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빙 Raving, 메켄지 워크 McKenzie Wark
회사 1층의 카페에 간신히 1/3을 읽어낸 책의 나머지를 읽으러 왔다. 어쩐지 이 책은 에어팟으로 노이즈 캔슬링을 이빠이 걸쳐놓고 테크노를 틀어놓지 않으면 문장 하나 진도 나가기도 쉽지가 않다. 유튜브에 berghain을 치면 나오는 몇몇 기가 막히는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다시 수행을 시작하려는 찰나, 단체 손님이 우르르 들어온다. 눈대중으로 봐도 10명은 넘는데 대가족은 아닌 것 같다. 슬그머니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취소하고 귀를 기울여보는데, 아 - 교회 공동체다. 마침 내가 펼친 페이지에 지나가는 단어는 ‘인러스트먼트’였고, 책 속의 문장을 하나라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나는 모든 개념어를 적당히 저속하게(?) 인지하기로 맘먹은 직후였기에 저기서 오고 가는 건강한 신앙의 삶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니 영 죄책감이 상당하다.
테크노 장르를 본격적으로 접한 건 2024년 9월 베를린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나서다. 레이브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기엔 요플레 뚜껑을 핥은 정도였지만, 아무튼 차원이 다른 있어보이즘에 취해버렸다는 표현이 맞겠다. 이후 HABO를 만나 테크노 문화 개론을 들었고, 그토록 혼란스러운 2024년 12월을 견뎌냈더니, 나는 일단 이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려보고 싶어졌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장벽의 붕괴, 평화와 연대, 혐오와 갈등의 봉합 - 물론 이 책을 다시 찬찬히 읽으면서 내가 내세웠던 대부분의 키워드가 아주 그럴싸하게 둘러진 포장지라는 걸 다시금 알았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소리가 뒤에서 나를 박는(p.79, 나는 아직도 이 책의 문장을 이루는 단어의 조합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기에 상당한 의지를 투여한다)’ 일종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서울의 유서 깊은 공공극장에 내던져보고 싶었다.
관객 스스로 비트에 스며들어 주체적으로 트랜스를 경험하는 것이 이번 기획의 한 끗이라 생각했기에, awareness 텍스트를 작업하는 것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드는 안전한 공간 ~ 차별과 혐오에 단호하게 ~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인종, 외모, 나이, 장애 등에 기반한 차별적 언행은 어떤 형태로든 용납되지 않습니다. 시선, 말투, 농담처럼 미묘한 불쾌감도 차별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록페스티벌 속 슬램 문화의 가치를 높게 산 어떤 블로거는 이 awareness 텍스트가 불편하여 결국 예매하지 않았다는 간증도 남겨주어서 일단 우리의 준비가 아주 서툴지는 않았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진행되는 극단적 수행에 가까웠던 공연의 중반부 즈음이 넘어가니 또 한 번 단체 관객들이 티켓부스를 찾는다. 퀴어니스를 포용하는 것에 매우 자연스러운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 내 나름의 노력으로 awareness의 단어 하나하나를 준비한 - 감정과는 제법 반대에 서있다. 여타 클럽의 게스트 리스트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공연장만의 초대권 명단 운영 방식에 무언가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고, 이 배상적 차별(p.39)의 누락을 해결하는 대응 과정에 딜레이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내가 그들을 통해 듣게 된 어떤 표현들이 상처를 준 것은 아니지만, 하염없이 톺아보게 만들었다. 가령, 혹여나 나도 모르는 사이 큰 공연장에 레이브 문화를 소개한다는 것에 스스로 압도되어 내 인지 범위 밖의 소수자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을까. 이미 커뮤니티성으로 정보성을 압도한 것만 같은 이 씬을 레이브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다수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만에 필요 이상으로 집중해 나도 모르는 주객전도를 행한 건 아니었을까. 이런 상념들.
책 속의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내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그 와중에 아직도 몇몇 문장은 수없이 되읽어도 명징해지는 지점이 없어 무력해졌다. 조금 더 직관적이거나 덜 학술적이어도 훑고 읽어내고 이해해 내는데 상당히 용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러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관계를 다루고 맺는 방식에서 내가 생각보다 많은 의지를 투여해서 이해해보아야 하는 갖은 '조건'들, 징벌자 - 동료 - 트랜스섹슈얼 - 트랜지션 - 시스젠더 게이 - 논바이너리 그리고 백인 중년 트랜스젠더, 뇌 속 어딘가 포스트잇에 붙여놓고 기필코 읽어내고 싶은 '상황'들을 생각한다.
지난 1월의 짧은 뉴욕 출장에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장면엔 홀푸드 마켓에서 신선한 야채를 사는 백인 여성과 계산대를 지키는 히스패닉 여성, 그리고 출입문을 지키는 흑인 남성이 있다. 뉴욕에 오랜 시간 거주한 지인은 드디어 너의 눈에 포착되었냐며, 이제 한민족국가 개념 타파 초급을 수료한 셈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물며 백인 중년 트랜스젠더로 정의하는 작가가 레이브 문화 속에서 자신을 어느 하나 안온한 포지션에 정립시키기 위해 읽어내고 써내고 놔버리고 다시 맞서내야 할 맥락의 층위는 얼마나 두껍고 뻑뻑했을까 싶다. 내가 보편적 평화와 연대의 상징으로 번역하고 싶었던 테크노가, 이 책을 통해 누군가에겐 처절한 생존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반추한다. 노이즈 캔슬링 사이로 찔끔 흘러나오는 플레이리스트 속 비트에서 더 이상 내 고개만 둠칫둠칫으로 두기엔 어딘가 중력장이 세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