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지

존엄에 대하여

by 채채

"너는 너를 존엄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남편의 말이 충격적이진 않았다. 나도 최근에 느끼던 바였으니까. 꽃집을 그만두고 나서 오만가지 생각들이 나를 덮쳤다.


- 겨우 1년밖에 못 다니다니

- 심지어 퇴직금 기한 4일 남기고 나왔어

- 이런 것도 못 버티는데 어떻게 성공하지

- 가정 주부로만 생활하고 싶진 않은데 어쩌지

- 나는 왜 잘못된 선택만 할까


오빠가 밥을 차려주면 집에 있는 '백수면서 직장인인 오빠가 해주는 밥을 먹는다니'라고 생각했고, 밖에서 밥을 사먹으면 평소보다 훨씬 집밥을 자주 먹어도 죄책감이 몰려왔다. 늦게 일어나면 늦게 일어나는대로 게으른 내가 싫고, 일찍 일어나면 하릴없이 멍 하니 있으니 괴로웠다.


나는 나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맛있게 먹고, 편하게 살고, 즐겁게 놀고, 잘 자는 내 모습을 증오했다. 지금 쉬어가고 있다고 해서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고, 잘 자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그동안 했던 모든 선택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지금 멈춰있다고 해서 앞으로 계속 멈춰있으려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억지로 집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빨리 뛰고 속이 메스꺼운 날도 있었다. 그래도 나갔다. 햇빛을 쬐고 바람을 느꼈다. 처음 가보는 카페들을 찾아 다니고 거기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셨다. 가끔은 케이크도 먹었다. 매일 아침 나에게 사랑한다고, 괜찮다고 말했다. 아침엔 이부자리 정리를 했다. 기운이 좀 나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영어 회화 공부를 30분이라도 했다. 매일 해낸 일들을 아주 작은 것부터 기록했다. 지역에서 하는 걷기 동아리도 참여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땀 범벅이 되게 걸었다.


그랬더니 생각이 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 그래도 이만하면 하루 잘 보냈다

- 오랜만에 만 보나 걸었네

- 일기장에 창틀 닦았다고 써야겠다

- 게임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지만 뭐 어때, 평생 게임도 안하고 살았는데

- 빨래랑 청소를 내가 다 하니까 오빠도 편할거야

- 나는 그냥 좀 지쳤을 뿐이야

-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지금 멈춰있더라도 또 열심히 살 수 있을거야


여전히 앞날이 두렵다. 앞으로 나를 계속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존엄성을 해치진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분 좋고, 즐겁고, 하루를 잘 보내려는 나를 욕보이지 않는다. 내가 나를 혐오해서 좀 먹는 일은 그만 하고 싶다. 삶은 늘 일보다 크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좋아하는 일을 하면 행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