을 영화가 풀어내는 순차적 서사의 진행으로 재현하면 그녀가 매달리게 된 종교와 인간본성 간의 대척점을 만나게 된다. 





‘시험․ 용서, 사랑․ 구원’ - 개신교에 대한 전면적인 '재성찰'



- 환난을 당하였다는 의식으로 날마다 애곡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는 항상 짙은 구름이 덮여 있어 

그는 사실상 '햇볕에 쬐지 않고' 걸은 것이나 같았다 

(욥기 3; 20) 



넋이 빠질 만큼 참담한 어미인 신애는 우연히 발 들인 교회 예배집회에서 뜨거운 눈물로 신을 영접하게 된다. 그리곤, 이내 ‘선택된 자에 신이 내리신 시험’이라는 구약성서의 ‘욥기적 주제’에 눈 떠간다. 마음 의지할 곳 없는 신애는 이러한 말씀 속 기독교의 시험과 은총의 교리에서 위안을 얻으면서 독실한 신자도 되어갔다. 신앙인으로 거듭난 한 사람. 그녀는 자식을 살인한 유괴범에게 ‘당신을 용서했다’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구치소로 면회를 갈 결심까지 하기 이른다.


그리하여 찾아간 교도소. 그런데 면회실에서 접견한 아들 살해범 웅변학원장은 고결한 표정으로 신애에게 말한다. ‘자신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그리고 되레 ‘당신이야말로 용서받아 평안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지 않던가. 이 때 신의 복음을 전언하려던 선한 사마리아 된 그녀는 여기서 삿된 반신(返信)의 느낌으로 머리를 맞은 듯 한 큰 충격을 받는다.



자, 여기서 따져보자. 그렇다면 왜? 그녀가 그 순간 느낀 불순한 반감의 정체란 무엇이었던가. 실험당한 그녀를 피폐하게 하는 그토록 광포하고 악성적인 절망인자는 과연 무엇이었나? 이 같은 욥으로 상징된 한 사람의 내적굴곡을 따라가면 속수무책으로 수난 당하는 이들의 상처와 허무를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이들이 매달리는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도 사유해볼 수 있을 터다. 성서의 말씀대로라면 인과응보의 논리로는 따질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은 선택받은 자에 이미 준비되어 있던 시험에 드는 것’이라는 것이 심오한 신의 섭리라고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도 이러한 ‘선택받은 자’로서의 시험이라는 ‘의미’의 획득을 위해 부조리하게 여겨지는 不可知 신의 계획과 숙명에 그저 기도하고 또 순종했다. 영화 속 신애가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한 것도 선택받은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용서의 포즈로 이 모든 실패와 고통에 ‘의미’를 부여받아 절망을 극복하려한 의지의 표출이었다 하는 것이 사실이리라.  그런데 살인범의 얼굴에서 전해지던 평정함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이는 곧 자신을 사랑하시는 귀한 아버지 하나님은 내 자식을 해한 범인이라는 극악한 폭력의 가해자에게까지도 똑같이 자비를 베푸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표다. 이러한 가차 없는 자비를 목격한 신애는 심한 박탈감과 모욕감, 치욕스런 불신감을 느낀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기본욕구 중 하나는 나의 마음 씀과 존재의 존귀함을 (권위 있거나 소중한, 아니 자신과 관계된 모든 주변인) 타자에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일 수 있겠다. 이에 관해서는 인본주의 심리학자 메슬로우(Meslow)가 인간의 욕구는 내재적 필요에 의해서 다섯 층위로 나뉘며 이는 개인적인 중요성에 의해 표출 된다'는 ‘욕구단계설’을 통해 거론한 바 있다. 이 중 3,4 단계에 있는 ‘소속의 욕구’와 ‘애정과 존경에의 욕구’, 함축적 욕구단계설로 말하자면 2단계인 '자긍심 욕구(Esteem)'가 이 인정욕구에 해당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무량하고도 가차 없이 평등한’ 사랑의 자비 앞에서는 그 누가 기독교의 공정한 심판에 의한 용서와 심판에 있어서의 선인이고 악인일지는 그만 모호해졌다. 용서의 주체는 역전된 듯하다. 안온한 일상을 참혹하게 일그러뜨린 존재를 자발적으로 용서할 수 있는 고귀한 선민의 권리란, 애당초 부정되어 있던 듯싶다. 이로써 신의 은총으로 가능해지리라 믿었던 허무에의 초극은 재차 좌절된다. ‘은총과 사함으로 완성되는 선택받음’의 기회 또한 박탈된 듯도 하다. 내개 고통을 주셨지만 그럼에도 영혼의 안식을 꾀할 최후의 보루로 여긴 신(종교)은 기실은 그녀의 골 깊은 고통에 피상적인 공감만을 표하고 있던 것인가. 접견실을 나서던 신애가 결국엔 혼절까지 하고 말았던 것은 이처럼 헌신적 순종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의 판단에 의한 최소한의 보상이나 ‘특별한 인정’을 받을 기회라는 것이 사실은 기실 부재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에서 온 순간적인 충격반응이었던 건 아닐 것인가. 기실, 인간 믿음의 한계란 막상 따지고 들여다보자면, 그런 것, 믿음의 본질이란 대부분은 그런 것이기에-.




