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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레멘타인 Mar 08. 2016

(1분소설) 여자와 엄마 사이

나는 이제 그렇게 살기로 했으니까

모두가 잠드는 새벽 1시, 이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만의 세상이 된다. 늘 잠이 많은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깨지만 어느새 익숙해진 백색소음 같은 소리다.

결혼이라는 건, 글쎄 어느 순간부터 내게 현실로 다가왔다. 설레는 순간도 잠시, 뭔가 결혼하는구나 할 때쯤에 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다지 실감 나지 않았다. 늘 내가 사랑하던 남자였고, 가끔 말다툼이 있어도 눈물로 미움을 삼키던 시간들, 자고 일어나 얼굴 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잠시, 아이가 생기는 날부터 우리는 뭔가 정말 결혼한 사람이 되었다. 가족이라는 무게.

나는 예전부터 감성적이었고 약간은 변덕이 심했다. 가끔 중2병에 걸려 짜증도 잘 부리고 유난스러운 곳이 있었다. 남편은 그래도 잘 참아주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잘 버텨준 거 같다. 내가 맞춰놓은 라인에 들어오려고 노력해준 모습이 늘 고마웠다.

작은 아이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예쁘게 자라 주었고, 어느새 재잘재잘 이쁜 말도 많이 했다. 나는 가끔 고집부릴 때만 빼면, 결혼하길 잘했다, 아이 낳길 잘했다 스스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렇게 결혼 생활은 누가 봐도 순탄한 모습이었고 나도 어느 정도는 만족을 하며 살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그날도 나는 늘 그렇듯, 나의 작은 천사와 동네 공원을 나갔다. 이제는 제법 혼자 놀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눈망울로 나에게 이것저것 질문 공세를 펼치기도 한다. 작은 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졸랑 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한 내 보석.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공이 구르고 굴러 한순간 도로에 나가버렸다. 나는 아이를 잠시 의자에 앉혀 두고 공을 잡으러 갔다.


순간,

어디선가 은색 소나타가 나타나 뻥~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의 공을 터트려 버렸다.

!!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차 운전자도 큰 소리에 놀라 차를 멈춰 세웠다.

이윽고 차에서 내리는 한 사람.

나는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나고, 미안하기도 해서 감정이 너무 복잡해 그저 멍하니 서있었다. 차 주인이 나와 차 밑을 휙휙 살피더니 차바퀴에 깔린 납작한 공을 보곤 차를 다시 후진했다.

너덜너덜한 공의 가죽이 물에 젖은 비닐 마냥 도로에 그대로 드러났다. 아. 내 마음도 처참해졌다.

내가 그걸 주으러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람은 차에서 다시 내렸다.

"죄송해요. 못 봤네요."
"아, 괜찮아요. 저희가 잘 못 한걸요. 공원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게 여기까지 굴러왔네요."

근데 때마침 작은 아이가 와서 납죽해진 자신의 공을 보더니 으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우리를 쳐다보았다. 나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이를 내 품으로 돌려세워 안아주었다. 그러나 울음은 쉬 그치질 않았다.

"어떡하죠. 공... 배상해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얼마 하지도 않는 걸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잘못도 있는 데요, 뭘."

한참을 울던 아이가 빨리 공을 다시 사달라고 떼를 쓰며 보챘다. 나는 이따 아빠 집에 올 때 사 오라고 하자,며 아이를 달래 보았다.

"저기, 여기 제 명함이에요. 죄송해요. 연락 주세요. 혹시 문제 생기면..."

나는 아이가 우는 통에 정신이 없어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 들고 남자와 헤어졌다. 나의 천사는 어느새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어르고 달래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물려주고 겨우 집으로 데려왔다.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 하필이면 그때 차가 지나갈 게 뭐람.

그날 밤, 집에 올 때 공을 사 오라고 얘기했지만 남편은 늘 그렇듯 깜박하고 사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대충 둘러댔다. 하루 종일 아빠만 기다리던 아이는 다시 대성통곡을 하고 나는 아이를 달래느라 진이 빠졌다.


