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지은 밥 내가 내린 커피 #1
“첫 드립에 몇 회 정도를 부으시나요?”
핸드드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지인이 물었다. “글쎄요 몇 회인지 생각을 못 해봤네요”
생각해 보니 커피를 내리면서 특별히 드립 횟수를 정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드립을 하는 횟수와 간격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심지어 온도도 감으로 느끼려 했다.
지인의 질문으로 처음 드립 커피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벌써 20년이 지난 이야기이다.
봄비가 내리던 이른 아침 도쿄 하네다 공항은 찬비로 인해서 무척이나 스산했다.
호텔로 바로 가려다가 조금 이른 것 같아서 일단 모노레일을 타고 하마마쓰 역에서 우에노역으로 이동을 했다.
봄비 치고는 제법 내렸다. 도쿄에서 비를 만나면 바로 우산을 사는 것이 좋다고 도쿄에서 오래 거주하신 외숙모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잠시 내리다 그칠 비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우산부터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쿄에 가장 흔한 24시간 편의점을 갔으면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은 우산만 외치고 있었다. 점점 판단까지 흐려지고 있었다.
매장이 열었다 싶어 보이면 우산을 찾아서 뛰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매장이 문을 열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한동안 지하철역 주변을 돌다가 따뜻한 느낌의 전구가 여러 개 켜진 커피점을 발견했다. 우산도 우산이지만 일단 비부터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출국하면서 시내 면세점에서 조금 가격이 있는 코트를 샀다. 설렘도 있었지만 뭐가 급하다고 비행기도 타기 전에 꺼내서 입었나 후회가 밀려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비싼 코트를 보면서 인생의 오점 한 가지를 더 만들었구나 싶었다.
기분 좋게 입은 코트는 봄비에 서서히 젖었고, 그 무게로 마음까지 무거웠다.
서른 살이 넘도록 커피보다는 콜라에 빠져있었다.
그렇지만 몸에서 나는 열과 어우러진 젖은 코트가 뿜어내는 연기에 가까운 김을 보면서 시원한 음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커피가 가장 맛있는 커피일까요?”라고 묻는다면 도쿄에서 봄비에 젖은 코트를 입고 마신 핸드 드립 커피 이야기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커피가 가장 맛이 있는지 물으면, 다양한 답변이 나올 것이다. 원산지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유명한 커피집을 말하거나 커피의 품종 또는 추출 방식까지 저마다 알고 있는 커피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그날의 커피는 인생에서 콜라보다 맛있는 존재가 이것이다를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도쿄에서 아니 내 인생에서 첫 커피를 내려주었던 사람은 바리스타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새벽을 겨우 넘긴 이른 아침이었지만 커피점은 정말 깨끗했고, 화이트 셔츠를 잘 다려 입고 그 위에 자주색 앞치마를 단아하게 코디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것을 눈앞에서 처음 보았던 날이다.
신기하기도 했고, 향이 얼마나 좋았는지, 주문 순서를 기다리기도 전에 수어에 가까운 손짓으로 "나도 그거 마실 겁니다"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는 눈웃음으로 기다리라는 답을 주었다.
핸드드립 커피, 그날의 향과 온기는 지금도 지울 수 없다.
맛있는 커피에 대한 상상은 남자라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군대로, 그것도 모자라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벌써 몇 시간째 인지도 모르게 포탄이 쏟아졌다. 젖은 흙이 날아 들어서 눈을 감고 뜨기도 힘들다. 새벽부터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로 이미 판초 우의도 기능을 상실했다.
비인지 땀인지도 모르는 습기가 냉기로 변하면서 체온을 떨어트렸다. 손가락이 서로 올라타려고 하는 바람에 소총을 쥐고 있기도 힘들었다.
정신이 혼미해서인지 멈춘 폭격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환청이 들렸다. 다행스럽게 비도 멈추고 전투복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했다.
“송 병장 괜찮나?” 선임하사의 입모양에서 겨우 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겨우 대답은 했지만, 귀가 하도 먹먹해서 음성 변조한 남성의 느린 목소리처럼 들렸다.
언제 맞았는지 모르는 돌 파편으로 이마 언저리에 흐르는 피가 흙과 범벅이 되어서 통증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이었다. 잠시 고막이 찢어진 것은 아닌가 혼잣말을 하면서 무사함에 감사를 했다.
“자 모두들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잠시 담배 한 대씩 피워도 좋다” 조금 지친 목소리로 소대장이었다.
담배 냄새라면 멀리서 바람을 타고 와도 짜증스럽고 싫었다. 하지만 생사를 오고 가는 순간이 불과 몇 분 전까지 있어서인지, 아니면 비와 흙 그리고 피 냄새 때문인지 한 모금 얻어서라도 피울까 생각을 했다.
"송 병장님 커피 한 모금 드릴 까요?" 나만큼 아니 그보다 더 커피 덕후인 정상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쟁터에서 커피라니?...
잠시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닌가 생각을 했다.
“정상병, 커피라고 했어?" 말을 꺼내는 속도보다 빠르게 목에 칼이 들어오듯 정상병의 수통이 내 입에 들어왔다.
피 냄새와 흙냄새를 통해서 다행스럽게 후각은 정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빠르게 들어오는 커피 향은 분명 손으로 내린 커피이었다.
"정상병 이거 핸드 드립 한 거야?" "아니 이런 커피는 어디서 난 거야?”라고 말하려는데 내 입을 틀어막았다. 어찌나 손이 빨랐는지 정상병이 적군이었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송 병장님 좋아하는 코스타리카입니다"
---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