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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ug 16. 2024

<똑똑똑>, 찾아온 사도들과 포스트모던 예수 그리스도

신이 아닌 "인간"의 대속과 갈등이라는 보편적 내러티브

 니코스 카잔자키스는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걸작 소설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 덕분에 카톨릭과 그리스 교회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지루하긴 하지만 책을 한번 읽어보거나 영화를 보길 추천한다. 참고로 영화도 지루하다. 그러나, 그 속에 그려진 예수가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카톨릭이 화를 낸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예수는 여호와의 자식이 아닌, 신과 인간의 삶 사이에서 번민하는 약하디 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막달라 마리아와의 만남 속에서 그는 사그라들지 않는 운명적 사랑의 불길을 느끼고,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와 인간의 삶을 택하여, 아내와 자식을 얻는 모습까지 그려진다. 


 모두가 로마 문명의 자손인 유럽 문명권에서 성경의 메타포를 찾아내는 것은 너무나 쉬운, 그러므로 게으르기도 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보편적이다. 또 본질적이다. 누구나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는 초월을 꿈꾸지만 정말 신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일을 감내할 수 있을까? 과연 신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어떨까? 노아의 방주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를 보며 신의 분노를 살 만큼의 타락상에 대해서 마치 남일- 처럼 우리는 이야기하지만 과연. 지금의 이 세상은 신의 분노를 하지 않을만큼의 도덕성을 갖추고 있을까? 이 말을 몇글자 쓰는 사이에도 째깍째깍, 나는 탄소를 태워 공기를 덥히고 있다. 파멸을 향해. 다시 말을 해보자. 성경 속의 메타포는 보편적이며 본질적이다. 인간의 죄와 속죄 역시, 보편적이며 본질적이다.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에서 이제 충격적 반전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똑똑똑>에서도 그러한데, 반전을 기대하며 볼 영화는 전혀 아니다. 내러티브는 평탄하다. 마치 피사의 사탑에서 아래로 떨군 철구처럼, 직진해 땅에 착륙하는 시금털털한 이야기구조의 영화다. 그런데 소재가, 만만하지 않다. 극 속의 긴장은 그로 인해 꽤나 탄력있게 관객을 끌어당겼다. 덕분에 미국에서 박스오피스 성적이 괜찮았다. 사회적으로 괜찮은 지위를 갖고 있는 동성 부부가 태어나면서부터 구순구개열, 그러니까..."언청이"라는 옛 말로도 불렸던 장애를 갖고 태어난, 지금은 수술로 치유가 되었으나 흔적이 남은 동양계의 어여쁜 딸을 입양해 살다가, 숲 속 오두막에 휴가를 왔는데 뜻밖의 이방인들의 침입을 받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이방인들과의 만남이 신선하다. 끔찍한 흉기들을 소지한 세상 선량한 보통사람들이라니. 그들은 오두막의 창문과 문을 부수고 들어오더니 동성 부부와 그 수양딸 셋을 의자에 구속한 상태에서 아주 절박하게 말한다. 그들 셋 중 한 사람이 제물이 되지 않으면, 세상이 곧 파멸할 것이라고. 그 뻔뻔한 개소리의 근거는 너무나 생생한 꿈들과, 그 꿈과 일치하는 현실의 현상들이었다. 


 주연 데이브 바티스타를 비롯, 사랑스러운 웬링과 선량하기만 한 동성부부. 그리고 남은 세 침입자들. 인물들의 구도는 클리셰적인데 캐릭터가 신선하고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사뭇 흥미롭다. 그래서 저예산으로 오두막에서만 흘러가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슉슉 잘도 지나간다. 막 나가는 소재를 겁도 없이 잘 꺼내드는 샤말란 감독의 장기가 이번 영화에서 잘 먹였다. 서로가 선량한 사람들끼리 전 세계의 운명과 개인의 희생을 두고 갈등을 하니, 아니, 신박한 개소리를 세상 진지하게 하니 눈을 떼기 어렵다. 극은 스릴러에서 추리극으로 흐르는듯하다가, 샤말란 감독 답게 반전의 낌새를 뿌리다가 마치 <해프닝>처럼 어찌보면 싱거운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그 신박한 개소리가 정말로 사실이었고, 두 부부와 딸 사이에서 결국 인류 모두를 위해 한 사람이 선택된다. 그로 인해, 세상은 구원받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클리셰적으로, 길을 떠난다. 


