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거 왜 이제 알았지.. 2

진작 저널로 쓸걸!

by 융원

우리 분야에는 학회를 더 쳐주는 경향이 좀 있다.


이게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까, 1년 가까이 걸리는 리뷰 기간을 거쳐 출판된 논문들은 이미 뒤처진 기술이 될 수 있어서 그렇다고들 한다. (그렇게 들었다.)


그래서 다른 분야 사람들은 학회 논문만 있다고 하면 조금 의아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모든 학회를 다 높게 쳐주는 건 아니고, CS/AI/ML 내의 유명한 학회들이 존재한다.


나도 초반에는 탑 티어 학회들을 노리면서 논문을 쓰고는 했었는데, 요즘은 저널 위주로 쓰기 시작했다.


학회 연구 트렌드의 속도를 못 따라간 것도 있고, 또 나는 뭔가 장황하게 쓰는 걸 좋아하는데 학회 페이지 수 제한이 보통 8페이지 정도다 보니 엄청 압축적으로 써야 한다. 이게 페이지 수가 적다고 덜 쓰면 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한 분석 및 실험의 양은 저널급인데 그걸 그냥 엄청 압축해서 담아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서사를 쓰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인트로와 관련 연구가 이미 반절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서 학회 포맷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또 학회 스타일에 적응을 잘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뭔가 리뷰어들의 스탠스가 기본적으로 “떨어뜨리겠다”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리뷰를 받으면 대부분 불만족스러운 점만 지적하지, 어떻게 개선하라는지는 잘 이야기해 주지 않아서 보통 상처만 받고 끝난다.


그래서 몇 번 시도 끝에 상처만 남아서 저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널들의 리뷰어들은 조금 스탠스가 달랐다. 리뷰들을 보면 계속 더 해 오라는 요구들을 한다. 그리고 실제로 더 했을 때 완성도가 계속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학회는 아무래도 논문 제출부터 최종 판결까지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리뷰어와 저자 간의 생산적인 의논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저널은 사실 시간이 무한정이니 그냥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계속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더 요구한다.


이게 만약 좀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면, 저널의 리뷰 과정에서 그게 탄로 날 수 있어서 오히려 불리한 선택일 수도 있다. 어쩌면 학회에서 리뷰를 한 큐에 잘 넘어가서 숨겼던 부분을 안 들키고 넘어가는 게 유리한 논문이라면, 그쪽으로 가는 게 더 전략적으로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 같은 경우에는 숨기는 부분도 있긴 했었는데, 제대로 지도를 받지 못하다 보니 누군가가 어떤 부분을 더 해 오라고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는 피드백이 큰 도움이 됐다.


그래서 외로운 연구자들에게는 저널 리뷰어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를 키워 나가는 것도 리뷰어를 활용하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요즘은 오히려 혼자 미리 고민하기보다는, 적당히 애매하게 써 둔 다음에 리뷰어들이 어떻게 하라고 지적해 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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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현대 AI/ML 연구의 위상은 탑 티어 학회들과 몇몇 저널들이 주류이긴 하다. 빅테크 연구직 요구 조건에 나와 있는 리스트들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나도 만약 쓸 수 있고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면 저기에 냈을 텐데, 나에게 더 필요했던 건 실질적으로 연구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과정이었어서, 뭔가 쥐 잡듯이 안 혼내는 저널들 중에서 Impact Factor가 높은 저널들 위주로 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제 나 스스로 어느 정도 완성된 연구자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고, 리뷰어들의 질타에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진다면, 나도 저 탑 티어 학회 경쟁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Photo by Iñaki del Olm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