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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과 실재

by 꽃피네

"푸어박! 빨리 돌아가야 해" 라비를 비롯한 유령들이 일제히 말했다. "왜? 돌아가야 하는데?" 유령들과 싸돌아다니는 재미에 맛을 들인 내가 물었다.

"담당 주치의 선생님이 회진 돌고 있어. 곧 너네 방 들어가려고 해. 네 육체는 움직이지 않고 하루 종일 밤낮 잠만 퍼자면 어떡해?"

마르코가 이제 헤어질 시간이라고 무엇이 불만인지 얼굴을 씰룩거렸다. 아마도 라비 이야기를 더 듣지 못하게 되어 서운한 듯했다.

"아하 그 젊은 김대엽 선생님? 2 신경외과 그분? 그럼 라비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들어야겠다. 고마웠어. 유령들아" 나는 유령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눴다.

유령들은 훌쩍 날아올라 만대산에 있는 유령의 계단을 통해 플루토의 지하세계로 들어갔다. 멀리서 그르렁 하며 유령의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승과 저승 사이의 스틱스강을 건너 플루토 세상의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유령들이 인간 세상에서 보고 온 온갖 추한 것들을 묻을 것이다.

유령들과 급히 작별을 한 나는 병실로 급히 돌아와 축 늘어져 잠에 빠져 있는 육체에 스며들었다.

"아이고 허리 아파서 더 이상 잠을 못 자겠네" 나는 이리저리 뒤척이다 허리가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 겨우 일어나 휠체어에 앉았다.

"도대체 몇 시간 동안 잠을 퍼잔 거야? 이렇게 무의미하게 잠만 퍼질러 자고… 한심한 내 인생! 참 허무하구나" 걷잡을 수 없는 우울증이 몰려왔다.

침상 접이식 식탁 위에 싸늘히 식은 잡곡밥 하나, 조개를 넣은 미역국에, 계란 프라이, 조그만 매일우유 하나, 김치, 건토란 나물에 코다리 명태조림이 식은 채로 부스스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을 털어 넣고 우유를 들이켰다. 식판을 병실 간이 설거지통에 가져다 놓고 돌아와, 물수건을 두 개 준비해 와 누워서 대충이나마 몸을 닦았다.

머리감기는 하루에 한 번 또는 이틀에 한 번 하는 데, 혼자서 감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한가한 낮 시간에 샤워실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로 감았다.

아침 7시 40분, 주치의 김대엽 선생이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오늘은 좀 어떠신가요? 정신과 협진 후, 추가된 항우울증 약과 신경안정제, 수면제 잘 듣던가요?"

나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이 의사 선생님은 늘 7시 40에서 50분 사이에 아침 회진을 돌고, 점심 식사 후 12시 40분에서 50분 사이에 또 회진을 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처럼 말이다. 병원에서 성실히 모범을 보이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엄수하려고 노력하는 정신을 가진 부지런한 자만이 할 수 있다.

교통사고 이전의 건강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이 젊은 주치의는 의사대로 할 일이 있고, 환자인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같은 목표로 뭉친 김대엽 선생과 나는 한 팀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팀의 일원으로서는 밤낮으로 주사를 놓고, 약을 분배하고, 의사와 입원 환자와의 연락병 역할을 하는 병동 간호사들과, 영양을 책임지는 조리사들과 배식 담당하는 아주머니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모두 우리 팀이다. 또한 물리치료실의 치료사들과 원무과와 총무과 직원들이 모두 한 팀이었던 사실을 나는 가끔 간과하고 있었다.

오늘은 5월 1일, 근로자의날로 병원 진료도 오전만 한다. 회진이 끝나자, 나는 휠체어를 타고 전등남과 욕쟁이 대목수가 입원한 906호, 옆방에 가 보았다.

전등남은 척추 압박골절로 플라스틱으로 된 단단한 보조기를 차고 있었고, 대목수 또한 목을 고정하는 보조기인 필라델피아 칼라를 착용하고 있었다.

딸기와 이고녀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딸기는 "머라도 좀 드릴까요?" 하며 냉장고 문을 열려고 하였다. 이에 이고녀가 벌떡 일어나 "언니, 제가 할게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침을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별 생각이 없다고 극구 사양하였다.

40살 불혹에 든 이고녀와 47살의 딸기는 보호자용의 좁디좁고 낮은 보조침대에서 자면서도 어린아이처럼 항상 팔팔하고 생기가 넘쳤다.

"아저씨 아~ 이~ 해봐요" 이고녀가 자신이 먼저 아 하고 입을 벌린 다음, 가지런한 윗니와 아랫니를 모아 이 해 보였다.

나는 무심결에 이고녀를 따라서 아 하고 이~를 했다. 그 순간 이고녀가 자신의 폰으로 찰칵하고 스냅사진을 찍었다.

"아저씨! 외계인 아저씨! 이거 봐요!" 이고녀는 나에게 자신이 폰으로 찍은 스냅사진을 보여주며 킥킥대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편들을 병상에 뉘고 나서도 무엇이 그렇게도 즐거운 지 이고녀를 따라 딸기도 호호 하며 크게 웃었다.

그 사진 속의 나는 봉숭아학당의 맹구처럼, 2002년 폐암으로 타계한 코미디언 이주일처럼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하고 앞니 두 개 중 오른쪽 앞니가 반쯤 깨져 우스꽝스러운 이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으이구 어른 놀려 먹으니까 그렇게도 좋으셔?" 하고 전등남이 이고녀를 질책하자, 대목수도 민망했던 지 "참 우리 마눌님 딸기 나이 헛 묵었네. 머가 그렇게도 즐거우신가?"라고 하며 딸기에게 쏘아붙였다.

