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주저리
아직 본 적도 없는 금각에 드디어 접할 순간이 다가오면서 내 마음에는 주저가 생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금각은 아름다워야만 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은 금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금각의 미를 상상할 수 있는 내 마음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저, 30-31p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사물과 공간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한다. 때문에 하나의 대상은 바라보는 사람의 수만큼의 가치를 가진다. 평범해 보이는 시계가 다른 이에게는 소중한 아버지의 유품일 수도 있고, 길가의 식당이 사랑하던 사람과 즐겨 가던 추억의 장소일 수도 있다. 이러한 면에서 대부분의 경우, 가치는 경험에 후천적인 면모를 보인다. 물론, 가치가 경험에 선천적인 경우 또한 실재한다. 친구에게 추천받은 음식점이 대표적인 예인데, 우리는 음식점에 가보지 않았음에도 맛집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가치가 부여된 공간 또는 대상과 접하면, 반응은 만족과 불만족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이때의 경험은 예상과 현실을 면밀히 비교하는 가치 검증의 장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기대는 실망으로 이어진다. 더 나아가 실망이 상처로 변모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겪었다는 파리 증후군-파리 신드롬-도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몇십 년 전 일본인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파리에 환상-가치-를 가졌지만, 실제 파리와의 차이에 정신적 질환을 겪었다고 한다. 일본인, 파리라는 단어 때문에 우리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의사가 일본인 일뿐, 비슷한 증상은 여러 이름으로 변주되어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때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 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결국 감상의 주체는 우리이기에 대상의 가치는 어떻게 의미를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사소한 구성 하나하나를 해체하고 분석하며 의미를 찾는 행위가 즐거움이 된다. 미조구치-상단의 인용구 금각사의 주인공-또한 동일한 고뇌를 느꼈다. 아버지로부터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기에, 미조구치에게 금각은 단순히 멋진 절이 아닌, 미 그 자체여야 했다. 미조구치는 미과 금각의 틈을 메꾸기 위해 상상이라는 도구를 택했고, 금각을 사랑하게 된다. 미조구치처럼 대상의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미조구치의 두려움은 현실적이다.
이처럼 선천적 가치와 후천적 가치에는 간격이 존재하나, 선천적 가치가 후천적 가치에 덧씌워질 수도 있으며 반대 또한 가능하다. 나에게 있어 금각 두 종류의 가치 모두를 함유하는 대상이다. 금각을 눈으로, 책으로, 다시 눈으로 보았고, 금각은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20살의 봄. 꽃들이 태동할 무렵에 금각은 보잘것없었다. 21살의 여름. 차가운 새벽의 밤공기 속 책 속의 금각은 아름다웠다. 24살의 봄. 4년 만에 다시 마주한 금각은 처연했다. 만약 책으로 금각을 보지 않았더라면, 금각은 볼품없이 남아있었을 테요. 20살의 금각을 보지 않았더라면, 24살의 금각은 아쉬움으로 가득했으리라 생각한다. 그저 나의 금각과 미조구치의 금각이 공존하기에 또 다른 시각을 낳았을 뿐이다.
이번 봄의 금각을 끝으로 4년에 걸친 여정은 끝났다. 아마 교토 여행은 가도 금각에 방문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금각사를 읽은 뒤, 다시 금각에 가겠다는 큰 숙제를 드디어 하여 홀가분하다. 언젠가 금각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4년의 기억을 반추하며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을까. 생각 속에만 있던 이야기를 쓸 핑계가 되어준 금각에게 감사를 표한다. 동시에 무채색이었던 가치에 색을 부여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행운이라 여기며.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 시시각각 행해지지만, 인상과 감정에 있어 큰 발자국을 남기는 섬세한 일.
모든 순간이 아름다울 수는 없으나, 때로는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