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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두 codu Apr 07. 2020

비밀은 의심을 낳는다

영화 <비밀은 없다> 리뷰

우리는 가족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분명 피를 나눴고 한집에 사는데 확실히 대답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엄마, 아빠, 자식, 형제에 대해 알고 있는 바는 남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타인인 친구나 직장 동료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요구되는 딱 그 정도만 나를 드러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족이라는 집합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것이 '비밀'이다. 서로 드러내고,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거짓말이 필요하다. 거짓말은 비밀을 지키는 경비병과 같아서 거짓말 없이 비밀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에 따라 비밀과 거짓말은 필연적으로 의심을 낳는다.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은 없다> (2015)


경상북도의 국회의원에 출마한 종찬(김주혁)의 선거 유세 첫 번째 날. 종찬의 아내 연홍(손예진)은 유세를 위해 새벽부터 김밥을 만든다. 이들의 딸인 중학생 민진(신지훈)이는 친구 자혜와 미술 숙제를 하느라 늦는다고 연홍에게 얘기하고 집을 나선다. 그리고 민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 민진은 주검으로 발견된다. 민진을 죽인 범인을 밝히기 위해 연홍은 학교와 경찰을 찾아가고, 민진이의 방을 뒤지며 그의 흔적을 좇는다. 연홍은 살해 용의자로 민진이의 시계를 차고 있는 미옥(김소희)이를 의심한다. 



본문에는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짓말의 유효기간


민진이의 비밀은 한두 개가 아니었고, 아이는 천사처럼 착한 아이도 아니었다. '자혜'는 연홍을 모티프로 한 가짜 친구였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고, 시험지를 빼돌려 성적을 유지했다. 거짓말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비밀을 덮은 거짓말이 쌓일수록 유효기간은 짧아지며 의심을 낳는 순간 끝난다. 민진이의 경우 의문스러운 죽음이 비밀의 끝이었던 것이다. 


엄마인 연홍은 민진이의 죽음을 끝까지 파헤친다. 딸의 밑바닥에서 한 조각의 진실을 건지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분노와 증오 그리고 후회와 죄책감을 마주하지만, 자신의 밑바닥에서 발견한 것은 민진에 대한 사랑이다. 


연홍은 최미옥을 범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미옥을 범인으로 몰고 갈 만한 정황만 보여주며 실제 범인에게서 거리를 둔다. 죽은 민진이의 사진이 찍혀있는 핸드폰과 피 칠갑을 한 채 돌아다녔다는 증언 그리고 피 묻은 차까지 모든 증거는 미옥이가 민진이를 죽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 말미에 연홍은 끝내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민진이와 미옥이는 친구, 그 이상의 관계였다. 민진이와 미옥이는 비슷한 머리 모양을 했고, 같은 노래를 좋아했고, 작사와 작곡을 맡아 노래를 만들었다. 


"야들 노래는 바로 제 이야기거든요."


민진이와 미옥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지만, '지니와 오기'에게는 팬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에게 비웃음당했지만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했다. 그 노래에 공감한 아이들은 민진이의 머리 모양을 따라 했고, 자신의 이야기 같은 노래에 열광했다. 


노래에는 사건에 대한 모든 진실이 담겨 있었다. 민진이와 미옥이 사이에는 거짓이 없었다. 두 아이의 관계는 진실했으나 그들을 보호해줄 거짓말은 필요했다. 결국 그들의 비밀과 거짓말은 미옥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원인이 된다. 


 

역동적인 여성들


영화 <비밀은 없다>는 이경미 감독의 전작 <미쓰 홍당무>이후 8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 영화로 그의 영화 세계에 있어 중요한 작품이다. 리듬감 있는 편집과 연출, 독특한 사운드와 음악 그리고 파괴적이라 할 만한 캐릭터와 시나리오는 모두 '이경미'라는 장르를 만들어 낸다. 분명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릴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 작품을 보고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고백> 혹은 <갈증>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경미 감독의 여성 캐릭터는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과 확연히 다르다. 각각의 여성 캐릭터들은 방대한 에너지로 극을 이끈다. 


민진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 자신이 떠난 학교에 왕따의 처지로 남겨질 미옥을 걱정했고, 아빠의 불륜을 눈치채지 못하는 연홍을 지키고자 했다. 연홍은 민진을 위해 움직였다. 딸을 죽인 범인을 밝히고, 복수하기 위해 움직였다. 미옥이 역시 민진이의 복수를 위해 움직였다. 


방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였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여성캐릭터들과 (레즈비언 요소를 포함한)그들의 끈끈한 관계는 기존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점이다.   



가부장제 질서의 파멸


전라도 출신인 연홍은 국회의원으로 출마하고자 하는 종찬을 따라 연고가 없는 경상도로 왔다. 중학생인 민진이에게 '색기'를 운운하고, 연홍에게 웃음을 강요하는 선거 캠프의 남성들과 전라도 지역 비하 단어가 되어 버린 지 오래인 '홍어' 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시민 속에서 연홍이 기댈 곳은 없다. 민진이의 실종을 조사하는 형사들은 종찬의 선거 상대인 노재순의 전단을 뒷좌석에 모셔두고 민진의 실종 전단은 컵라면 받침으로 쓰고 있다. 


연홍은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며,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칠 수밖에 없다. 


성공한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종찬의 욕망은 당연하다. 하지만 민진이 실종된 와중에도 종찬에게 중요한 것은 딸이 아닌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이미지뿐이다. 민진의 죽음으로 오히려 시민의 동정을 받으며 선거에서 승리한 종찬은 과연 가족을 지탱하는 가장이라 할 수 있을까? 종찬은 가부장의 밑바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연홍은 그런 종찬을 처벌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엄마는 딸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후반부의 뒤섞인 타임라인은 일견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그 연출로 연홍의 혼란과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속마음이 와 닿게 된다. 연홍과 종찬과 민진이 일구었던 가정은 순식간에 파괴된다.


 



엄마는 딸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딸의 친구는 누구인지, 성적은 어떤지 그리고 엄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홍은 이 모든 것을 민진이가 죽고 난 후에야 알게 된다. 자신의 딸과 똑 닮은, 딸의 사랑하는 친구를 통해서 말이다. 


연홍  "우리 딸이 지 엄마는 좋대디?" 

미옥  "멍청하다고 했어요. 엄마는 멍청하다고...그래서 지가 지켜줘야 된다 그랬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했지만,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나는 먹먹해졌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수직적이지 않다. 엄마와 딸은 평행선을 그린다. 딸은 조금 뒤에서 엄마의 궤적을 따라가지만 겹쳐지지는 않는다. 뒤에서 따라가기 때문일까, 딸은 언제나 엄마를 구원하고자 한다. 


딸은 엄마를 지키려 했고, 엄마 역시 딸을 지키고자 한다. 딸의 죽음은 아빠의 외도에 기인하지만, 엄마는 딸의 생각만큼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엄마를 지키고 싶은 딸의 마음은 비단 민진이만의 마음이 아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족은 어쩌면 가장 진실해지기 어려운 사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기에 항상 궁금하고, 알고 싶지만 소중하기에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다. 가족 사이에 비밀은 있다. 그렇지만 수많은 의심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찾아줄 존재 또한 가족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6768

#ArtInsight #문화는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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