-나는 햇볕에 쪼지 않고 검어진 살을 가지고 걸으며 공회 중에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 

(욥기 30; 28)



피아니스트로서의 소망에, 믿었던 남편에게, 마지막 삶의 이유이던 아들에게, 이웃과 운명에게, 그리고 마침내는 그 모든 인간적인 분노까지 포기하고 매달려본 ‘신’에게 까지, ‘배신당하(였다고 느끼)는’ 여자. 주인공 앞에는 여전히 날 것 그대로의 냉혹한 현실만이 남았다. 아들은 살해당했고 자신에게는 호흡이 붙어있어 그 부재를 견뎌 살아가야 한다는 아연한 영원한 상실은 결코 복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 발악을 해 본들, 미쳐버린다 한들 원상 복구되진 못한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상실의 죄를 범한 죄인은 이제 오롯이 깨끗해져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가장 밑바닥으로 파멸시키는 요소란 인간에 대한 기만감과 배신감, 그로 인한 허무의식일 것이다. 좌절한 인간이 자아를 희생하거나 의미를 부여하고 성심껏 의지했던 존재로부터 부조리한 배신감을 느꼈다면 이는 그 한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최악의 악성인자로 작용하게 된다 (이는 실제적으로 보고 겪어 경험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도 뼈아픈 진리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의미한 허무감과 자존감의 박탈이다. 삶의 모든 의미와 의지력의 파멸, 존엄에의 상처를 복구하고자 영접한 신은, 그런 신 또한 그저 죽은 남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 신의 장난에 놀아나는 함부로 대해지는 실험체이자 기만당하는 대상일 뿐인 듯도 하다. 이러한 회의감 앞에서 일반적으로 인간은 다시 또 한 번 ‘신은 하필이면 왜 나(와 내 무죄한 아이)를 시험 들게 하여 시련을 주셨던가? 라고 하는 질문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좌절이 재차 반복될 때 사람은 심연의 절규에 몸을 맡긴다. 이렇게 되면 적극적인 반항의 포즈를 택하기도 한다. 



속절없이 시련의 분노를 감내하는 자신과는 무관하게 순진하고 고결한 포즈로 일방적인 온유와 감동을 강권하는 교인들의 모습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신애의 눈엔 선택되었다는 최면이 주입된 허위의식에 빠진 위선의 무리쯤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광증, 기억상실, 무감동한 표정의 일상화, 악몽 같은 기억의 반복, 절도와 자해행위로 엇나가는 일탈행위들이란 모두 호소할 데 없는 모진 고통에 대응한 몸부림이다. 이에 부흥회장의 스피커에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며 외쳐대는 노래를 틀고, 신애를 위한 기도모임이 진행 중이던 거실 유리창에 돌멩이를 투척하고, 자신을 신의 품으로 전도했던 약사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했던 것, 이러한 신성모독이라 할 도발적인 일탈의 행동들은 (겉보매) 반듯해 보이는 그들과 진탕의 진실을 공유하거나 혹은 나아가 함께 이 고통을 공유해 공멸해보자는 항의의 제스추어였던 셈이다. 이는 또 남편과 유괴범,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죄인을 용서해버린 신을 향해 내 안에 아직 그대로일 뿐인 생채기의 통증을 광증적 자학과 폭로의 퍼포먼스로 ‘드러내’보려한 시도이기도 하다. 압도하는 절망과 스스로의 신앙에의 환멸에서 비롯된 이러한 안쓰러운 행동들은 부조리를 인지한 탕아의 억압된 분노와 반항심이 표출된 생리적인 조건반사에 가깝다. ‘표현에 대한 욕구’ 또한, 앞서 언급한 ‘인정’욕과 함께 인간의 생리적인 근본욕구인 것이다. 이는 앞서 인정의 욕구보다 상급이라 할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부당한 처우와 권력자(절대자 혹은 운명)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이 억압될 때, 인간은 분노한다. 때문에 이 같은 신애와 교인들과의 불화는 또 집단적 동조와 인간의 본성, 단체의 가치와 개별아(個別我)의 독자성 사이에서의 충돌과 반항이라는 심급(心級)의 철학에도 닿아 있는 신화적 상황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는 또 ‘무조건적 순종에서 얻는 보상이라 할 정신적 위안과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비롯된 의존(依支)심리 혹은 선민의식이라는 초월과 불멸에의 욕구가 종교의 존재근거라고 말하는 종교의 기능적 효용성을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여 영화의 이 중반 전개는 이러한 효용론으로 종교의 본질을 관하던 무신론자의 입장을 재고해보도록 한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는 그의 종교비판 명저인 《기독교의 본질》(1841) 에서 ‘모든 종교의 비밀은 인간의 욕망의 투영이며 종교는 인간정신의 꿈’이라고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변적 신경증으로 간과해버릴 수도 있을 신애의 균열이 기실 그토록 깊었던 것은 그녀의 절망은 결국 개신교의 본질에 관한 (해묵은 그러나 언제나 논쟁적인) 신학적 의혹 곧 염세주의의 핵에 까지 내닿아 있는 존재론적 고뇌였던 까닭이다. 