이고녀가 전등남에게 폰을 보여주자, 전등남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 대면서, 옆 침상의 대목수에게 "형님 이 사진 좀 보십시오" 하는 것이 아닌가.

사진을 본 욕쟁이 대목수도 전등남을 따라 낄낄 대었다. 다들 어린아이들처럼 왁자지껄 웃음보를 터트렸다.

"유성 사인펜으로 깨진 앞니를 칠해 드리면 더 재미있겠어요" 하고 딸기가 말하자 악의 없는 희롱이 최고조에 달했다.

"좀 조용히 하세요. 다른 방의 환자들 생각도 해 주셔야죠" 하고 포니테일 말총머리를 아이보리 머리끈으로 질끈 묶은 젊은 간호사가 와 제지하였다. 아무튼 익살꾼 이고녀의 장난에 한참을 웃었다.

"어제저녁에 주무실 때 이상한 잠꼬대를 하시던데요 우리 우진이하고 똑희하고 사귀게 된다는 거예요? 아니면 둘이 결혼하게 된다는 거예요?"라고 이고녀 태희가 물었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우진이하고 똑희 하고 사귄다니, 결혼하게 된다니요?"라고 영문을 모르는 내가 반문하였다.

"어젯밤 8시경에 제가 꼬깔콘 과자를 드리려고 905호실에 갔는데 아저씨가 주무시면서 둘이 사귀며 곧 결혼한다고 잠꼬대를 하셨어요"라고 이고녀가 설명하였다.

이에 딸기가 "우리 똑희는 24살이고 우진이는 겨우 17살 고등학생 아인데 둘이 어울리기나 하나요?"라고 내게 그럴 리가 없다는 듯이 따졌다.

"어허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대도요. 그리고 설령 그런 말을 했다 손 치더라도 사랑에 국경이 어디 있고 나이차이가 별 대수라고 이리 나를 몰아붙입니까" 했더니 이를 듣고 있던 똑희 아버지인 대목수가 쌍수를 들어 희망하였다.

"우리야 손해 볼 건 없지요! 우진이가 박삼식 아니 꽃피네님 말처럼 우리 똑희를 사랑하고 결혼을 원한다면 난 찬성이오!"라고 하면서 자기 처인 딸기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하였다.

"제 생각도 우리 똑희가 우진이를 택한다면 하늘이 정해 준 연분이라고 생각해요. 결혼 못 시킬 법도 없지요" 하고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어 찬성을 하는 것이 아닌가.

똑희는 소문난 껌씹녀, 껌 좀 씹는다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파과기 때, 일진 오빠와 첫 경험을 하고, 대학교 들어가서는 같은 과 남학생과 사귀었고, 그 남자친구가 군대 가자, 다른 사회인과 사귀다가 남자에게 차였던 사연 많고 자유분방한 날라리였다.

똑희와 똑순이의 발랑 까진 과거를 아는 엄마 딸기는 껌씹녀 딸들을 처분하고자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공주의 늦둥이 아들 우진이와 자신의 첫째 딸, 별명이 똑희인 희영의 연분에 대하여 꼬치꼬치 물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내 몸에 귀신이 사는 모양이오! 잠잘 때, 가끔 헛소리를 해 대는 것이 죽을 날이 머지않았나 싶네요"

"외계 행성에서 오신 이상한 아저씨 말씀은 예지력이 있어서 꼭 그렇게 된단 말이에요. 오빠! 우진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엄마에게만 살짝 말씀드려야 할까 봐요"

"연분은 막을 수 없는 것이니 두고 보는 것이 좋겠어. 난 훼방은 놓고 싶지 않아. 하늘이 정한 혼사를 인간인 내가 언감생신 훼방 놓을 수는 없잖아" 천재 전등남이 자신의 뜻을 밝히자, 딸기네와 이고녀네는 서로 간에 새로운 유대감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할머니도 위로해 드리고, 엄마 아빠도 챙겨드리고, 애들도 볼겸 오늘 오전에 서울 집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오늘 밤과 내일 밤에 오빠 혼자 있을 수 있지? 물론 앵두가 와 있겠지만" 이고녀가 전등남에게 자신은 서울 집에 가고 앵두가 오늘 오니 그 여우에게 홀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 내가 어린아인가" 못 미더워하는 이고녀의 말에 전등남이 그녀를 안심을 시켰다. 딸기도 한마디 했다.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나도 필요한 거 있으면 챙겨 드릴게. 토요일 날 올 때 우진이 한 번 데려와 봐. 얼굴 자세히 한 번 봐 보게. 조선대병원에서는 잠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

"그럴게 언니. 아이! 궁금해 죽겠네! 외계 행성 아저씨 잠꼬대가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어요"라고 이고녀는 딸기의 귓전에 속삭였다. "언니 내일모레 토요일, 언니네 딸 희영이도 병문안 오라고 하세요"

"그건 걱정 마. 어젯밤에 희영이와 순영이 둘 다 이번 주말에 온다고 통화했어"

"그럼 언니네와 우리는 이제부터 찐찐사돈이 되겠네"

"그럼 그럼!"

딸기와 이고녀의 맞장구에 대목수가 "으이구 떡 줄 사람 생각지도 않은데, 김칫국부터 마시다니 남 부끄럽게"라고 하자, 전등남도 "경사 났네! 경사 났어!"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이고녀가 서울로 떠나고, 오후에 전등남의 간병을 하기 위해서 서구형 육체파, 늘씬한 앵두가 병실에 들어섰다.