남편에게 짜증도 부려보았지만 일하고 온 사람에게 피곤하게 한다는 말로 우리의 일상은 또 끝이 났다. 가끔 이런 작은 일들의 반복이 나의 결혼 생활을 지치게 한다. 습관화된 패턴은 늘 탈출하고 싶은 마음의 굴레였다.



일요일 아침, 나는 아이를 마트 놀이방에 데려다주고 장을 보고 있었다. 남편은 직원 워크숍이 있다고 2박 3일 동안 강원도 정선으로 갔다. 그 기간 동안 아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휴. 그나마 일요일에는 남편이 아이를 봐주는 시간이 있어 조금 편했는데... 일주일 내내 육아를 해야 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인생인걸.

늘 그렇듯 , 나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장을 보고 아이를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바보같이 남편이 없다는 걸 깜박했다. 차에 싣는 순간, 집에 들고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앞일이 깜깜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가는 건 몇 번에 나눠 차에 옮겨 실으면 되니까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집에 도착한 후 아이와 이 많은 짐을 한 번에 올라가기란 불가능 이리라. 내가 왜 이렇게 욕심을 내고 장을 봤는지 모르겠다. 남편이 있으면 이런 건 다 들어줄 텐데. 처녀 때는 장을 혼자 어떻게 봤더라?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휴일이다.

나는 주차를 하고 일단 아이를 먼저 집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장 본 짐들을 끙끙 거리며 들고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뿔싸. 고생 남편이 오면 주려고 욕심내서 산 수박이 문제였다. 


우리 남편은 수박 귀신이다.

그래서 나는 수박만 보면 씨를 툭툭 뱉어내고 있는 남편 얼굴부터 떠오른다. 그렇게 우리에게 수박은 사랑의 대명사로 변했다.... 신기한 일이야.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수박이기에, 나는 남편이 좋아할 생각을 하며 카트에 담았다. 하지만 주차를 하고 보니, 그걸 한 번에 들고 가기란 무리라는 게 더 실감 났다. 어쩔 수 없지. 몇 번 왔다 갔다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수박이 육중한 압력을 못 이기고 쭈욱 비닐을 뚫고 나왔다. 가관인 건 같이 들어있던 사과와 키위가 제 멋대로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안돼에-.

이기익~~~!!!

엉거주춤 서서 과일 줍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급정거하는 차 소리에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회색 소나타 한대가 내가 놓친 키위 몇 개를 차바퀴로 짓이기고 있었다. 아악, 젠장.


나는 더 울상이 되어버렸다.

"괜찮으세요?"
"아, 예예예. 금방 치울게요, 잠시만요"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바닥에 뒹구는 과일들을 열심히 주었다. 그때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와 과일을 하나를 주워 내게 건네었다. 그때서야 쳐다본 나는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어머나!"
"어?"

아이 공을 터트린 그날 그 사람이다.

"또 뵙네요."
"아, ,, 그러게요."


나도 모르게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또 실수를...."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비닐이 찢어지는 바람에..."


"아니 여자 혼자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다 들어요? 게다가 수박까지... 힘이 좋으시네요."

"아... 남편이 수박을 좋아해서"


나는 예상 못 한 말에 뭐라도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괜히 귀까지 빨개졌다.

"그럼 남편분에게 들어달라고 하시지, 이거 꽤 무거운데"

그 사람은 수박을 위아래로 들었다 놨다 하며 무게를 재었다. 나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대충 과일을 주워 들고 일어섰다.

아뿔싸.

일어선 나의 두 손에는 수박을 들을 손이 없었다. 나는 두 손을 포개어 수박을 위에 얹어달라는 시늉을 했다.

"저기... 죄송한데 여기 여기 위에, 수박 좀 올려주세요"


"예? 수박까지요? 다 들으실 수 있으세요? 그러지 마시고 남편분에게 전화 한번 해보세요"
"아아, 괜찮아요. 엘리베이터만 타면 돼서요. 그리고 지금 그이가 출장 중이라... 앗. 아니에요. 주세요."


"아, 그럼 제가 들어다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리 주세요. 저 무거워요."