그런데 ‘용서’가 그토록 어렵더라는 것은 또 한 번 역으로 생각하매, 그 용서라는 것은 바로 외형적 ‘체제’로써의 종교시스템이 주는 얄팍한 보상감 따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한 인간의 정서적 이해(타산)의 영역 너머 존재하는 차원의 참으로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신애 내면에서 반응한 이 같은 골 깊은 허무와 타락은 영화의 원작인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함의하고 있는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용서’라는 신적인 사랑의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그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라고 하는 ‘신성불가침’이라는 신학적 개념을 상기시키는 일면이 있다. 완전한 용서란 신의 영역이었음이다. 이로써 그녀의 실패한 용서는 용서를 행할 수 있는 유일무의 성스러운 존재로서의 종교의 신비로움과 고귀함에 관해 논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충분하고 넘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화 『밀양』은 세기말 발표되었던 신승수 감독의 『할렐루야』(1997) 이후 기독교에 관해 전면적, 정면적으로 신학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해본 선구적인 영화로 등재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심오함을 우회적으로 성찰한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종교영화로도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하고도 모호한 그야말로 문제적이고 양면적인 영화텍스트가 되었다.





密陽에서의 술래잡기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빽빽한 구름이 그를 가리운즉 그가 보지 못하시고 궁창으로 걸어 다니실 뿐이라 하는구나

(욥기 3; 23, 22; 14) 



희망과 좌절 사이 시련의 진폭을 저울질하던 시험대의 도시 밀양. 새로운 삶을 위해 찾아온 도피처 ‘밀양’ 그 어디에서도 ‘밀도 있는’ 빛살의 기미란 뵈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화의 오프닝에 이신애와 밀양 카센터사장 김종찬과의 대화중에 복선으로 제시된 바 있고 영화의 상징적 표제이기도 한 ‘비밀스럽고 빽빽한 볕’이란 대체 이 곳 그 어디에 존재한다는 것인가? 여기 ‘밀양’이 이토록 ‘비밀’스럽게 드러나지 않은 채 숨바꼭질만 하는 ‘密陽’(secret sunshine)의 공간이라는 건 사람살이라는 것이 본디 이다지도 그늘 짙은 고해인 때문이란 뜻이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또 다시 나락의 절망에서 구원을 갈급하던 영화 속 신애의 마지막 행로를 다시 살필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녀가 막다른 궁지로 내몰린 공허감에, 부조리한 부당함으로 자신의 자존을 가차 없이 뭉개뜨린 남편과 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벼린 칼날을 스스로에게 겨눴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또 이 장면에서 신애가 하늘을 보며 '보고 있느나?'고 읊조렸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의미 있게, 의지대로 살고 팠던 그녀의 인격을 부당한 부조리로 완벽하게 짓밟고 배신감을 안겨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던 두 존재, 즉 남편과 신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이 것이라면 자 그래, 내가 완벽하게 망가져 파멸해주겠다'고 하는 처절한 최후 비명의 복수. 허나 이러한 ‘죽음으로의 복수와 망각과 안식’에의 시도는 죽음에의 의지박약과 생의 미련, 신의 뜻 쯤 되었을 이유들로 미수로 그쳐버렸던 것 또한, 배인 동맥의 피를 흘리며 거리로 뛰쳐나와 '살려 달라' 애원하던 신애의 허랑한 절규를 기억한다.