38살의 앵두는 타이트한 검정 스키니 진에 캐주얼한 녹색 레귤러핏 티셔츠를 걸쳐 긴 다리를 더 길게 보이게 하였다. 앵두는 터질 것 같은 완숙미에 산틋함마저 겹쳐 보였다. 앵두는 가지고 온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병실 칸막이 커튼을 쳤다.

"오빠!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아니. 병원에 있으면서 마음을 정리하니 홀가분해져서 그래"

"무슨 마음의 정리를 했는데?"

"내 나이가 벌써 마흔셋, 모두를 위해서 최대한 조용히 살고 싶어. 이제부터는 정육점 부모님 일도 도와드리고 너랑 태희랑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런데 태희는 널 집안에 만큼은 절대로 들이지 않겠다 하니 가슴이 꽉 얹힌 것처럼 답답하고, 참말로 다정도 병인가 보다"

"오빠, 태희 언니랑 내 문제는 우리 여자들에게 맡겨 둬. 우린 지금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이야. 내가 오늘 오빠 간호하러 여기 온 것 보면 몰라. 태희언니가 어제 내게 부탁해서 한달음에 달려온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만"

"하하 염려 붙들어 매시라니깐. 나와 태희 언니에게는 지호하고 샛별이가 있잖아. 지호하고 샛별이는 언니와 나, 오빠, 우리 셋의 공동 작품으로 탄생한 아이거든" 앵두는 활짝 웃으며 서글서글한 어조로 전등남을 안심시켰다.

“채앵인 가끔 남자처럼 하하 하고 웃더라”

"호호 우리 천재 오빠! 젖 좀 줄까? 안 먹는다고? 그럼 다시 넣는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며 채앵은 브래지어에서 꺼낸 오른쪽의 빵빵한, 조그만 앵두알이 달린 젖가슴을, 혀를 내밀고 메롱하며 전등남을 놀리면서 도로 집어넣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전등남이 급히 그녀의 가슴과 왕엉덩이를 만지려고 했지만, 앵두는 어느새 트레이닝팬츠에 스판덱스 티셔츠를 걸친 뒤였다.

앵두는 칸막이 커튼을 열고 공용 남자 샤워실에서 돌아온 딸기와 대목수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딸기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 지 싱글벙글하면서 "앵두도 이제 우리 하고 찐찐사돈이네"라고 뚱딴지같은 대답을 하였다.

욕쟁이 대목수도 "천재는 머가 달라도 우리랑은 달라. 이렇게 쭉쭉빵빵 늘씬한 앵두씨와 귀염둥이 태희씨, 두 명의 마눌님 품속에서 잠들 수 있다니!"라고 부럽다는 듯이 말하자,

"오빠! 내건 천년에나 한 번 접할 수 있는 명기에 천연기념물이라며? 내 것이 좋다며 다른 여자들은 젖비린내 날 거라고 했어? 안 했어?"라고 하며 딸기가 욕쟁이 남편을 몰아붙였다.

오후 5시, 저녁식사를 실은 카트가 왔다. 메이데이라고 해서 낮에는 찰밥이 나왔는데 오늘 저녁으로는 흰 밥에 육개장, 생선가스 및 소스, 꽈리 마늘 멸치조림, 오이 부추 겉절이, 배추김치가 담긴 트레이가 병상에 딸린 접이식 식탁에 배달되었다.

후다닥 저녁을 해치운 다음, 13알이나 되는 저녁약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약에 취했는지, 나는 그대로 잠에 떨어졌다.


"푸어박! 오늘 밤은 앵두가 와서 병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네. 딸기네도 활기차 보이고. 앵두네는 왜 저렇게 바쁜 거야!" 마르코가 신이 난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앵두도 왔겠다, 2명의 새로운 등장인물들의 기막힌 이야기도 섞어찌개로 해 줄게" 라비가 딸기네와 공주네 이야기 외에도 환자 2명의 비밀이야기를 섞어서 해 주겠다고 멍석을 깔았다.

다들 눈망울을 반짝이며 라비의 이야기를 경청하였다.

"해남까지 오면서 도중에 보고 들은 어떤 모지리 이야기야. 어때 들을 겨? 이건 좀 충격적이어서 야설책으로 내면 잘 팔릴 거야"

"먼데먼데 난 찬성!" "나도!" 유령들의 이구동성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비교적 최근 거야. 어느 바닷가의 아름다운 고장에, 모지리들이 살고 있었지. 인간성이 최악인 개똥이 부자 이야기야."

일단은 한껏 분위기를 잡은 라비가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펼쳤다. 이에 모두들 기대감에 숨을 죽였다.


개똥이 아버지는 술만 처먹으면 개똥이 엄마를 복날에 개 패듯이 사정없이 패곤 하였다. 둘 사이에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영리하고 번듯한 첫째 아들을, 군에 입대하여 제대할 무렵, 사고사로 잃었다. 그만 큰아들이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 후, 그 일대에서 소문난 천하의 개망나니인 개똥 아버지는 어디서 젊은 여자를 데려와 본처를 첩살이를 시켰다.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근래의 일이었다.

당시 개똥 엄마는 낮에는 횟집 식당을 하고 밤에는 젊은 여자하고 한 집에서 동거하게 되었다.

개똥이 엄마는 웬일인지 젊은 여자를 "동생 동생"하면서 여간 살갗게 대했다.

때로는 한방에서 셋이서 자야 해야 했고, 아침상도 차려야 했고, 장사해서 번 돈도 그년 놈들이 다 챙겨갔다.

시골 면단위 어촌이라 다들 가게문을 일찍 닫았다. 남편과 동거녀는 횟집 식당 문 닫기 전에, 저녁 8시쯤에 와서 카운터 금고털이를 해갔다.