"아, 네. 죄송해요. 하긴, 좀... 그렇죠? 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저두 이 아파트 살아요. 저기 107동 1004호, 그럼 제가 나가는 길에 경비아저씨 불러드릴게요. 조금만 서 계세요. 그럼 되죠?"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한 5초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무리였다. 그 사람은 다시 차를 타고 나갔고 이윽고 경비아저씨가 왔다. 그는 또다시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며 차를 몰았다. 차 소리가 멀어질 때쯤, 나는 아저씨에게 아까 그 사람에 대해 물어봤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그랬다. 늘 인사도 잘하고 매너도 좋다는 아저씨의 말에 조금의 오해는 풀렸다. 그리고 혼자 사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래요? 하고 딱히 할 말이 없어 고맙습니다. 하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오니 밖에서 너무 오래 지체해서 그런지 아이가 또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장 본 것들을 식탁에 풀어놓고, 냉장고 수납칸 등등 여기저기 정리를 했다. 나의 시장바구니를 이것저것 열어 보던 아이는 맛있는 걸 해 달라고 졸라댔다. 나는 정리하다 말고 곧바로 아이 간식을 만들었지만 아이는 먹는 둥 마는 둥 장난만 쳤다. 결국, 남은 것을 내가 다 먹어야 했다.

왠지 모를 피곤함이 서러워 남편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았다. 바쁜가.


다시 설거지를 하고 장난감을 정리했다. 남편이 없는 하루는 그냥 아이와 적당히 먹고 싶다. 아이에게는 야채를 곱게 다져 볶음밥으로 저녁을 해 먹이고 나는 대충 때웠다. 왠지 밥 맛도 안 났다. 


이유 모를 거추장스러움이 발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이를 씻기고 눕히자 오늘도 시작된 잠투정. 아이는 한 참을 투정하다 겨우 잠이 들고 보니...
시간은 벌써 열한 시였다. 휴.


불 꺼진 집안, 남편의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아무도 안 사는 집같이 썰렁했다.  남편이 뭐라고... 없으니 보고 싶어 지는 게... 신기하네.
모든 게 평화롭게 느껴지는 시간, 나는 빨래만 담가 두고 드라마나 다운로드하여 볼 생각을 했다. 요즘 응팔이의 류준열에 빠져 몇 번째 다시 보기 중이다.  나두 저런 날들이 있었던가.


옷을 갈아입으려 무심코 주머니를 뒤졌다.

"김영현"

이게 뭐지?
바지 주머니 한쪽에서 구겨진 명함 한 장이 나왔다. 그 사람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그냥 호기심에 명함에 써진 대로 sns에  접속해 찾아보기로 했다.

넓은 듯 좁은 세상,
그 사람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긴 페이스북을 보게 되었다. 나는 오픈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그곳엔 친구와 술 마시는 이야기, 그 사람의 생각, 하는 일, 매일 가는 곳, 좋아하는 것,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왜 일까. 나는 그냥 하나하나 자세히 읽어 보게 되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냥, 본 것이다. 그리고 왠지 왠지 모르게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일 거란 느낌이 들었다.


불현듯 낮에 일이 떠올랐다. 잔잔하지만 강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최근에 아파트로 이사 온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다 나와 마주친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근데 댓글에서 아름다운 여자와 마주쳤다고 쓰여 있었다.

두근.

그냥 쓴 말이겠지.
나는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아름답다? 그런 표현 자체를 못 들어 본 지 오래된 거 같다. 여자들끼리 만나면 하는 입바른 칭찬들 빼고 말이다
결혼하고 딱히 다른 남자에게 칭찬받을 일들이 없었으니까.

나는 꿀통에 빠진 벌처럼 자꾸만 더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도 모르게 밤만 되면 아이를 재운 후 그 사람의 sns에 접속하는 게 일이 되었다.

자주 가는 커피숍 사진이 많이 나왔고, 그건 우리 동네 카페였다. 나도 작은 아이 어린이집 보내고 아주 가끔... 시간 보내는 곳인데...