영화『밀양』은 환난을 치르고 난 뒤 인간은 어떻게 변화하는가의 과정을 보이는 이야기이기에 첫 씬과 클로징을 대조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밀양에서의 첫 액션이란 전술한 대로 허언과 아들 사랑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자살미수로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겪은 일이란 밀양에 발 들인 첫 날 자신이 해준 조언에 따라 실내를 흰빛으로 리모델링한 이웃 옷가게 아주머니와 농담하며 한바탕 웃어젖히던 것(소통의 재시도, 접속된 소통), 그리고 이발을 하러 미용실에 들른 것(미련과 집착, 과거와의 단절)이다. 베르그송 (Henri Bergson) 선생의 간파에 의하면 나락으로 추락한 생명은 불균형으로 인한 폭발과 도약으로 치솟는 삶의 약동감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응축된 힘이 바닥을 내칠 때의 반동쯤이 될 예견 불가능한 내적 충동력을 ‘엘랑비탈(élan vital)’ 생명의 비약이라 칭한다. 그저 들른 미용실에서 비행청소년으로 망가져 소년원까지 갔던 유괴범의 딸이 이제 막 미용사로 재활하려 애쓰고 있는 모습을 조우하게 된 후 ‘이제는 정말 거울 앞에 선 누이’ 의 표정으로 거울을 (자신의 처해진 위치의 냉정한 현실)을 들여다보며 머리칼을 쳐내는 이신애. 좌절의 심연에서 그녀는 해소되지 못한 채 곪아가던 진창의 분노, 공막감, 일상화된 안위와 허영기 따위의 스스로의 나약함을 미약하게나마 암시적으로 직시할 수 있게도 되었을 것이다. 허방 그 자체이었으며 이를 가리는 방편도 되었던 그 위태하던 ‘가식적 자아’는 완벽하게 무너져 ‘가난한 심령(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3 &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욥기 22:29)’으로 새로운 삶 앞에 다시 서게 될 여지가 생긴 셈이다. 



영화의 엔딩에서는 신애가 지금껏 외사랑을 펼치던 밀양의 카센터 사장 김종찬(송강호 분)을 처음으로 자신의 집안으로 들였다고 하는 작은 변화상을 보게 된다. 종찬은 영화에서 속은 좋고 순정적이나 범속하고 속물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런 종찬이 신애에게 반하고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다 그녀를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하던 것을 떠올려보자.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의 내적 갈망, 그 소망에 공명하는 것이라 한다면 종찬의 외사랑은 지극한 순정의 표현쯤이 되는 셈이다. 그런 그의 사랑은 자포자기 한 신애의 존엄을 되비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가 비춰주고 있던 거울의 은유와 상통한다. 종찬의 이러한 태도는 일방의 희생적 용서를 강권하던 시도들의 양태와는 변별된 것이다.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나 『박하사탕』의 영호만 보더라도 사랑의 욕망을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은 조급함을 행사하는 대신 주변을 맴돌며 사모하는 마음을 품어 어떤 면에서 ‘여성적인’ 관심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남성적 권력행사로써의 연애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여기에 이창동 영화의 로맨티시즘이 감지된다.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지금까지의 ‘이창동’이라는 레테르의 영화들은 간 삶의 부박함과 목숨의 절박함을 일상의 테두리 안에 드라마틱하게 담아내는 일관성 있는 창작의 행보를 제시해온 것이었다. 전작의 행보가 그러하듯 영화 『밀양』 또한, 강렬한 현실인식 안에 지리멸렬하게 파편화한 삶과 그 안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 관계의 인과 고리에 잔인한 삶에 외상을 입고 절망 혹은 분노라는 미망에 사로잡힌 인간이 허우적대는 겨운 몸짓을 내비치고 있다. 그리고 이때 이러한 모색의 과정에서 이창동 감독이 반복적으로 제시해 의미를 부여하던 것은 바로 ‘순정’이었던 게다. 이 영화가 제시했던 영화의 홍보 카피 중 또 한 가지 인상적인 문구는 '이런 사랑도 있다' 였음 또한 이쯤해서 다시 떠오른다. 