 이야기로선 흥미롭지만, 그래서 소설로 읽는다면 괜찮은 작품일 테지만. 한정된 시간 동안에 연출과 인상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는 영화로선 결말에서 관객을 설득하기 쉽지 않다. 영화의 결말 직전까지 인물들의 갈등은 열띤 대화와 논쟁으로 전개된다. 신선한 소재와 충격적 장면들이 버무려져 전반부에서의 긴장이 잘 유지된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최후의 선택에선 정작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는 결정이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끌어내지지 못한다. 반전을 품은 것처럼 전개되던 이야기가 "그런 거 없었다"라면서 갑자기 갈등이 종결되어버리니, 스릴 뒤에 이어질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던 관객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김이 빠질 일. 


 그러나 스릴러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대속이라는 주제를 통해 영화를 바라본다면 영화는 나름의 뚜렷한 특색을 보인다. 어떤 점에서 이 영화는 포스트모던한 양식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처럼 느껴진다. 인류 전체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했던 한 사람의 치열한 내면의 갈등을 긴장감과 함께 선사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동성부부 엔드루와 에릭은 결혼은 했지만 세상의 차별과 편견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인 건 여전하다. 호모포비아에게 혐오 폭력을 당하고 에릭은 이를 갈고 복싱과 사격 연습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순수한 영혼을 지켜내오며 서로를 깊이 사랑해왔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보기 흉한 장애와, 그것을 고치고 나서도 흉터가 남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 소중한 우리 가족을, 누가 나타나 위협한다고? 참지 못한다. 에릭은 엔드루 몰래 총을 소지하고 다녔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세상과, 침입자와 맞서 싸운다. 


 대속의 주인공이 되는 엔드루는 영혼을, 에릭은 그에 맞선 이성과 과학을 상징하는데 결말에 이르기까진 누가 봐도 주동인물인 에릭이 부각될 수 밖에 없는 구조이지만 생각을 해보자. 예수는 폭력에 대해 무엇이라 말했던가. 복싱과 총,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해결 방식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 엔드루와 에릭에게 있어 둘의 만남과 사랑은 그들이 만난 딸 웬링의 구순구개열처럼 단지 태어나며 갖게 된 특성의 하나일 뿐이고, 수술 뒤의 흔적처럼 "성흔"일 뿐이다. 하늘이 내린 운명 그대로를 끌어안는다는 점에 있어서 폭력이라는 해결방식은 옳지 못하다. 영화 속 침입자들은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고, 유일하게 오로지 엔드루만이 어떤 폭력도 타인에게 행사하지 않은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대속의 자격이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예수 한 사람의 내면의 갈등과 신이 내린 운명을 영화 속에선 세 가족에게 분담하고 있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는, 개소리라고 외치며 이들의 말을 외면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앤드루의 대속은 사도들의 희생과 멸망해가는 세계를 목격하며 이루어진다. (초반에 그는 뇌진탕으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데 이는 복선으로, 첫번째 사도가 희생되는 장면 직전에 노골적으로 빛을 통한 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연출이 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지금 이 세계가 과연 고통이 넘치는 곳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쓰나미, 지진과 화염, 질병과 전쟁, 재해로부터 벗어나 있는 우리에겐 "이 멋진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글쎄, 제발 누구라도 이 부조리한 세상을 좀, 뒤엎어달라고 말하고 싶지 않을까. 누군가 한 사람의 영혼을 희생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이 세상이 누군가에겐 지독하게 불친절하고 부조리하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가 유럽인들의 인식을 지배한 지난 200년간 세상은 마음껏 분열되고 착취되어 왔다. 그 여러 부작용들을 우리는 축복과 함께 공유한다. 그러나 시대는 21세기. 포스트 모던. 숨겨진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밝은 빛 아래 조명되고 하나 하나의 삶은 내러티브를 갖는다. 예수라는 신의 아들이 아닌 한 인간의 삶을 그렸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처럼, 평범한 한 인간이 대속을 행하며 예수와 같은 길을 걸었던 이 영화에서, 우리는 신과 인간이 다르지 않음을. 우리 모두가 보편적 그리고 특수성을 갖춘,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엔드루의 입을 빌려 스스로 말한다. 어쩌면 세상은 그런 희생으로 유지되어 왔을지 모른다고. 


 그렇다면 고통을 감당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며, 이 세상을 유지한 사람들. 목소리를 잃은 모든 자들. 노예선의 흑인 노예들. 동성애란 이름으로 죽은 모두들. 소수자라, 여성이라, 빈곤층이라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질서로 인해 희생되고, 그를 통해 이 세상의 지속에 기여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실로, 찬양해야할 존재 아닐까. 그리하여 신의 네 사도는 세상의 끝, 한 오두막 앞에 선다. 그들이 섬길 메시아를 위해. 세상을 위해 대속을 시행할 신을 뵙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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