나는 내일 그곳에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모르겠다. 이런 기분이나 생각들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거? 절대 아닌데... 그럼? 그냥... 아 모르겠다. 진짜. 그냥 호기심이야. 그냥 우연을 가장해 한 번 마주치고 싶다.. 는 생각이 든 거다.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냥.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남편이 코 고는 깊은 새벽이면 ,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sns에 접속해 훔쳐보고 있었다. 습관처럼. 그러다 새벽에 남편이 뒤척이기라도 하면 난 무슨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핸드폰을 급히 껐다. 뭐 하는 짓이람.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여자로서 느껴보는 설렘들... 신선함이라 혼자만이라도 간직해 보고 싶었다. 이 나이에 내가 뭘, 그 사람과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생각일 뿐이잖아. 내 상상이고.
내 감정의 일탈이고... 나만 간직하고 싶은...

나는 아이를 보내고 아침마다 그 카페로 향했다. 예전과 달리 옷이 신경 쓰였고, 옅지만 화장도 꼭 하고 나갔다. 매장을 들어갈 때마다 눈으로 누군가를 쫓듯이 훑으며 들어갔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고, 나의 마음의 방황도 점점 수그러들었다.



여유로운 아침, 어느새 습관이 되어 커피 한 잔을 하며 나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고파 크로와상 하나를 시키고 조금씩 베어 물고 있을 때, 누군가 익숙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빵을 미쳐 빼지 못하고 돌아보았다.

"엄마나, 켁"

나는 너무 놀라 빵을 전부 흘렸다.

"어어,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놀라게 해 드릴 려던건 아닌데... 여기, 닦으세요."

나는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 정신을 못 차렸다. 무슨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화끈대고  귀까지 빨개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잘 지내셨어요? 오랜만이네요. "
"아, 네네. 네..."


"아이도 잘 지내죠?"
"아, 네..."


"아, 혹시 방해되었나요. "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도 혼자 와서 심심하던 참이었어요."


뭐래니 , 내가 지금.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저도 커피 좀 시키고 올게요."
"아, 네네."


"뭐 좀 더 드실래요? 케이크나 뭐"
"아니요. 아니요."


"그럼, 잠시만요."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이 오르락내리락해서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셨다.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계산대 앞에서 주문하던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자 그는 너무도 따뜻한 미소를 보내왔다. 나는 또다시 화들짝 놀래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어떡하지... 나 왜 이러니...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그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갖가지 사이드 메뉴를 들고 왔다. 헐. 누가 보면 네 명은 있는 줄 알겠다.

"아, 뭐 좋아하실지 몰라서 그냥 대충 사봤어요. 아침 드시는 것 같아서, 드세요."


"예? 아, 아니에요. 드세요. 드세요."


"아, 혹시 다이어트 중이세요?"
"아, 네?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케이크 이런 건 안 좋아하시나 보다."
"아니에요. 진짜 좋아해요. 케이크"


"그럼 같이 먹어요. 여기 케이크 진짜 맛있어요. 가끔 , 울적한 날 제가 이 집 케이크  싹쓸이 해가는 날도 있어요. 드셔 보세요."

나는 그가 살짝 잘라 건네어 주는 케이크를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기분이 오묘했다. 수줍은 소녀가 된 기분... 하지만 순간, 아는 엄마들이 보면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 어떡하지?



"아이 기다리시는 거예요? 저는 여기 자주 오는데 요즘 업무가 너무 밀려서 못 왔었거든요."
"아, 네. 저도 여기 매일... 와요."


"매일요? 어 근데 왜 한 번도 못 봤지. 저도 그전에는 매일 오다시피 해거 든요. 아 그땐 서로 얼굴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죠"
"아, 네..."

나는 차마 당신이 여기 자주 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온다고 말하지 못했다. 당신 때문에 알게 됐고 , 혹여나 당신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오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지. 그냥 집 앞이니까. 아니지. 맞지. 아냐. 아닌가.


마음이 크면 말이 잘 안 나오는 법인가 보다. 나는 그다지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냥 대답만 그것도 바보같이 띄엄띄엄. 갓 말을 배운 애라도 되는 것 같았다.

시간도 야속하지. 나는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아이 때문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 그래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나는 인사를 꾸벅하고 조심히 일어났다.

"아, 참! 자주 뵈는 것도 인연인데, 성함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실례인가요"
"아, 저.."

나는 갑자기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서 엄마. 내 이름은 어느 날부터 미서 엄마였다.

