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 하나 빠진 채로 살아도 괜찮은 하루
팀홀튼 그랜드 오프닝에 가보다
팀홀튼이 1호점을 오픈하는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금비와 나는 몇 달 전 팀홀튼의 한국 진출 기사를 읽고 매장을 오픈하면 가 보기로 일찌감치 리스트에 올려놓았었다.
따뜻한 커피와 함께 가볍게 읽을 책을 챙겨 아침에 집을 나왔다. 오픈런을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 있게 도착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책을 훑으며 커피나 한 잔 하고 일어날 셈이었다. 지하철을 탈 생각에 들고 나온 작은 우산은 제법 굵게 떨어지는 빗줄기를 막아내기엔 부족해 보일 지경이었지만 뼛속까지 촉촉하게 적시는 겨울비는 추억과 상봉하러 가는 설렘을 막지 못했다.
열한 시 조금 넘어서 신논현역에 도착했다.
“이렇게 비도 오는데 매장이 지하철 출구 바로 앞에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안도하며 신논현역 출구를 나온 순간 보게 된 팀홀튼 앞에 몰려 있는 대기 인파.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구불구불하게 몇 겹으로 늘어선 줄. 인파 사이로 얼핏 보이는 매장 안도 도떼기시장처럼 북새통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상황판단도 내리기 전에 검정 옷을 입은 보안요원이 나타나 줄을 서지 못하게 막았다.
“저기 패딩 입은 분 보이죠?”
보안 요원은 줄의 맨 마지막에 서 있는 패딩입은 여자를 가리켰다.
“저분까지가 마지막 예약자예요. 오전 대기는 끝났어요."
"네에?"
"오후도 그때 돼 봐야 알 수 있어요.”
그럼 어떡해요,라는 비련의 주인공 같은 눈빛으로 보안 요원을 바라보았다.
“오후에도 안 되는 거예요?”
“네. 아마 그때 가봐야 손님을 더 받을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보안 요원이 대답했다.
“1층만 운영하나요?”
나는 보안 요원을 붙잡고 질척 거리기 시작했다.
“1층만 있어요.”
다행히 보안 요원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좌석은 몇 석인가요?”
눈으로 사람들의 수를 따지며 물었다. 이 많은 인파가 빠지려면 대충 어느 정도 걸릴까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50석 정도 돼요.”
보안 요원이 잠시 매장 안의 테이블을 세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손님은 시간제로 내보내나요?”
내가 물었다. 나는 지금 바쁜 보안 요원 붙잡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인가. 나의 질척거림에도 다행히 짧은 머리의 보안 요원은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건 아니에요. 대부분 테이크아웃 손님이에요. 오늘은 오픈 기념으로 선착순 200명에게 귀마개를 증정해서 더해요.”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귀마개엔 관심 없었다. 나는 그저 맛대가리라고는 있다고 할 수 없지만 더없는 다정함으로 볼일 보다 다리 아프면 잠시 쉬어가게 해 주었던 더블더블을 마시고 싶은 것뿐이었다. 다정함의 감사함을 추억하면서.
“오늘은 열 시에 오픈했으나 내일부터는 일곱 시 오픈이니 상황이 좀 나아질 거예요.”
캐나다 블랙 베어 같은 덩치에 순한 인상의 보안 요원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알았다고 말하며 인산인해의 난리통을 빠져나왔으나 멀리 가지 못했다.
도넛에 커피 한잔 할 생각에 아침도 거르고 나와 배고팠다. 우산을 쓰고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오픈한 식당이 있는지 기웃거리다 열한 시반 오픈이라고 적혀 있는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열한 시 이십일 분이었다. 골목을 돌아다니기엔 비도 오고 추웠다. 으슬으슬 떨어지는 겨울비는 사람을 서럽게 한다.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았다. 짧은 단발머리의 직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염치 불고하고 직원에게 물었다.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나요?”
직원이 얼른 다가와 문을 열어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네. 들어오세요! 반 오픈이니까 주문은 반부터 부탁드려요.”
친절한 직원을 오랜만에 만난다. 요즘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이런 상냥한 직원을 만나면 반갑다. 반가운 마음보다 더 드는 생각은 고마운 마음이다.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다니!
자리를 잡고 앉아 이제 좀 살 것 같은 나는 팀홀튼 앞에 북적이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냉철한 자기비판을 시작한다.
이런 걸 예상 못하다니.
내가 참 순진했구나.
아니지, 옛날 같으면 분명 예상했어.
어쩌다 이렇게 나사 하나 빠져버렸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둔해졌나.
한때는 머릿속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연쇄반응적으로 일어나는 생각들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정신이 똘망똘망해져 잠들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반쯤 광인 같은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어느 생각의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생각들도 아니었다. 메모지에 끄적여 두어도 충분한 자질구레한 생각들, 잊어버려도 그만인 하찮은 생각들이 달아날까 봐 붙잡아두려고 애쓰며 잠들지 못했다.
나는 그런 나를 원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잡고 있지 않으려 했다. 잊어버리면 잊은 대로 살고 싶었다. 그래야 좀 살 것 같았다.
막 잊어 봤더니, 막 기억하지 않아 봤더니 많은 걸 잊어버리고 많은 걸 놓쳤지만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하고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고 신경이 곤두서지 않아 편했다. 그랬더니 그랜드 오프닝을 하는 날 매장 앞이 인파로 북적이는 상황도 전혀 예상하지 못할 만큼 둔해졌다.
