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