남편이 개똥 엄마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 것은 군에 간 큰 아들이 죽고 난 후, 횟집을 시작한 그다음부터였다. 특히 매상이 적은 날이면 어김없이 돈을 어디로 빼 돌렸냐고 두들겨 팼다.

큰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를 앞두고 사고사로 죽었으니 개똥 아버지도, 개똥 엄마도 그 슬픔과 상심이 오죽 컸으랴마는 남편은 폭력으로 풀고, 아내는 맞으면서 맺힌 응어리를 풀었다.

남은 둘째 개똥이는 돈만 없애는 얼간이고 그래서 개똥이 아버지는 아들 하나를 더 낳으려고 젊은 “나가요!” 족속인 유흥업소녀를 집으로 들였다. 이때부터 폐경기에 막 들어선 개똥 엄마는 본처였지만 첩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바닷가 쪽 사람들은 육지 쪽보다 거칠었다. 외국에서 어린 처자들이 시집오면 얼빠진 남자들은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기억나? 떠들썩하게 뉴스에 나왔던 사건? 외딴 섬놈들이 여선생님을 돌림빵 강간해서 선생님의 젊은 인생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인간도 아닌 개잡놈들 말이야.

돈이라면 환장해서 바닷놈들에게 다리를 벌려주는 일부 외국 여자들도 문제였다. 실제로 10명의 동남아 여자가 시집와서, 한두 명만 시골에 와서 똑바로 살면 다행인 것이었고 나머지는 돈을 가지고 튀어버리기 일쑤였다.

개똥 아버지는 처음에는 동남아 여자들을 건드리다가, 튀기 말고 찐 단군의 자손, 아들을 낳고 싶어서 오리지널 국산 티켓다방녀인지 룸살롱 출신녀인지를 집안으로 들이게 된 것이었다.

개똥 엄마, 횟집 식당 사장녀는 40대 후반에 나이는 들었지만 엉덩이 하나는 무지막지하게 컸다. 그녀는 타고난 큰 엉덩이를 헐렁한 치마 속에 감추고 있었다.

반면 개똥 아버지 것은 청양고추여서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개똥 엄마의 보름달 같은 빅사이즈 엉덩이는 별 감흥을 못 느낀 것은 사실이었다.

개똥 엄마가 식당에 나가면, 손님들이 기회를 봐서 어떻게든 한번 해보려고 수작 부리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매상은 쭉쭉 올라갔다. 개똥이 아버지도 아내가 어떤 방식으로 매상을 올리는지 잘 알고 있기에 아내의 영업 방식에는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일단 이슬이 카스 소맥하고 문어 두어 마리 큰 거 데치고, 전어 좀 썰어주고요. 누님은 이리 좀 앉아봐요"

"세 분이 너무 많이 시키시는 건 아니에요? 주방 언니도 불러 같이 먹을까요?"

"이게 많긴 머가 많아요. 주방 누님도 오시라고 해요. 자자 매상 한번 올려 봅시다. 요렇게 해서 요렇게 퐁당!"

퐁당! 하고 소주 글라스에 쏙 들어간 것은 맥주였다. 개똥이 엄마는 손님들 중 한 사람이 특별 제조한 폭탄주를 조금 받아 마셨다. 개똥엄마 횟집 사장님은 영업상 식당 안에서는 거기까지만 허락하였다.

남편과 동거녀가 가게를 털어가면, 그다음부터는 자유였다. 개똥엄마는 폐경기에 들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주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시들어가는 젊음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장사에는 최선을 다했다. 집에서는 첩 아닌 첩으로 전락했지만, 최소한 횟집에서는 누님 또는 사장님으로 통했다.

집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와 인격적 대우가 좋아서 예뻐 보이도록 노력을 했었고, 장사하는 데에 힘을 쓴 결과 가게는 날로 번창해 갔다.


개똥 엄마가 10년을 그렇게 가게와 첩살이 등 투잡을 뛰는 가운데, 어느 해부터인가 개똥이 아버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고엽제 후유증 때문이었다.

1970년 백마부대 제9보병사단 이등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개똥이 아버지는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인한 다이옥신 중독으로 폐암에 걸렸다.

개똥이 아버지는 결국 2020년에 광주보훈병원에서 71세에 유명을 달리하였다.

젊은 첩을 임신시키지도 못한 채 말이다. 젊은 여자는 원래부터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아들 하나를 원했던 이 부부를 잘도 속여 온 것이다.

어디선가 "딸이면 어때? 염렵하지 못한 아들이면 어때?" 하는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주파의 노랫소리가 개똥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졌다. 개똥엄마 62세 때의 일이었다.

"지겨운 놈 잘 뒈졌다 퉷!" 마르코가 분을 참지 못하고 내질렀다.

"그 큰 엉덩이로 남편 단속을 해야지 이 아줌마가 여자망신 다 시키네. 본처가 첩살이를 다하냐?"

"아냐 큰 엉덩이가 무슨 죄가 있어? 다방녀에게 꽂혀 돈 갖다 바치며 발광한 수컷이 문제지. 안 그래?"

"시골이나 되니깐 50 넘어서도 여자로 보이는 거지. 여자 자체가 없잖아.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이면 아마도 선녀로 보였을걸. 그래서 장사가 대박 난 걸 거야"

"어떻게 본처를 첩살이를 시키고 또 남편의 폭력이 무서워 첩살이를 당하냐?"

하고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청취한 소감들이 분분하게 쏟아졌다.

라비 샤르마가 파그리 터번을 매만지며,

"남편이 악한 놈이지, 그놈이 아내를 일부러 첩살이 종년으로 만든 게지.

