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휴가를 나오기 전에
어제 친구와 공부를 마치고,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문득, 첫 휴가를 나오기 전 담소라는 순댓국집에 가고 싶었던 게 떠올라서 오랜만에 어떠냐고 물었다. 딱히 다른 안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담소로 결정하고 발을 옮겼다. 가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놨지만, 머릿속에서는 왜 그리 담소에 집착했을까 하고 이렇다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고등학교는 과천에서 다녔지만, 과천에서 살지는 않았기에 늘 저녁을 사 먹어야 했다. 매일 다른 식당에 가기에는 식당도 다양하지 않았고, 내 지갑도 가짓수를 늘리기에 넉넉지 않아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그게 담소였다. 배고픈 학생을 위해 준비된 무한한 공깃밥과 적당히 합리적인 가격은 좋은 선택지가 되기 충분했다. 그 때문에 더 담소가 싫었다. 툭하면 가니까. 가면 친구들이 있을 거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도 결국 친구니까. 안 그래도 똑같은 하루인데, 식사마저 틀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왜 하필이면 담소였을까. 사실 순댓국은 담소보다 자매 순댓국을 훨씬 좋아하는데. 군에서 못 먹는 초밥이나 물회는 몰라도, 순댓국은 종종 나오는데. 하필이면 담소였을까. 이유에 대해 고민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식당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매일 가던 학원 건물의 화장실에 갔다. 전과는 달라진 화장실을 보며 불현듯 깨달았다. 나에겐 이게 일상이었구나. 학원 건물에서 나와 친구들과 담소를 가는 게 너무 당연했구나. 나는 담소에 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런 일상의 연장선으로, 일상을 그리워하는 하나의 방식이었구나. 학원 위층에는 다니던 독서실도 있어서 고등학교 때는 그곳에 살다시피 했다. 건물이 있는 블록이 나에게는 일상이었다. 다만, 휴가 때 학원을, 또 독서실에 가기에는 조금 괴리감이 드니까. 그래서 대안으로 찾은 게 담소였나 보다.
나름의 깨달음을 얻어 즐겁게 친구에게 설명했다. "야 내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라며 말이다. 비록 담소는 문을 닫아서 버거킹으로 급히 대체해야 했고, 친구는 신나는 듯 말하는 내가 이해가 안 갔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여운이 남았는지. 순간을 떠올리는 것 마저 행복하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날 순댓국을 같이 먹은 친구에게 전화를 했을 정도니까. 감정의 이유를, 설명할 방식을 찾았다는 게 좋다. 그래 그랬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