예상과는 한참 어긋났지만 예상대로 될 줄 알았던 나는 플랜 비 같은 건 준비하지 않았다. 금비와 점심특선 수육을 먹으며 당혹감과 난감함에 대해 토로했다.
“어쩌지?”라고 물으며 금비와 나는 “진짜 맛있는데!”라고 대답했다.
수육을 보쌈김치로 돌돌 말며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이유에 대해 복기했다.
“적어도 내가 7시 반쯤엔 씻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지. 화장실이 두 개 다 사용 중이었거든. 원래 아홉 시에 출발하려던 것이 늦어졌어. 제때 출발했다면 지금쯤 줄을 서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금비가 고개를 저었다.
“일찍 왔어도 못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사람들이 더 일찍 모여 있었던 거라면. 대기 마지막에 서있던 패딩 입은 사람과 우리 사이에 돌아간 사람들이 꽤 있었을 테니까.”
우리는 눈빛교환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지?”
“교보문고 갈까?”
“그럴까?”
“요 앞에서 버스 있어.”
금비가 스마트 폰의 맵으로 광화문으로 가는 경로를 체크했다. 우리에게 교보문고는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그러자. 교보문고 가자.”
그러다 다시 이성을 찾은 내가 말했다.
“그런데 여기도 교보문고 있어. 강남 교보문고. 거긴 어때?”
금비가 동의의 고개를 끄덕였다.
“가는 길에 팀홀튼 다시 가보자.”
팀홀튼 앞은 여전히 대기 인파로 북적였다. 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한 시간 전보단 사람이 덜 보였다.
“저기 뭐지? 줄 설 수 있나 봐.”
우리는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예약하시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흰 롱패딩을 입은 안내요원이 말했다. '매장이용'과 '포장' 중 '매장 예약'을 마치고 비 내리는 교차로를 가로질러 맞은편 교보문고로 향했다.
애초 계획한 것에서 한참 벗어난 덕분에 존재한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평생 갈 일은 없을 줄 알았던 강남 교보문고에 가봤다.
가장 먼저 넘쳐나는 신간들을 훑었다. 최근 몇 년 간의 자기 계발 트렌드는 중간이 없는 듯하다. '역행자'니 '마인드'니 '100일 아침 습관의 기적'이니 하는, ‘야, 너도 (잘 난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북돋우는 초능력자 권장 코칭. 아님 부동산과 주신 투자의 신이니 하는 '야, 너도 (초부자가) 될 수 있어'라고 달콤 쌉싸름한 희망을 뿌리는 전독자 부자되기 프로젝트. 어느 시대나 성공한 사람과 초부자들과 귀족과 왕족의 수는 상위 1%가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내가 그 상위 1%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에세이는 유유자적, 안빈낙도 같은 테마가 많이 보인다. 안 하련다, 일찌감치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란다, 하는 자포자기 자기만족의 삶. 후자에 가까운 나는 휴, 가슴을 쓸었다. 지독하게 열심히 바둥대며 사는 건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
현실과는 반대로 소설 속 세상에선 자영업 전성시대인듯하다. 편의점, 세탁소, 서점, 백화점 등 상점에서 벌어지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여기서라도 장사 잘되면 좋지.
자영업은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드는 업종이다. 그렇지만 꾸준한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는 곳.
사람이 그립지만, 좋은 사람이 곁에 없어 외롭지만 관계 맺는 것은 불편하고 두려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여기서라도 이렇게 관계를 맺는 상상을 펼친다. 이제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은 현실 판타지가 되었다.
청춘들의 이야기가 많이 보여서 좋았다. 청춘들이 책을 읽는다는 얘기니까. 작가들이 혼을 갈아 넣어 청춘들을 책 앞으로 꼬시고 있다는 중이니까. 그래, 젊은이들이 살아야지.
도서들을 훑으며 대기번호가 줄어드는 것을 체크했다. 두 시간쯤 되었을 때 팀홀튼에서 연락이 왔다. 수프와 웨지 감자와 푸틴이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즐겨마시던 더블더블과 시그니처 도넛팩을 한 팩 구입했다.
“옛날엔 일 달러쯤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도 현지에선 삼천 원도 안 한 대.”
“브루 커피는 확실히 가격을 내려야겠어. 밍밍한 맛을 커버할 만큼.”
“우린 커피에 진심인데 말이야.”
매장 밖엔 아직도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매장 안은 만석이었고 테이크아웃을 해가는 사람들로 매장 한 편에도 줄이 늘어져 있었다.
“팀홀튼과 프리미엄이라. 팀홀튼은 누구에게나 편하게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나무 같은 곳인데.”
“아낌없이 내어주는 메이플 트리처럼.”
“아무래도 콘셉트를 잘못 잡은 듯.”
“여긴 강남이니까. 대한민국의.”
“따뜻한 환대만큼은 지속되기를. 이곳 강남에서.”
우리는 시절 인연을 잃은 아쉬움을 옛 추억을 마시며 달랬다.
처음으로 해외 브랜드 국내 1호점 그랜드 오프닝 행사에 가봤다. 모르는 브랜드였으면 기사로나 한 번 읽고 말았을 것이다. 그저 오래전 헤어진 친구 얼굴 잠시 볼 요량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던 옛 친구는 어딘가 살짝 달라진듯했지만 얼굴 봐서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만나 미소 지었다. 멀리 돌아간 것 같아 보이지만 계획한 대로, 바라던 대로 해냈다. 비록 커피 맛이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예전 그 맛은 나지 않더라도 따끈따끈한 새 추억을 마셨다. 옛 추억이 떠난 자리에 신선한 추억이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