"현주예요. 이현주."
"제 이름은 김영현이에요. 현주 씨 예쁜 이름이네요. 제 첫사랑 이름도 현주였는데... 잊어버린 일은 없겠는 걸요. 우리 , 같은 동네에 아파트 주민인데 친하게 지내요. 시간 되실 때 가끔 여기서 커피 한잔... 해요."
"아, 네 그래요."
"그럼 들어가세요"

나는 긴장하며 매장을 빠져나왔다. 괜한 어지럼증이 일었고 뒤에서 그 사람이 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시선이 느껴져 돌아볼 수 없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걸이에 최대한 신경 쓰며 걸어갔다. 괜히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작은 아이는 벌써 나와 선생님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 얼굴을 보니, 다시 일상의 내가 된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나를 그렸다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한참을 재잘거렸다. 그 재잘거림이 다시 나를 한 아이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만들어 주었다. 다행이다. 다시금 행복하고 평범한 일상의 미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집에 돌아오자 얼마 안 있어 마음이 뒤숭숭했다.



아침의 짧은, 아주 짧았던 그 20분이 내겐 너무나도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건 심각한 스팸성 광고창처럼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 그 따스하던 목소리, 반짝이는 눈동자, 길쭉하던 하얀 손가락들, 깔끔한 옷매무새, 날 궁금해하는 듯한 표정, 그 모습들이 모두 합쳐져 자꾸만 떠올랐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장난감을 정리하는 순간에도, 간식을 만들다가도, 아이를 재우는 시간에도

자꾸만 아침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자리에 들면 빨리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잠이 오지 않아 나는 밤새 뒤척거렸다. 시간은 더디 흘렀다. 결국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깨어 분주하게 반찬을 만들었다.

남편은 푸짐하게 만들어진 반찬에 놀라며, 왜 오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어제 티브이에 이 요리가 나왔다고 했다. 이게 남자한테 좋데. 많이 드셔요. 서방님. 거짓말은 아니었다. 티비에 나왔으니까. 더 디테일한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실이니까. 남편은 기분 좋게 한 그릇 뚝딱 비우더니 출근을 했다.

나는 거울을 봤다. 누구지. 왜 이렇게 추레해졌지.

옷장 앞에 서서 더 오랜 시간 서성였고, 이도 저도 못한 채 결국 옷을 사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너무 옷을 안 샀어.


맨날 남편 옷이나 애 옷만 샀지 내 옷을 안 산지 너무 오래다. 옷장 안에는 아가씨 때 입던 옷들만 잔뜩 이었다. 최근에 산 거라고는 홈쇼핑에서 편안하게 입는 티셔츠 5개가 색깔별로 있었다.


그건 그냥 애가 옷을 하도 잘 잡아당겨서 편안하게 입으려고 산 옷이었다. 거울 앞을 한 없이 서성이는 내 모습은 나조차 잊고 있던 여자의 모습이었다.


옷을 좋아하던 나.

난 나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어 스스로가 신기하고 부끄럽고 또 반가웠다.

어찌어찌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다 보니 아이를 데려다주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허둥지둥 아이를 데려다주고 곧장 카페로 향했다. 이른 아침 나처럼 차려입고 온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너무 오버하였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옷을 예쁘게 입으니 왠지 몸 가짐도 더 조심스러워지는 듯했다.


나 스스로가 괜히 뭐랄까, 좀 더 여성스러워지고 당당해지는 기분도 들었다. 힐끗 거리는 사람들의 시선도 왠지 우쭐해지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도록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무룩해져 갔다. 대상 없이 미움이 일어났다. 뭘 기대하는 거야. 또 한편으로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줌마가 차려입는다고 아가씨 되냐, 라는 온갖 자책감들이 들었다.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아무도 관심도 없는데 혼자 설레발치고 지금 뭐하냐, 화장 떡칠하고 여기 앉아서... 뭐 어쩌자고.

나는 우울한 기분과 쪽팔림이 동시에 들어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어 카페를 나섰다. 그때였다.

빠앙!

나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익숙한 회색 소나타가 서있었다.

"현주 씨 벌써 가시는 거예요?"
"아, 안녕하세요"


"에이, 제가 좀 늦었네요. 일찍 왔으면 같이 모닝커피 하는 건데"
"아... 바쁘신가 봐요."