첫째 아들보다 못하더라도 둘째를 훌륭히 키웠어야지, 아들 하나 낳자고 다방 년한테 푹 빠져서 다 갔다 바친 게야.

결국 다방 첩년은 야반도주했잖아. 자기는 일찍 뒈지고. 그런 놈은 일찍 죽어도 싼 거야"라고 정의했다.

"그놈 죽어서 우리 플루토에 온 거야? 왔으면 군기부터 잡자!"

"그런 놈은 무간지옥행이지. 우리 유령들의 세상 플루토가 무슨 뉘 집 애 이름이야!"

이야기는 이렇게 권선징악으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끝난 거야?"

"아니 술고래가 된 둘째 아들 개똥이하고, 다른 사내하고 버젓이 바람피우는 개똥 아내가 또 하나의 가관이었지. 이런 야설은 늘 후속 편이 있는 법이야"라고 잠깐 이야기를 끊고 라비가 숨을 돌렸다.

"수술한 데는 요즘 어때 푸어박?"

마르코가 통기타 바디를 톡톡 두드리면서 나를 보고 물었다.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르코가 특유의 유쾌한 어조로 한마디 툭 던졌다.

"말도 마. 죽을 맛이야. 진통제를 달고 산다니까"

"창문 자리 환자하고는 잘 지내고 있는 거야?" 하고 제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 그 뇌전증인가 간질인가 하는 환자? 자기 엄마를 잡는다니까. 개똥이 같은 녀석이야!"

"듣고 싶다. 말해 봐"

"그래 어서!"

아이샤와 파티마 시디크 자매가 나를 졸랐다.

"난 인간의 몸에 들어있어. 인간의 영혼은 타인의 험담을 할 수 없어. 명예훼손죄로 육체가 걸리거든. 그러니 라비 이야기를 듣자"

내가 완곡히 거부하자, 하는 수 없이 라비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는 속담과 똑 닮은 스토리이다. 개똥이는 결혼을 했는데, 고추가 영 시원치가 않았다. 그래서 죽은 시아버지가 집안에 젊은 여자를 들였 듯이, 이번에는 며느리가 첩녀에게 물들기 시작했다.

"엥 이거 실화임?" 아이샤와 파티마가 눈이 동그레져서 라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라비는 "원 쓸데없는 의심들은"라고 하며 혀를 찼다.

"이번에는 개똥이 마누라가 동네 사내하고 눈이 맞았어. 시아버지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아프기 시작하자, 개똥이 아내는 대놓고 동네 사내하고 바람을 피기 시작한 거야"라고 라비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라비가 깡마른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원을 그리자, 토실토실한 개똥이 아내가 알몸으로 사내를 뭉개고 올라타 힘차게 떡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개똥 아내는 자기 또래의 첩녀에게 완전히 물들었는데,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집안 꼴이었다.

남편이 죽자, 명품 엉덩이를 가진 개똥 엄마는 신이 났다. 그녀의 엉덩이는 무척 바빠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똥이가 자기 엄마를 뭇 사내들로부터 지키겠다고 나섰다. 개똥이의 진짜 목적은 아버지에게 배운 그대로 금고털이를 해 가기 위해서였다.

개똥이는 어머니가 장사해서 번 돈을 가지고, 딴 술집에 가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여자들을 끼고 하룻밤에 수백만 원씩 써버리고, 무엇이든지 비싼 걸로 흥청망청 여기저기에 돈을 물 쓰듯이 써댔다. 개똥이는 자기 아버지 판박이처럼 행동하였다.

"어느 날 밤 개똥이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두 다리 대퇴부 경부골절 수술하는 큰 사고를 냈어. 그래서 개똥엄마는 횟집을 팔고 아들의 병간호를 하게 된 거야"

"바람난 개똥아내는 개똥이 하고 이혼한 거야?"

"아니 그들 부부에게는 자식들이 아들 둘, 막내딸 하나가 있었는데 막내가 18세가 되면 이혼하기로 했대"

"개똥아내 진짜 나쁜 여자네"

"에잉 좋고 나쁘고는 한쪽 말만 들어보면 안 되는 거야.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이에 라비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한 후, 모두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치 '너희들은 그녀만 나쁘다고 생각해?' 이런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기주장이 명확한 제니가 자기 생각을 밝혔다.

"난 그녀가 정당했다고 봐. 시아버지는 그 지랄하지, 남편도 직업도 없이 날마다 빈둥빈둥 처놀지, 술 처먹지, 바람 피지, 거기에 코라도 골아 봐! 그런 남자랑 어떻게 한 방에서 지내냐?"

"그럼 이혼부터 하고 딴 사내랑 그 짓 해야지 안 그래?라고 아이샤가 제니의 말에 반박하였다..

"어디 육정 조절이 마음대로 되니? 남편은 징그럽지, 게다가 고추도 말라비틀어졌지, 동네 사내는 찝쩍대지, 순간 욱하고 연애 한 번 한 거지" 제니가 맞받아서 아이샤의 말에 재반박하였다.

마르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자기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사내가 들이대는데 남 주기는 아깝고, 그래서 그냥 넙죽 주워 먹은 거야"

파티마도 아이샤 눈치를 살피며, 이번에는 마르코 편을 들었다.

"이혼하려면 숙려기간도 거쳐야지 시간이 필요한데, 그새를 못 참는 그녀의 입장도 이해는 가네"라고 하자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아들 둘에, 딸이 있는 유부녀가 그건 너무 나간 거 같다"는 아이샤의 말에 이제껏 듣고만 있던 라비가 구획정리에 들어갔다.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지. 우리는 개똥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개똥이 하고는 사랑의 유통기한이 지났을 거야.

