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 수 있는 권리
떠드는 아이들은 기세가 등등하다. 그 자체가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느껴진다. 물론 교사인 내 입장에서 그 에너지가 달갑지 않다. 직업 상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이 조용히 하는 것에 힘쓰면서도 떠드는 것은 어린 학생들의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와 아이들 사이에선 암묵적인 룰이 생겨난다. '적당히 조용할 것'과 '적당히 떠들 것'. 톡 건드리기만 해도 덱데굴 데구루루 굴러다닐 수 있는 에너지를 지닌 아이들이 지나치게 조용하면 그건 그것대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조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다. 때론 떠들기 위해 태어났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고 소리가 크다. 어린이집부터 유치원까지 사회화 코스를 모두 밟아온 아이들이지만 하나 둘 모이면 내가 언제 그런 과정을 거쳤냐는 듯 짐승처럼 당당하게 떠들기 시작한다.
소음은 곰팡이와 같다. 어느 한 곳에서 작디작은 소리가 들려오면 습하고 구석진 자리에 생겨난 곰팡이가 방 전체로 퍼지듯 교실 전체가 웅성거리며 커다란 소음으로 번진다. 물론 곰팡이처럼 반갑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드는 것은 아이들의 생명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다.
눈치가 있는 아이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본다. 야, 선생님이 보잖아, 조용히 좀 해.
하지만 눈치 없는 친구는 킥킥대며 여전히 떠든다. 그럴 때 나는 날카롭게 쏘아본다.
분기탱천하던 시절의 나는 마음속 밑바닥의 미움 한 줌을 긁어모아 눈빛에 실었다. 어떻게 나를 앞에 두고 떠들 수 있어? 선생님이 앞에 있잖아. 나를 무시하는 거야? 하지만 기운이 모두 빠진, 마흔이 넘어선 나는 미움이 아닌 한 줌의 애정을 담아 쏘아본다. 누가 그렇게 떠들래? 적당히 떠들지? 내 목 아프냐? 너네 목 아프거든!
선생님의 마음을 읽은 아이들은 금세 자세를 고쳐 앉고 앞을 쳐다본다. 말간 눈동자 속엔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은 기운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것 같다. 그래. 떠드는 것은 너희들의 권리야. 가끔은 내가 그 권리를 잡아채기도 하지만 오늘도 나에게서 열심히 되찾아가렴.
그리고, 눈치껏 떠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