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니터 속 숫자들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동료와의 대화는 어색한 침묵으로 끝났다.
마음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모든 원인을 나에게 돌리는 선언을 하고 말았다. 나를 문제의 근원으로 규정하는 판단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들의 잘못을 따지거나 복잡한 상황을 해석할 필요가 없어졌다. “나만 고치면 된다”는 생각은 겸손처럼 보이지만, 실은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손쉬운 방식이기도 했다.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쉽게 자신을 향해 화살을 돌리는 선택을 할 때가 있다. 관계가 어긋나면 나의 성격이나 능력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을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는 태도는 성장을 돕지 않는다. 행동의 반경을 좁히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린다. 이런 류의 자책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자신을 탓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자책은 통제감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문제라면 나만 바꾸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복잡한 변수들을 제거하고 상황을 단순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업무 결과는 개인의 역량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시스템, 타이밍, 자원의 배분이 함께 작용한다. 관계의 갈등 역시 어느 한 사람의 결함이라기보다 소통 방식의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존재 자체를 문제로 규정하면 실제 원인을 탐색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자기 비난이 아니라 관점의 이동이다. '나'라는 주어를 '현상'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삶에서 겪는 어려움은 존재의 결함이 아니라 아직 충분히 해석되지 않은 상태 때문일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도구, 낯선 조직의 방식, 맞지 않는 소통 리듬에서 비롯된 마찰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처벌이 아니라 관찰이라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난 대신 호기심으로 바라볼 때 구체적인 행동이 가능해진다.
자책은 자칫 성찰처럼 보이지만, 사고 과정을 생략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깊이 탐색하는 대신 “내 탓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상황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화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데서 시작되지 않는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부족함에 절망이란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 결핍은 채워가면 되는 대상이지, 숨겨야 할 결함이 아니니까.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 속에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마음의 무게는 훨씬 가벼워진다.
최근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넸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문제다"라는 말 뒤에는 어떤 두려움이 숨어 있었을까. 실패를 피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낮추지는 않았는가. 타인의 평가가 두려워 스스로를 먼저 벌주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 시선을 조금 거두어도 괜찮다. 대신 더 따뜻한 빛으로 내면을 비춰보자. 이해의 빛이 닿는 자리에는 자책이 머물기 어렵다. 성숙은 자신의 한계와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가장 적절한 리듬을 찾아가는 일이다. 이해되지 않은 상태를 밀어내지 않고 견디는 힘, 그 곁에 머무르며 의미를 발견하는 태도는 일종의 영양제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기반이 된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만이 타인에게도 진정한 지지를 건넬 수 있다. 삶의 주권 찾기는 비난의 망치를 내려놓으면 자연스레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제는 정말 우리의 잘못일까? 아니면 아직 충분히 들여다보지 못한 삶의 한 장면일 뿐일까?
질문의 방향이 바뀌면 삶의 풍경도 달라진다. 자책이라는 익숙한 감옥에서 나를 석방시켜야 한다. 그때 우리는 더 넓은 이해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나에게 가장 가혹했던 한마디는 무엇이었는가?'
이 문장을 조금 더 다정한 말로 바꾼다면, 어떤 표현이 가능할까.
지금 당신은 '문제'가 아니라 '아직 이해가 필요한 상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