개똥이는 이름 그대로 개똥이었거든. 손들어봐! 냄새나는 똥 하고 같이, 살 붙이며 살 사람! 아니 유령!

아무튼 아들 둘은 개똥엄마인 할머니가 키우게 되었고, 딸은 바람난 엄마 따라 동네 옆집으로 갔는데 딸은 지금도 엄마 편이래.

엄마가 딴 남자랑 집에서 노닥거리는 것도 다 이해한다는 거야. 놀랍지 않냐?"

이어 라비는 최초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설파했다. 개똥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도유망한 큰아들이 죽었으면 작은 아들인 개똥이를 잘 보살펴야 했었다.

씨받이는 구실이었고 젊은 다방녀와 살고 싶었던 개똥 아버지의 황당무계한 계획에 평화로웠던 가정이 파괴되었다. 이를 개똥이의 엄마가 묵인하고 첩살이를 자원했던 것이 아닌가. 여기서부터 3대에 걸친 비극이 시작되었다. 아마존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올라 그 나비효과로 텍사스의 토네이도가 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혼자서 아들 개똥이의 병시중을 해줘야 하고, 거기다가 손자 둘을 키워야 하는 늙은 개똥엄마가 앞으로 겪어야 할 삶의 고초이다.

그다음 풀어야 할 문제는 술 처먹고 전봇대를 들이받아 몸이 부서진 천하의 모지리 개똥이와 시댁 옆에 버젓이 집을 얻어 다른 사내랑 붙어먹는 개똥아내가 겪어야 할 민생고이다.

마지막 문제는 머리도 별로 좋지도 않은데 할머니가 학비를 대서 전문대를 졸업했으면 됐지, 군대도 미루고 이제는 4년제 대학을 간다고 저 난리를 치는 개똥이의 첫째 아들, 큰 손자가 이 세상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개똥엄마는 횟집 판 돈도 아들과 손자들, 손 벌리는 며느리에게 다 들어가 버려서 이제는 남은 돈도 없었다.

그녀에게 수입이라곤 개똥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 국가유공자인 까닭에 월 160만 원이 나오고, 개똥이는 장애인에 생활보호대상자로 월 80만 원 정도를 수령하여 둘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살고 있었다.

생활보호대상자는 약값에, 먹고 자고 다해도 병원비가 20만 원 정도니 병원이 가성비 있는 집이 돼버렸다.

개똥 아버지 한 사람의 비행이 가족 모두의 행복을 파괴했다는 라비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끝났다.

"그나저나 푸어박 스트레스 되게 받겠다"라고 라비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라비 그 말이 무슨 말이야?" 마르코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되묻자,

"응 푸어박이 새로 병원을 옮겨서 적응하기까지 좀 걱정이 된다는 뜻이야. 별 큰 뜻은 없어"라고 라비가 말했다.

"이야 이 병원 끝내준다. 이렇게 힐링되는 병원 정원에서 파티를 시작해 볼거나"

언제나 흥겨운 마르코가 통기타를 꺼내 집시 리듬을 연주하였다. 기타의 빠른 집시 리듬이 색온도 5,000K 자연광에 가까운 흰색 LED 정원등을 어루만졌다. 음악에 취한 정원등이 파르르 떨렸다.

"역시 재즈는 떠돌이 집시 기타 음악이 맛깔나지. 다음 곡은 좀 빠른 플라멩코로 돌려주겠어. 제니 준비됐어?"

마르코의 재촉에 제니는 가슴이 깊게 파인 정열적인 붉은색 원피스 주름치마의 모습으로 뱅그르르 돌아섰다.

양쪽 손목에는 금색으로 반짝이는 팔찌가 찰랑거렸으며, 다리는 사파테아도-징이 박힌 검은색 플라멩코 부츠를 신고 있는 제니는 정열의 화신 같았다.

주름치마의 끝을 흰색으로 포인트를 준 다음, 제니는 손을 높이 들어 짝! 짝! 손뼉 리듬을 기타에 맞추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검은색 사파테아도 부츠가 병원 정원의 보도블록을 힘차게 쿵쾅거렸다.

제니는 그라나다의 플라멩코를 연상하게 하는 격렬한 플라멩코를 추었다. 그러자 라비와 시디크 자매는 환자들의 빠른 쾌유를 비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플라멩코는 노래가 중요하고 그 뒤를 악기와 춤이 따라간다. 유령들의 플라멩코는 노래, 춤, 기타가 공평히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의 흥을 북돋았다.

제니의 흥겨운 춤사위는 나무들마저 춤추게 하였다. 벗나무, 적송나무, 측백나무, 야자종려, 꽝꽝나무에 이어 어마무지하게 큰, 높이 5-6미터의 늙은 대롱나무들도 신이 나서 탭댄스를 추기 시작하였다.

가끔 몇 명의 환자들이 나와서, 다소 차가운 밤공기를 즐겼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지, 맘대로 지껄이며 담배를 빨아대고는 급히 병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니의 양손이 주름치마 끝단을 움켜쥐고 엉덩이를 톡톡 튀기며 탭댄스를 추기시작하자, 마르코는 기타 바디를 쳐 호응하였고, 나 또한 리드미컬한 짝짝! 손뼉을 쳤다. 라비와 시디크 자매의 노랫소리도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파티가 끝나자 다시 만나자는 인사와 함께 유령들은 큼직한 바위가 포개져 있는 시커먼 만대산을 향해 날아갔다. 나도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병실로 돌아왔다.


병실 벽에 걸린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방안은 온풍기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티브이 소리가 크게 들렸다.

