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 궁금해할 글 - 1
가끔, 아니 아주 종종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곤 한다. 특별한 계기나 촉매제 없이도 밀려드는 공상을 참을 수 없어 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중이다. 굳이 구체적이지 않아도 좋다. 무엇이라도 잡히는 대로 단어를 떠올리고 이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동글동글한 모습을 하고 데구루루 굴러 들어온다. 매번 동글한 생각들만 굴러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짜증 나게도 뾰족한 생각들이 억지로 굴러들어 와 머릿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애인과 내일 뭘 먹으면 좋을까 생각하고, 오늘 해결해야 할 집안일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 것일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을 해본다. 미래에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를 걱정하고,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하고 싶은 모든 것에 대해 상상한다. 특기란에 무엇인가를 적어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나는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불필요하게 진지한 생각들을 하는 것이 내 특기라고 적어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고 나를 긍정하게 된 것은 최근에서의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쓸데없이 생각만 많은 나'라고 나를 이야기하며 불필요한 고민을 하고, 생각하느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이 밀려오는 상황들이 참 싫었다. 생각이란 것이 하면 하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지라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생각은 불가항력적으로 나를 그 세계 안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붙잡아 두는 일종의 천사이자 악마 같은 존재였다.
그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강렬한 힘으로 나에게 밀려오는가 하면은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하는 시급한 일이 있거나, 내가 평소에 즐길 시간이 모자라 안달이 나는 취미생활에 한창 빠져있을 때에도 그 모든 것들을 손에서 놓고 공상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할 정도이다. 과장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정말 나의 일상을 지켜보다 보면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다가도 갑자기 모든 것을 그만두고 공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눈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생각을 하기 싫을 때에도 꾸역꾸역 그것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내가 꽤나 불편하고 싫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생각은 걱정이 되고 걱정은 우울을 낳았다.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지독하게 남겨 왔던 우울은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게 했다. 분명하게도 그때의 생각들은 그리 긍정적인 내용들은 아니었다. 무슨 한스러운 삶을 살았던지 그리도 비통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많이 제자리로 돌아온 지금 돌이켜보기엔 그저 조금 억울하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해왔는 듯한데, 제 궤도에서 벗어나 있던 나의 생각 속의 삶은 조선의 한을 그대로 눌러 담은 그런 아픔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생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다 어떤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내가 평소에 즐겨보던 과학과 철학을 다루는 유튜브였다. 영상 속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그 생각 속에서 살게 된다.' 당시의 나에게 이것만큼이나 중요한 말이 또 있을까. 나는 생각 속에 갇힌 사람이었다.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이 나를 지배해 존재 그 자체를 생각 안에 가두어 놓았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생각에게 모든 주도권을 내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생각의 성을 때려 부수고 내가 직접 다시 지어 놓는 것만이 내가 구원받는 길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현재를 사는 삶 같은 건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왔던 나였다. 그렇기에 생각하느라 행복하지 않은 나를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생각의 범위를 최대한 현실과 가까이로 끌고 오려했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먼 과거를 반추하는 것보다, 아직 닥쳐오지 않은 먼 미래를 불안해 하기보다, 당장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저녁 메뉴를 생각하고, 내 눈앞에 들어와 있는 책과 지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모든 것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은 아주 인상적인 선택이었다.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매우 닮아 있었고, 특히나 철학에 대해 탐구할 때에는 신선한 고찰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끙끙거리는 와중에 내게 할당된 생각의 양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공부를 재미있어하는 성격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 자체에 흥미로운 고통이 있기 때문에 운명이 나에게 맡겨 놓은 고통 또한 우습게 소화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고로 존재하고 있다. 생각이 삶이 된다면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말도 된다. 현재를 고찰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추억을 회상한다. 생각의 틀이 바뀌자 나를 대하는 나의 태도도 바뀌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될 수 없다면 그냥 내가 되면 된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