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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정 사전

03. 침범당한 기분

지키고 싶은 게 있을 때

by 채채

ㅣ고마워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불편하지


타인의 도움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도와달라고 요청할 때도 있고, 상대가 내 상황을 보고 슬쩍 손을 내밀 때도 있다. 대부분의 손길은 고맙다. 하지만 가끔은 괜히 불편할 때가 있다.


꽃집에서 일할 때 인스타그램 문의는 우리 지점에서 전담하여 응대했다. 한 브랜드지만 지점이 여러 개 있었고, 각 지점마다 담당하는 채널이 따로 있었다. 일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서 소통이 꼬이는 걸 막기 위한 장치였다. 그날은 인스타그램으로 온 예약 문의를 5분 정도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른 지점 담당자가 전체 메신저방에서 '본인이 ~하게 답변했으니 이어서 상담해 달라'라고 요청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고맙지가 않았다. 그 사람도 자기 일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대신해준 것이고, 고객 입장에서도 더 빠른 답변을 받았으니 만족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내 마음은 불편했다. 이 불편함은 뭘까. 나는 상대가 내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조심해 달라고 말해야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에게 상처가 될 것 같아 그저 묻어뒀었다. 그 뒤로도 그분이 내 영역을 침범하는 일들이 왕왕 있었다. 그때마다 남편에게 구시렁댔지만, 퇴사가 머지않았기에 그냥 넘겼었다.


ㅣ침범당하려면 지키고 싶은 게 있어야 한다

퇴사 후에도 가끔 그 일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언제나 '그때 얘기했어야 했는데'로 끝났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일을 덜어주었고, 업무를 이어갈 수 있게 따로 노티까지 해준 것 아닌가.


그럼 왜 불편했던 걸까? 사실 나는 업무에 있어서 바운더리가 명확하고 책임감이 강한 타입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핸들링하는 걸 좋아한다. 내게 적절한 속도로, 내가 원하는 수준을 목표로, 내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은 욕구가 세다. 그런데 제삼자가 그 흐름에 들어와 영향을 주니, 나도 모르게 '침범'이란 단어가 떠올랐던 거다.

항상 '그분이' 나를 침범했다고 여겼지, '나라서' 침범당했다고 느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 나 자신에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그분을 미워할 필요도 없이 내게 주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침범당했다는 기분이 들면 한 번 살펴보길 바란다. 침범한 사람 말고, 침범당했다고 느끼는 본인을. 무엇이 침범당한 건지 들여다봐라. 그게 당신이 지키고 싶은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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