창가 쪽 환자가 남이야 깨든 말든 개의치 않고 지금껏 티브이를 크게 틀어놓고 시청하고 있었다.

그 환자가 이번에는 보호자 침대의자에서 잠든 엄마를 불러 깨웠다. 낮은 보호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 환자'의 어머니는 주섬주섬 잠바를 입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휠체어를 아들 앞에 대령하자, 아들이 척! 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양발을 휠체어 발받이에 올렸다.

'난 준비 됐으니 엄만 이제 밀어'라는 신호였다. 환자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아들을 태운채 바깥으로 나갔다.

그 잘난 아드님께서 모두가 다 잠든 새벽녘에 담배 피우러 야외에 설치된 흡연실로 행차하는 것이었다! 방금 행차했으니 담배 서너 대는 태우고 올 것이다.

이 50대 환자는 멀쩡한 두 손이 있는데도 스스로 휠체어를 움직이지 않고 꼭 늙은 자기 어머니더러 밀어 달라는 행동을 하는, 이해가 도저히 안 가는 환자였다.

지금 바깥은 섭씨 8도의 쌀쌀한 날씨, 야외 흡연실은 사방이 툭 터져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추운 곳이었다. 두 다리가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고 늙은 엄마에게 휠체어를 미는 일을 시켰던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전용 드라이버 기사를 둔 휠체어 CEO처럼 발걸이에 두 발을 턱 하니 걸치고선 손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환자는 1시간 후에는 야외 흡연실에서 다시 돌아와,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갈 것이며, 환자의 어머니는 바깥에서 그를 지킬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그가 피우는 소란은 다른 환자들에게 지옥 같았을 것이다. 이상한 환자는 다른 환자들에게 공포 효과를 주기 위해서, 큰 소리로 자기 어머니를, 그것도 새벽에 훈계하거나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야단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간호사 호출벨을 눌러, 엉덩이 근육주사로 진통제를 그것도 '쎈놈'으로 놔 달라고 주문하였다.

진통제를 맞고서는 보행기를 가져오라고 시키면 그 엄마가 간호사 데스크 앞 로비 한쪽에 있는 보행기를 가져다가 아들에게 대령하였다.

그는 꼭두새벽에 간호사 데스크 앞 로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시간 내내 빙빙 돌곤 했다. 그리고는 다시 휠체어를 가져오라고 제 어미에게 명령하고, 둘은 옷을 두껍게 입고 또다시 야외 흡연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개호로자식이었다.

때론. 환자의 작은 아들 그러니까 막둥이 손자가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 운동하는데 살을 찌워야 한대요. 고기를 사 먹어야 해요. 5만 원만 보내 주세요"

"그래, 알았어. 오후에 나가서 보내줄게"

이런 전화도 걸려오고,

"어머니, 딸이 수학여행 가야 해요." 이런 전화도 걸려오고,

"전문대를 졸업했지만 전망이 없으니 4년제 대학을 다시 가야겠어요" 첫째 손자로부터 이런 전화도 걸려오는 것 보면 환자의 어머니는 서방복은커녕 자식복도 없고, 손자복까지 없는 참 박복한 팔자인 것 같아 듣는 내가 다 슬퍼졌다.

왼쪽 창가 진도 문어잡이 아내가 오죽했으면 "언니는 복도 지지리도 없네. 어떻게 다들 언니 돈만 뜯어먹으려고 해요?"라고 옆에서 한탄을 했을 정도였다.

9 병동에는 사리를 구별 못하는 한 마리의 거머리가 있었다. 이 찰거머리는 어머니를 간병인으로 두고, 제 어미의 피를 빨고 있는 역겨운 녀석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어머니에게서 도려내야 할 고름이었다. 어머니의 다리에 빨판을 깊숙이 박은 그 찰거머리는 바로 오른쪽 창가 병상의 이상한 ‘그 환자’였다.

그는 아침과 저녁을 먹지 않았다. 대신 웨하스와 과자, 음료수로 두 끼를 때웠다. 생활보호대상자인 그 환자는 생활보조금으로 밥대신 맛있는 과자를, 특히 사르르 입안에서 녹아서 사라지는 웨하스로 두 끼를 때웠다.

병실 양쪽으로 창문이 있고 가운데 벽면에는 1,000 니트 밝기의 40인치 LCD TV가 박혀있는 905실은 항상 어두웠다.

그 환자와 다른 창문가의 진도에서 문어잡이배를 하는 "진문배' 환자의 보호자가 24시간 내내 불투명 커튼을 내려 외부의 빛을 차단하기 때문이었다.

밑 부분에 해남우리종합병원이라고 큼직하게 인쇄되어 있는 3 중직 폴리에스터 암막커튼은 병실의 낮을 밤으로 만들었다.

나는 화장실 옆 복도 쪽 침상이었기에, 더군다나 거동이 매우 불편한 몸으로 암막커튼을 올릴 수가 없었다. 내 영혼은 빛을 갈망하면서 병들어갔다. 우울증이었다.

우리 병실은 서북쪽 만대산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후에는 햇볕이 들었다. 창가 쪽 간병인과 환자들은 재활치료가 끝나면 어둠의 장막을 치고 낮에도 잠을 퍼잤다.

