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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Sep 03. 2020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내 엄마 아빠의 연애담만큼 진위를 의심케하는 실화를 들어본 적 없다

            나는 내 엄마 아빠의 연애담만큼 흥미진진하고 진위를 의심케하는 실화를 들어본 적 없다. 엄마는 2남 2녀 중 장녀, 그러니까 위로 두 명의 오빠를 두고 아래로 여동생을 하나 두고 있는데, 엄마의 아버지, 외할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에 외할머니는 엄마가 6세 되던 무렵 마루에 목을 매달고 자살하셨다. 집안 꼴은 엉망이었다. 엄마는 6살 때부터 집안 노동력으로 차출되어 엄마의 할머니께 구박을 받으며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며 식모처럼 지냈다. 디테일은 잊어버렸지만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지자 남매가 뿔뿔히 흩어져 남의 집에 양자, 양녀로 들어가고 엄마는 다른 집에서 실제로 식모살이를 하는 등 힘들게 살다가 결국 언니오빠가 보고 싶어 뛰쳐나온 이모 때문에 상봉을 하기도 했다나.


            엄마는 성적은 좋았지만 대학에는 당연히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울산 동구 현대고등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했다고 한다. 벌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집을 사고 간간이 음악감상실에 들를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아빠는 엄마가 자주 가는 음악감상실의 DJ였다 (그곳의 이름이 "호산나"였던 듯싶다). 171cm의 그렇게 크지는 않은 키에 수줍은 듯 단정한 생김새, 가느다란 테의 안경, 웃을 때면 유난히도 소년처럼 보이던 얼굴. 그럴 때만큼은 샤프한 턱선에도 불구하고 송하형 이라는 둥그런 이름이 어설픈 듯 나름 어울렸다. 첫 만남은 이런 식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친구에게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은 책을 다시 읽어보며 음악감상실에 앉아 있을 때 어슬렁거리던 아빠가 다가와서 물었다고 한다.


            "무슨 책 읽어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요."

            "사랑의 기술이라, 나도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잠시 다시 부스로 돌아가 음악을 틀던 아빠는 다시 돌아와서 데이트를 청했다고 한다.


           "배고프지 않아요? 밥 사줄게요, 같이 나가요."


            당시 엄마는 군대에 간 남친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지만... 아빠를 만나 고무신을 꺾어 신으셨다. 덕분에 두 분이 연애하는 동안 군대에 있던 전남친이 탈영해 찾아온 적도 있다나. 아빠와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후 조용히 돌아가셨다는데, 엄마는 사실 그 사람이 사귈 때 그렇게까지 좋은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그 전남친이 사귈 때 그렇게 헌신적이고 다정해서 그 사람이 떠난 빈자리가 못 견디게 시리지 않았더라면) 아빠가 우리의 아빠가 될 리도 없었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하기도 하셨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예쁘게 연애했다. 없는 돈을 아껴서 알뜰살뜰 옷은 만들어입고 시집에 편지와 낙서를 끄적여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엄마의 오빠, 외삼촌들과도 친해서 더블 데이트도 자주 나갔다고 한다. 앨범을 꺼내보면 그때의 사진이 가득하다.


이것은 두 사람이 애틋하던 시절 주고 받은 시집. 틀린 맞춤법을 찾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종종 아빠에게서 수상한 구석이 보일 때가 있었다. 한번은 밤중에 엄마와 아빠, 외삼촌과 그 친구들이 떼지어 오토바이를 끌고? (사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노닥거리며 걸어간 적이 있는데, 괜히 아니꼽게 본 여긴 경찰들이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무슨 깡패도 아니고 이 시간에 무얼 하는 거냐 캐묻는 소리에 엄마는 발끈해서 멀쩡하게 길 가던 시민한테 뭐 하는 짓이냐, 무슨 근거로 이러는 것이냐, 소속을 대라며 대거리하려 들었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사색이 된 아빠가 엄마를 뜯어말렸다고 한다. 엄마는 왜 이렇게까지 과민반응을 하나,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싶었지만 그 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또다시 시간이 지나 1994년이었던가 1995년. 두 사람이 연애한 지도 어느 덧 4-5년이나 흘렀을 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손수건 한 장만을 남기고 도망쳤다. 당신을 속인다는 죄책감을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로 시작하는, 17년 뒤 장갑 한 짝을 찾던 딸이 옷장 구석에서 발굴하고선 당황하게끔 만드는 짧지만 구구절절한 편지가 쓰인 손수건에는, 사실 그의 이름이 송하형이 아니라 "이현철"이라는 사실이 쓰여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군에서 탈영한 아빠는 (엄마 옆에는 왜 이렇게까지 탈영자들이 꼬이는 걸까?) 연고도 없는 울산으로 무작정 내려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DJ 일을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걱정되는 마음에 아버지에게 거듭 연락을 했고, (지질하게도 엄마에게 모르는 번호론가 전화가 와서 한참을 아무 말 없다가 끊을 때가 많았단다.) 전화기를 붙들고 추궁하고 캐물은 끝에 마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가 당장 마산으로 갈 테니 버스터미널에서 기다려요." 하고 대뜸 마산행 버스를 탔다. 아빠가 기다렸다가 만나주지 않는다면 허탕만 치는 셈이니 어쩔 수 없이 아빠는 그 자리에 나왔고, 엄마는 결국 선임들의 예쁨을 한껏 받으며 취사병으로 일하던 막내가 위쪽에서 뒤집어씌운 횡령죄 (그러니까 식료품 횡령이라든지 식재료비 횡령 같은 종류였던 듯하다)가 두려운 나머지 모르는 사람의 군복을 뒤집어쓰고 탈영한 후 그 이름으로 행세하게 된 아빠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그를 설득하고 격려한 끝에 광주에 있는 아빠의 본가로, 아빠가 청소년기 가출하며 뛰쳐나간 곳으로 데려갔다.


