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본 적도 없는 미래의 나에 대한 친절이 가져다 줄 성취
허준이 교수가 전했던 “자신에게 친절하라”는 메시지. 최근 승진 서류를 준비하며 그 중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던 이야기다.
임용되고 나서부터 ‘에이, 열심히만하면 승진 하나 못하겠어?’라는 생각으로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지 않았다. 아니, 모른척 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그 덕분에 수많은 골칫거리 중 하나를 치워둘 수 있었고 대학원생들을 들들 볶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승진 심사를 앞두고 준비하는 과정은 살 떨리기 그지 없었다.
지난 4년간 SCIE 논문 10편, 그리고 그 중에 교신저자로 작성한 논문이 5편이 되어야 많은 승진 요건 중에 겨우 하나를 충족하게 된다. 4년에 10편이라는 숫자는 분야에 따라 어렵지 않을 수 있으나, 논문마다 알고리즘 디자인, 구현, 증명, 시뮬레이션, 실제 실험까지 거쳐야 좋은 논문을 낼 수 있는 우리 분야에는 쉽지 않은 목표이다.
게재 승인된 논문이 최종 출판까지 되는 시간을 고려하면 대학원생이 없던 1년차는 제외하고, 2, 3년차 두 해에 걸쳐 10편의 논문을 제출하고 그 중 하나도 리젝되면 안된다는 뜻이다. 물론 적당히 쉬운 논문을 던지듯 내고 적절히 리뷰 커멘트에 대응하면 출판까지 이어지는 비교적 만만한 저널들도 있지만,
그런 곳에는 내지 않고도 재임용과 승진을 해내겠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발목을 잡는 순간이다.
결국 이런저런 규정들을 적용하고 논문들을 긁어 모아서 여러 조건 중 하나는 간신히 충족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나에게 친절한 과거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그때 이만하면 됐지,하는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내 운명을 맡겼다면? 늦은 밤 논문을 쓰지 않았다면? 주말에도 꾸역꾸역 실험을 하지 않았다면?
물론, 승진 조건 중 하나를 충족했다 뿐이지 아직 넘어야할 산이 많다. 원하는 걸 한번에 손에 넣은 경험이 별로 없기에 이번 일도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진에 성공한다면, 아니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내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지금의 나에게 과한 친절을 베푼 것처럼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에게 또 다른 친절을 베풀어야겠다. 이 친절함을 유지한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