빛의 부재, 빛의 발견 


-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

(욥기 22; 29)




무너져가던 이를 끝까지 연모하며 곁에서 지켜준 사람. 그가 재생의 길목에 선 여인의 머리손질 행위를 가만히 지키며 안받침 해주는 듯 한 풍경. 이 영화의 카메라가 최종적으로 담아내고자 한 ‘결정적인 순간’ 또한 바로 이 장면이라 해야 한다. 때문에 엔딩에서 슬쩍 미끄러지는 카메라가 담아낸 마당 한 구석 스민 여윈 빛살이 따스하고도 성스럽게도 느껴졌다면 만약 당신 또한 그러했다면, 이는 신애와 종찬이 통과해온 힘겨운 노정은 곧, 목숨의 질긴 생명력과 사랑하는 사람 간의 공명이 바로 인간이 존엄해질 수 있는 근본임을 증명해가는 과정이었던 때문이리라. 상처 입은 술래잡기 여정 끝에 정신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니 사랑이 늘 곁에 있었음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내 옆에 거한 그 누군가, 또 누군가의 우리가 되는 당신의 존재야말로 잠재되어 있던 온기와 빛-밀양, 혹은 빛 그 자체가 될 수 있던 셈이다. 이러한 광의적 상징은 신애 자신에 내재된 발광(發光) 가능성까지를 포함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처럼 종내는 인간의 손을 놓지 않았던 신, 인간 서로 간 끝까지 손 놓지 않고 부활을 가능케 하는 ‘존엄성’을 인간에 부여하신 우주의 섭리야 말로 생의 신비라 할 진정한 은총이었을 까닭이기도 하겠다. 


아마도 비밀은 여기에 있었겠다. 인간의 삶은 비록 비루하지만 머리칼은 연방 새로 자라듯 ‘그래도 삶은 지속 된다’. 그 반복의 와중에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인간의 존엄이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사실 신애와 종찬의 사람의 관계는 그저 미래를 암시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하여 현실적 감각이 녹아있는 영화의 시선은 신과 사랑의 존재에 섣부른 확신을 선사하지는 않는 것이다. 생활계란 별 수 없이 보잘 것 없다. 미래가 희망적일 것인지 또한 알 수 없다. 큰 변화 없는 그저 그대로의 일상이며 삶은 비루했다. 하지만 일상 중 불현듯 현현하는 이 같은 소소한 평온이야말로 미처 이해하기 난망하던 신의 심오한 최종의 자비, 장난 같은 밀양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리라고 전하는 듯 하다. 이것이 특별한 것 없는 세상의 범속치 않은 비밀이었다. 그렇게 한 사람은 이 섭리와 인간 간 密約의 비밀에 감응해 눈 떠간다. 그렇다면 이 시간이 바로 여태껏 가시화되지 않고 게임인 앙 끔찍스런 술래잡기를 놀았던 미광(微光)의 공간, 밀양이 비로소 사려 깊은 온기의 햇볕 빽빽이 모인 미광(美光)의 터전으로 전환되는 미처 체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곤 하는 비밀한 순간이다. 


밀양이 던져 놓는 사람과 사람, 그 비밀 사이에서 줄기 빛을 찾아내는 숨바꼭질. 밀양은 곧 우리네 일상적 삶의 터전일진대 그 놀이의 장(場)에서 놀이주체, 겜블러란 절대자, 혹은 운명이라 불리는 초월적인 우주의 섭리이리라, 혹은 의미라곤 부재한, 무신론적 실존주의 인격체 뫼르소가 말한 '이 우주의 자비로운 무관심' 그 역학 자체다. 그리고 플레이어란 농담인양 건네지는 빛과의 숨바꼭질 게임에 불현듯 걸러들어 시험받는 우리 사람들이다. 


승리의 여부는 ‘빛의 발견’에 달려있다. 답은 내안에 그리고 주변에 장난질하는 그림자인 듯 배면하고 있다. 다만 지상의 멸렬과 환멸, 좌절과 부조리한 일상과 끊임없이 고투해 그 보이지 않는 미광을 '느끼고' 긍정해야 할 뿐이다. 머리카락이 자라듯 빛과의 숨바꼭질 게임. 이는 늘 불가피한 진행형 시제로 비밀스럽고 위태하게 현현해온다. 








2008 <영화. 비평. 현실> 제 4호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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