"아니요, 오늘 일이 좀 꼬여가지고, 그나저나 현주 씨 오늘 약속 있으신가 봐요. 눈 부신 대요 원래도 예쁘지만?."
"예?... 아이, 아니요. 그런가. 그냥 평소랑 같은 건데..."

나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술술 했다.

"아! 혹시 약속 없으시면 저랑 점심 어때요? 애기랑 같이 가요"
"네??"


"아, 요기 우리 동네에 새로 생긴 샐러드바 있잖아요. 거기 애기 놀이방도 있고 좋다던데. 같이 가보실래요? 저도 오늘 점심 혼자 먹어야 돼서요. 다른 약속 있으세요?"

"예? 아니요. 그건 아닌데."
"아, 좀.. 그런가요. 제가 너무 친한 척하죠? "


"아, 뭐 그건 아니고."
"그럼 같이 가요. 우리 할인마트 아시죠? 거기 건너편 삼층 빙글 샐러드 바라고 생겼어요. 제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을 게요."


".. 빙글이요?"
"네, 그럼 거기서 봬요."
".. 아.. 예.."

나는 얼떨결에 약속을 잡아버렸다. 뭔가 그 사람의 질문에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뒤로 밀리듯 대답해버렸다. 차는 휑하니 가버렸고,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하게 서있었다. 뭐지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미쳤어.
무슨 동네에서 모르는 남자랑 밥을 먹는다는 거야.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뭐가 뭔지도 몰겠고 상황판단이 서지 않았다. 허둥지둥 어린이집으로 가니 아이는 또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아이를 보는 순간 약속을 잡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전화번호도 모르는 이 순간, 어떻게 약속을 취소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식당에서 마냥 기다리게 해? 그냥 모른 척 가지 마? 다음에 마주치면 뭐라고 하지? 마냥 기다리게 둘 수도 없는 데, 아...


일단 오늘은 가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은 부담스럽다고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는 샐러드바에 간다니 마냥 좋아했다. 그리고 남편에게는 그냥 외식이라고만 카톡을 보냈다. 어디서부터 뭐부터 설명해야 할지 좀 망설여졌다. 다음에 시간을 갖고 천천히 말해야지...



아이와 같이 식당에 도착해 남자 혼자 온 사람 없냐고 물었다. 우리는 자리를 안내받고 따라갔고 그곳에는 그 사람이 해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왔어요? 안녕 꼬마"
"안녕하세요."


"엄마 친구분이셔 삼촌 기억나?"


"앗, 내 공!! 삼촌이잖아"
"어어, 기억하는구나. 맞아. 그때 그 삼촌"

그때 그는 바닥에서 종이가방 하나를 건넸다.

"자!"
"이게 뭐예요?"
"그날 미안해서 오늘 길에 샀어. 잘 가지고 놀아. "


그 안에는 커다란 축구공과 아이용 고무공이 들어있었다.

"와!!!!! 공이다!!!"
"삼촌이 그날 미안했어. 이제 용서해줄 거지?"
"응!!"
"어...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저희 공 샀어요."


"에이, 그래도 제가 그날 터트려서 애가 많이 울더라고요. 저 때문에 당황하고 달래느라 힘드셨을 텐데. 죄송해요. 너무 늦게 드려서. 연락할 방법도 없고, 연락이 없으셔서, 제가... 연락처도 모르고."


"아, 진짜 괜찮은데. 이러실 필요 없는데... 아무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삼촌 최고다!!!"

연신 행복해하는 아이를 보니 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그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내 눈에 알알히 박혔다.

이 사람,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나는 밥을 먹는 내내 그 사람이 행동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아이가 떼를 쓰고 무례하게 행동해도 그는 마치 아이 열명쯤은 다뤄본 것처럼 능숙하게 아이를 다뤘다. 나는 너무 신기해서 결국 물어봤다.

"아이 좋아하시나 봐요.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지치셨을 텐데..."
"아, 네. 저희 집에 완전 막둥이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고 녀석 거의 제가 키우다시피 해서,, 아이 좋아해요. 지금 중학생이라, 사춘기 방황 중인 동생 한 명 있어요."

