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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들어오길 기다리며 느낀 것들

물 들어오기 전에 준비해야할 것들

by 가방끈수공업자

방학이지만 너무 바쁩니다. 오히려 방학이 더 정신없는 것 같습니다. 학기 중에는 수업이라는 루틴이 있기 때문에 외부 미팅이나 출장은 되도록 잡지 않아 한 자리에서 바쁜 경우가 많습니다. 방학 중에는 미뤄두었던 외부 활동들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쁩니다. 주 2회 정도는 타 연구기관, 기업, 학회 관련 미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용 첫 해의 방학은 그래도 직접 알고리즘도 짜고 강의 자료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이전글 : 수의 방학) 이제는 그럴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연구년 가면 다시 해볼 수 있을까요?


그래도 방학이니 글을 하나 쓸 여유는 생긴 것 같습니다. 사실 제안서의 한 파트를 작업해서 보내야하는데, 그게 하기 싫어서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러 들어온 것 같기는 합니다...ㅎㅎ


제가 연구하는 로봇 분야가 요즘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한테까지 일이 넘치게 들어오는 것을 보면 낙수 효과라는 것이 이런거구나 생각합니다.


드디어 물이 차고 넘쳐서 저한테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타이밍이라는 것이 참 절묘한 것 같습니다. 지금 같은 시기가 제가 학생일 때 찾아왔다면? 또는 한 5년, 10년만 늦게 찾아왔다면? 요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학생일 때 찾아왔다면 저희 분야에 신규 진입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졸업 이후로 경쟁이 치열해졌을 것이고, 몇 년 후에 찾아왔다면 신진 연구자에서 중견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고달픔(=연구비 부족)이 있었을 것 입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는 많은 함의가 있습니다.

1. 물이 들어올만한 곳에 있어야 한다.

2. 물이 들어올 때 그 곳에 있어야 한다.

3. 헤엄이 아닌 항해를 위한 배가 필요하다.

4. 가볍고 튼튼한 노가 필요하다.

5. 노를 저을 체력(또는 인력)이 필요하다.


1번을 위해서는 좋은 분야를 보는 선구안이 필요합니다. 2번을 위해서는 타이밍을 잡을 수 있는, 흐름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3~5번을 위해서는 미리 노력해서 준비를 해둬야합니다. 대충이 아니라 철저히.


이것들이 갖춰지지 않으면 물이 들어와도 멀리 갈 수가 없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대략 15년 전부터 1번은 만족하면서 계속 한 분야에 있었고, 2022년 정도부터 냄새를 맡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배와 노를 만드는 준비를 말이죠. 시간과 체력이 되면 맨 땅에 물길도 조금씩 파두었습니다. 물이 차서 들어오면 아무리 나의 노가 있다고 하더라도 물결과 파도에 조금씩 휩쓸릴 수 있습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미리 물길을 파두면 항해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길을 판다는 비유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회가 될 때마다 밖에 나가서 나와 우리 연구실의 연구를 알려서 사람들의 기억 구석 한 켠에 조금이라도 지분을 만들려고 노력한 것입니다(=영업). 24년만 보면 평균적으로 한 달에 1.2회의 발표를 했습니다. 보통 30분에서 50분 사이의 발표를 하게 되는데 생각보다 준비 시간이 꽤 걸려서 많은 시간 투자를 한 셈이였습니다.


적극적인 영업은 성과로 돌아왔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다 들기는 어렵지만 발표 때마다 한번 이상의 컨택을 받게 되고 논의를 이어가서 좋은 결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연구자들이 착각하기 쉬운 것이 "나는 연구만 잘하면 다 알아줄 것이다"인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논문들 쓰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은 바쁘고 남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우수한 성과를 다양한 채널(학교/학과 웹사이트, 언론--학교, 연구소 등의 대외홍보팀 활용, 본인 연구실 웹사이트/유튜브 등)을 통해서 알려야합니다.


배와 노를 만들었으면 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물이 차있는 곳을 찾아가 배를 띄우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나의 원래 분야를 버리고 떠나라는 말은 아니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근처를 찾아보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진짜 고수는 직접 물을 대서 물을 채우고, 파도를 직접 만들기도 하더라구요.


저는 아직 그 정도 경지까지는 한참 남은 것 같습니다.


날이 많이 추운데 건강 조심하세요. 다음 글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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