        데려간 곳에서 엄마의 시어머니 되는 나의 할머니는 엄마를 붙들고 현철이 옆에 있어달라 부탁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고, 곧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으며, 곧이어 1995년 5월 10일에 내 언니를 무사히 낳았고, 아빠와 결혼식을 치렀고, 아빠를 영창 보내고 홀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변명해두자면 아빠에게도 햄스터마냥 매번 어긋난 탈출을 감행하게 만든 구구절절한 가정사가 있음은 물론이다. 할머니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아 중학교도 중퇴하고 가출했다는데, 슬프지만 나는 자세히 들어본 적은 없고, 있었어도 까먹었다.) 그리고 나와 내 동생을 낳았다. 이것이 아빠를 쏙 빼닮은 내가 태어나게 된 구구절절한 이야기이다.






            그야 말로 90년대에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딱 좋았을까 싶은 코믹하고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 하지만 내가 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쓴 것은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극적인 만남 뒤로 너절하게 들러붙은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얼결에 결혼한 20대 중반의 두 사람은 영리했지만 학벌도, 이렇다할 경력도 없었다. IMF 사태가 닥쳐올 때 둘째인 나까지 낳은 아빠는 경제공황 속에서 친가의 돈을 끌어다 동네에 컴퓨터 가게를 차렸고, 금방 파산했다. 엄마는 아빠가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돈 받고 해야 할 일을 사람들에게 돈 안 받고 해준 탓에 그랬노라 이야기한 적 있지만 사실 그냥 아빠의 사업수완이 좋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아빠와, 엄마 아빠 모두의 이름에 걸린 막대한 빚, 그 사이 태어난 동생까지 세 자매를 짊어지고 사이가 여전히 좋지 않던 할머니댁에 얹혀 살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꽤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건 마당에 기르던 영리하고 커다란 백구 차돌이밖에 없는데. 아직 아장아장 걸어다니지도 못하던 동생과 차돌이를 보고서 뻑하면 울음을 터트리던 나, 맨날 휘휘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방과 방을 뛰어다니던 언니는 그런 그늘을 다행히도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내가 수능을 앞둔 어느 날, 엄마로부터 아빠가 사실 우리 세 자매와 엄마를 두고 바람을 피운 적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배신감에 한 해를 꼬박 허비해야 했다.


            아마도 2000년 즈음의 일이겠지. 이미 어떻게 손 대어야 할지 모르게 잘못해버린 관계를 떨치고 새로운 관계를 처음부터 시작해보고 싶었던 걸까. 상대 여성분은 아빠가 유부남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엄마가 전화를 걸자 직접 집앞까지 찾아온 그 분은 우리가 노는 것을 보다가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애들을 두고서 자신을 만날 수 있느냐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사과했다고 한다. 아빠는 그 다음부터는 결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의 생활을 견뎌내던 여름, 아빠가 월세 35만원을 내라는 독촉을 못 이기고 저수지 옆에 세워둔 차 안에서 쓰다 말아 구깃구깃한 유서를 차 안 쓰레기통에 던져두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할 때까지 그랬다. 내 기억 속에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좋은 부모이(었)고 좋은 분들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얼마나 낭만적인 배경 아래에서 태어났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들려줄 때면 누구나 우와, 감탄사를 터트리는 이 로맨스 뒤에는 이런 후일담이 있다고 말해버려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먹기 좋게 손질된 로맨스는 편리하지만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면 언젠가 직접 조리도 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사랑의 내장과 죽은 눈과 머리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간질간질 손을 잡고 싶은 마음과, 잠든 내 머리를 조심히 자신의 어깨로 기대도록 닿아오는 손길만으로 구성되지는 않는다. 달콤한 것도 좋지만 우리는 질척질척한 진창도 공평하게 걸어가야 하니까.


               엄마와 아빠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외도를 하다가 반성한 아빠가 밤마다 엄마를 안아올 때마다, 관계를 가질 때마다 엄마에게 그 행위가 얼마나 치욕스럽고 역겨웠는지도 함께 이야기하는 편이, 마찬가지로 공평할 것이다.


            사랑은 있다. 하지만 "그런" 로맨스는 없다. 적어도 열광하면서 예쁜 이야기로만 남겨둘 수 있는 로맨스는 없다. 이전의 애인보다 더 나은 사람도 있겠고 이전의 연애보다 더 나은 사랑의 형태도 있겠지만 적어도, 모두가 이미 알다시피, 조약돌처럼 반질반질 예쁘고 완벽하기만 한 사랑이야기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디어가 부추기는 형태의, 표백되어 깨끗한 면만 남은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인내와 타협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차라리 로맨스라는 것의 본질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과대포장되어있는 것인지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로맨스를 기대했다가 마주치는 수치와 포기와 체념과 절망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예쁜 사랑이야기에 비해, 우리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너무도 부족하니까.

            그리고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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