그 사람은 나에게 딱히 무언갈 묻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평범한 일상들 이야기로 시간을 채워갔다. 왠지 깊게 서로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괜한 아는 척으로 내가 그 사람 sns를 뒤져봤다는 게 들통날까 봐 말을 아꼈다.

"엄마, 엄마 아빠도 라그래 응?"
"어. 아빠는 지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 저녁에 오실 거야."


"그럼 엄마 , 밥 먹고 우리가 아빠 회사에 가자."
"에이 아빠 일해야 하는데... 우리가 가면 아빠가 불편해요. 집에 가서  조금만 기다리자."


"그럼 엄마, 집에 가서 축구하자"
"집에서 축구하면 아랫집 할아버지가 이 놈 해요. 저번에 봤지? 수염 이따만큼 긴... 무서운  할아버지."


"아... 그럼 엄마! 공원에서 하면 되지?"
"휴... 그래 그러자."
"예~ 빨리 가자 가자 엄마"

아이는 보채기 시작했고 나는 괜한 소란을 만들기 싫어 양해를 구하고 , 먼저 일어나 봐야겠다고 했다. 그는 자기도 다 먹었다고 같이 나가자고 했다.

"삼촌 저랑 축구해요"
"안돼 삼촌 바쁘셔. 엄마가 놀아줄게 저희 먼저 갈게요. 죄송..."
"축구? 너 축구 잘해?"
"네 축구해요 집 앞에 공원에서요"
" 그래 그럴까?"
"예~~~~~!!!"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지만, 아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울 것 같아 더 말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의 힘이 언제 커질 수 있는지에 대해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나는 식당을 나와 아이를 일단 차에 태워놓고 말했다.

"저희 애 때문에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일하러 가보세요. 저희끼리 갈게요."


', 저 안 귀찮아요.'


"저희 애가 좀 붙임성이 좋아서 하루 종일 놀아달라고 하면 감당 못 해요.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러모로 죄송하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그래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나는 머릿속으로 연습한 말을 책 읽듯이 꺼내 놓고 최대한 거절을 하고 돌아섰다.


"저... 현주 씨."
"네?"
"저, 내일 오전에 커피숍에서 봬요."
"네?"
"아.. 저두 내일 카페 간다고요."
"아...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들어가세요."

나는 돌아서면서 심장이 두근 댔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나 혼자만의 상상일 땐 괜찮았다. 그런데 자꾸 뭔가 가까워지는 기분이 드니까 나는 오히려 겁이 났다. 이게 뭐지?
나는 차를 타고 공원으로 향했다. 아이는 삼촌이 왜 안 오냐고 계속 물어왔다. 결국 , 나는 애꿎은 아이에게 짜증을 냈고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징징 대는 아이도 누군지 모를 남자에 관심도 무관심한 남편도 모든 게 지겨웠다. 거미줄에 엉켜 들어 숨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가 준 공으로 공놀이를 하는 아이를 공원에 두고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남편에게 삼촌 얘기를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남편이 오기 전에 미리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회식이 있다며 연락을 해왔다. 나는 아이를 재우고 일찍 자려고 누웠다가 다시 그 사람의 sns를 열었다.


언제나 가질 수 없는 사람이기에 더 간절해지는 건 나의 죄지 당신의 죄가 아니야.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은 내가 할게. 그냥 거기 그대로 있어....

걱정 마.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게.

알 수 없는 글들이 쓰여있었다. 나는 오돌오돌 소름이 돋고 심장이 두 방망이질 쳤다.

이게 뭔 말이야?
설마? 에이... 나 너무 소설 쓴다. 무슨 아줌마한테 관심이나 있겠어. 그렇게 매력 있고 괜찮은 남자가 미쳤니? 도끼병도 제대로다. 참.

나는 괜한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신경 쓰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남편은 새벽 세시가 되어 고주망태가 되어 들어왔다. 나는 남편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드르렁 -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왠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듯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미치도록 공허한 기분이었다.

다음날, 일찍 해장국을 끓여놓고, 아이를 데려다줬다. 나는 일부러 카페에 가지 않고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아이와 공원에 갔다.