낮이고 밤이고 햇빛을 볼 수 없는 내게 병실 생활은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교통사고로 신체의 오른쪽 몇 군데를 수술했고, 왼쪽 허리가 마비증상이 있는 나는 거동이 아주 제한적이어서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수간호사에게 창가 쪽 침상이 있으면 병실을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농한기여서 그런지 입원 환자들이 많아 좀처럼 창가 쪽 병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 환자의 어머니와 진도 문어잡이 배 '진문배'의 사실혼의 아내로, 뇌경색으로 입원한 남편의 간병을 하는 진도 아주머니, 둘이는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항상 커튼을 내려 병실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였다. 병실 안 공기는 너무 탁해서 나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4인 병실에 보호자까지 8인이 생활하는데 창문을 꽉 닫고 환기를 안 시키니 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키 큰 간호사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즉각 커튼을 올리고 창문을 개방하여 환기를 시켰다.

잠시나마 신세계가 열렸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였다. 방 사람들은 곧 창을 닫고, 장막 커튼을 내려버렸다..

낮에는 퍼자고 밤이 되면 박쥐처럼 일어나 지나간 프로그램인 자연인이나 대조영, 조선 태종 이방원의 일대기를 시청하였다.

남들 다 자는데 운동하러 나가기도 하고,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가 똥 싸면서 큰 소리로 자기 엄마를 부르기도 하고,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깨 먹기도 하는 몰염치한 인간들이었다.

"엄마! 내가 화장실 가는데 옆에 있어야지 문만 닫아놓고 다른 거 하면 되겠어? 안 되겠어?" 이러기도 하고,

"엄마! 어제 쓴 보행기 가져오라고 했잖아 왜 딴 걸 가져와!" 하기도 하고,

"난 밤중이던, 새벽이던, 낮이던 운동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어. 새벽에 간호사실 앞에서 운동하면 키 큰 간호사 그년은 왜 나만 보면 지랄하는지 모르겠네!"

그러자 그 엄마가

"나도 그년 싫다. 우울증 생기겠어"라고 하며 자기 아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지적하지 않고, 남들 욕만 해대는 것이었다.

밤중에는 시스템 에어컨 겸 온풍기를 최대로 틀어놓으니 열기에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언니, 방에서 좀 냄새나는 것 같지 않아?"

"글쎄 안 나는 거 같은데"

"좀 썩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오래간만에 냉장고 청소 좀 할까 봐"

"냉장고가 아니야. 여잔 밑구멍을 잘 닦아야 해. 밑의 구멍을 안 닦으면 방에서 냄새가 난다고"

"난 아래는 잘 닦아. 샤워나 하러 가야겠다. 언니"

그 환자의 엄마와 진문배의 사실혼 아내가 주고받는 대화였다. 참으로 교양이 철철 넘치는 여자들이었다. 50대의 아들이 듣는 데서 자신들의 밑구멍을 스스럼없이 화젯거리로 삼는 늙은 여자들이었다.

진문배의 아내는 자주 해남 농협마트에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옆 환자의 과자며 바나나우유며 코카콜라를 사 와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진문배의 아내는 주로 과일과, 베트남 남자 간병인이 먹을 제과점 빵과 음료수를 사 와 냉장고에 쟁이기 시작하니 다른 사람들이 냉장고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병원 식사는 저염식이 아니었고, 대단히 맛있어서 별도의 반찬이나 과자나 컵라면 등이 필요가 없었다. 이 병원은 밥이 잘 나오기로 소문난 병원으로 다른 병원들의 저염식과는 달리 맛에서나, 영양에서나 질적으로 달랐다.

창가 쪽 환자와 그의 어머니는 장기간 한 병원에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 중, 20일은 자기들 월급날이라고 해서 처음엔 무슨 직장인인 줄로 오해를 했었다.

20일이 가까워지면, 몇몇 환자들은 생활비가 다 떨어져 자기들끼리 담배를 꾸러 다녔다. 매월 20일 날, 생활비가 나오면 후하게 갚고, 병원비도 20여만 원 내고, 그런 가불인생들을 사는 환자들도 더러 있었다.

나는 밤이면 통증이 심해져서 진통제 주사를 달고 살았는데, 창가 환자도 초저녁과 아침 일찍 진통제를 맞곤 하였다. 나는 간질 환자가 무슨 이유로 진통제를 맞고 다니는지 의아해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 나는 깨어 있었다. 평소 절뚝거리거나 휠체어를 타야 움직일 수 있는 그 창가 쪽의 환자가 벌떡 일어나 또박또박 정상인처럼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905호실이었다.

휠체어에 의존했던 환자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는 순간을 목격했을 때의 심정은 인두겁을 쓴 도깨비를 본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 환자가 휠체어에 의존해 살아가는 모습을 참된 현실이라고 믿었고,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고통과 연민이라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현상은 치밀하게 위장된 거짓이었으며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은 나의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있어 혼란을 가져왔다.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것은 모두 다 가상이었고, 다들 잠든 새벽에 일어난 그의 은밀한 기동이 바로 실재였다.

우리는 그간 도덕적 판단으로 그를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그에 맞는 배려와 연민의 의무를 이행했다. 그를 향한 연민과 사회적 도움은 인간 본성에 깃든 선의에 기초했다.

그러나 그 선의는 '거짓된 필요'라는 기만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이는 임마누엘 칸트의 의무론적 관점에서 볼 때, 기만적인 행위가 우리의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 자체를 침해했던 것이다.

그는 왜 아픈 척을 했는가? 그의 행동은 진정한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고통의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연민이라는 고귀한 감정의 가치를 훼손하였다.

그는 여태껏 '일어서지 못하는 환자'라는 역할을 선택했고, 새벽에 일어서는 것도 선택했다. 그는 심지어 '병'이라는 상태조차도 타인 앞에서 어떻게 연기할지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날 새벽의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 있어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에 대해 깊이 고민할 기회를 주었다. 어이없게도 세상은 보이는 것이 모두 다 진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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