날 기다렸을까.

나는 엄청 신경 쓰였지만 엄연히 만나자는 약속도 아니었고,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미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난 그 카페를 가지 않았고 야외 출입도 자제했다. sns도 열어보지 않았다. 사실 무언가 무서웠다. 남들이 생각하는 그런 바람 난 여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노심초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난 설레었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을 바치거나 가족을 버릴 만큼의 마음의 크기는 아니었다.


괜한 오해를 사서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고 나 스스로도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결혼한 여자였고 한 아이의 엄마였다.

무엇보다 아이가 걱정되었다. 엄마라는 존재가 만드는 별 일 아닌 사건으로 큰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딱히 마주 칠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고 나는 서서히 그를 잊어갔다. 다시 미서 엄마, 석현이 아내로 자리 잡았다.

여름이 되고 어린이집 방학이 되었다.

나는 아이와 공원에서 놀다가 오후에 너무 더워 그 카페에 다시 찾았다. 팥빙수 하나를 시키려고 하는 데 나를 알아보던 사장이 너무 오랜만에 왔다며 줄 게 있다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 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작은 손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누가 맡기고 갔다며.

나는 누구냐고 물어보았지만 주인은 자주 오는 손님이신데 이사 간다고 하면서 전해주라고 했단다. 같은 아파트 주민인데 인사도 못 하고 간다고...

그 사람이다.
이사? 갑자기?

나는 다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둘러 자리에 앉아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섣불리 가방 안을 열어 볼 수 없었다. 훔친 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이 내가 훔쳤던 마음에 원망이면 어떡 하나... 나는 손이 떨렸다. 진정이 되지 않아 아이와 빙수를 다 먹을 때까지도 열어보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나는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에 숨겨 두었던 종이가방을 열었다. 긴장되고 떨리고 두근거렸다. 이런 감정의 의미를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가방 안에는 작은 편지지와 함께 작은 향수가 하나 들어있었다.

부드러운 느낌이 잘 어울릴 것 같아 골랐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간결하고 짧은 글, 그게 다 였다.


 어떤 설명이라던지 안부라던지 왜 오지 않았는지, 이사를 간다던지 하는 어떤 이야기도 없었다. 나는 왠지 더 궁금해지고 더 알고 싶어 지는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못내 서운하기까지 했다.

뭐야.

나는 향수를 오픈해 공중에 살짝 뿌려 보았다. 뭐지? 어딘가 익숙한 향인데...


나는 반사적으로 그 사람의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 그 사람한테서 맡았던 향이잖아. 뭐야. 자기가 쓰는 향수인가. 나는 다시 한번 향을 흩뿌렸고 이번엔 더 또렷하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드러운 목소리도, 온화한 미소도 , 그날의 모습도 함께 나눈 대화까지 한 편의 영화처럼 돌아갔다.

심장이 두근두근 두근...


나는 핸드폰을 뒤져 한 동안 보지 않았던 그 사람의 sns를 뒤졌다.

...

보고 싶다.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날 밤에 올린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로 그의 sns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나는 이사를 갔다는 게 이상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왜 또 이사를 가지? 설마 나 때문에? 나는 혼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한쪽 가슴이 시린 느낌이 났다. 왜? 이게 뭔데? 뭐 연애라도 했냐. 정신 차려라.


나는 혼자 도리질을 했다. 그리고 남편이 보면 오해할까 봐 편지지를 찢어야겠다 생각하고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글자가 물에 번져 있었다.


쫘악쫘악


나는 그대로 편지를 찢었다. 갈기갈기 조각내었다.  왠지 내 가슴도 함께 갈가리 찢겨나가기분이었다.

그대로 변기에 편지 조각들을 넣고 물을 내렸다.


쏴아아.


소용돌이에 휩쓸려 기억의 조각들은 어느새 사라졌다. 마음이 휑하면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니 작은 아이가 일어나  날 보고 있었다.

엄마 뭐해? 공놀이 가자.

내 짧았던 설렘은 그렇게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엄마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내게 이제 여자의 자리는 없는 거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방안 가득 낯선 남자의 향내가 진동을 한다. 마음과 현실이 따로 노는 뒤숭숭한 동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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