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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늘보

by 꽃피네

그날은 악몽이었다. 내 몸이 부서지던 날 말이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2025년 3월 23일의 참혹한 교통사고로, 나는 3차원이나 4차원의 세계에 들지 못하고 2차원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영혼이나 유령들의 4차원의 세계, 보통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3차원의 세계, 병상에 붙박여 병실 천장을 쳐다보고 사는 2차원의 세계 중, 내 육체는 2차원의 세상에 내 던져졌다.

조선대학병원 정형외과 중환자실 병상에서 누워서 보는 2차원의 평면의 세계에서, 퇴원하기 직전에 딸기와 이고녀 태희와 간병인의 도움으로 처음 휠체어를 타게 되어 드디어 앉아서 보는 입체적인 3차원의 세상이 열렸다.

3차원의 세상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기에 스스로 바삐 움직여야 했지만, 중환자인 나는 누워서 지내야 했다.

교통사고로 오른쪽은 부서져 늘어져 있고, 왼쪽 손발을 힘겹게 움직이는 경이로운 동작도 정상인이 보자면 하찮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휠체어 타기 걸음마를 시작하다니, 나는 성취감에 자신이 뿌듯해졌다.

내 육체는 갑자기 나무늘보가 되었다. 호리병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은 듯한 중앙아메리카 대륙의 열대우림에서 놀고 있는 느릿느릿한 나무늘보 말이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도시의 나무늘보는 일정한 온도와 함께, 옮겨 다닐 수 있는 열대우림과 같은 울창한 수풀이 필요했다.

나에게 있어 처음 생명을 구해 준 병원은 조선대학병원이었으며, 이 나무늘보에게 코스타리카의 국립공원에 펼쳐진 열대우림과 같은 보호적 환경을 제공한 것은 두 번째 입원한 선한병원에 이어 그다음 입원했던 해남우리종합병원이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갈 때마다, 나의 넋이 조선대학병원 유스호스텔에서 만나 연을 맺은 플루토 지하 세상의 유령인 제니 스미스와 마르코 폴로, 라비 샤르마 그리고 하나의 하체를 공유한 슬픈 샴쌍둥이 아이샤 시디크와 파티마 시디크는 진통제와 신경안정제로 인해 늘 졸린 나무늘보를 찾아와 주곤 하였다.


2025년 4월 8일,

나는 조선대병원을 퇴원해 같은 날, 상급 대학병원과 지역 의료원이나 메디칼 클리닉 같은 조그만 병원 사이에서 허리역할을 하고 있는 큰 종합병원인 광주 선한병원에 입원하였다. 선한병원은 광천동에 있는 빌딩 병원이었다.

전문 진료병원으로서 10여 개의 진료과와 20여 명 이상의 의료진이 있는 선한병원은 도심 도로변에 있었기에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더군다나 재활치료 목적의 병원은 아니었다.

선한병원에 입원했던 15일 동안 나는 수술 후유증이 있는지 어떤지 집중 진료를 받았다.

치아 손상 여부도 그때 구급차를 타고 광주시 운암동에 위치한 비엔날레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 치아가 5개나 손상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 치과 클리닉으로부터 스위스제 스트라우만 록솔리드로 임플란트를 하면 1,200만 원의 비용이 든다는 견적도 받았다.

선한병원에서의 큰 성과는 나 혼자 스스로 대소변을 가리고, 식사를 하며, 간병인의 보호 아래 병원 복도에서 잠깐동안이나마 휠체어를 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025년 4월 10일

선한병원 6층 복도 끝, 창 밖의 메타세콰이아는 황갈색과 녹색의 꽃이 지고 그 자리에 가지가지마다 새싹이 막 터올라 연녹색의 물을 들인 것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해남 대흥사 윤선도길에도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는 중생대 백악기 때부터의 화석식물인 메타세콰이아는 그날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광주시 광천동 선한병원 창밖을 아름답게 꾸몄다.

백악기, 분필 같은 하얀 퇴적층.

공룡이 뛰놀던 시대, 중생대 백악기에 먹이를 발견한 배고픈 티라노사우루스의 포효를 이 메타세콰이아의 조상들은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때 무엇이 죽고, 그 희생의 대가로 무엇이 살았는지를 이 메타세쿼이아의 조상들은 보고 있었으리라.

날이 갈수록 녹색이 짙어지는 4월 초 중순, 병원 복도 끝의 창문 밖으로, 방직공장 공순이들의 이야기가 묻어 있는 방직공장터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신축하는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터파기공사를 하고 있는 불도저와 굴삭기의 움직임이 마치 뇌졸중에 맞아 손발이 뒤틀린 사람들의 동작처럼 어딘지 모르게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건설현장 기계들이 낑낑거리며 부산을 떨고 있었다.

조선대학병원 골절 수술 후, 선한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았던 나는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본 후, 복도 끝에서 창밖의 메타세콰이아와 아카시아를 바라보곤 하였다.

"날이 갈수록 녹색이 짙어져요. 참 세월 빠르죠?"

"그러네요. 저기 일신방직하고 전남방직이 있었던 자리인데 공사가 한창이네요"

"그때는 이 동네가 바글거렸어요. 방이 없어서 방을 둘로 쪼개서 세를 내주곤 했는데, 상하방이라고 들어봤어요?"

"예. 들어봤어요. 잠잘 때 아랫방 숨소리까지 들린다는 그런 상하방 말이죠?"

그 옛날 그때가 그립다는 광주 토박이 간병인이 봄이 와서 녹색이 점점 짙어진다고 신록예찬을 하였다.

이제 수술도 끝났겠다 이 병원에서는 수술 후 통증관리와 감염예방, 안정을 취하면서 관절의 경직과 근육량의 감소를 막으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중환자였기에 관절 경직을 막는다던지, 근육량 감소를 방지하는 재활치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허리 압박골절 때문에 보조기를 착용하고 30분 정도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극심한 요통 때문에라도 다시 침상에 누워야만 했었다. 또한 침대에 누워서도 혼자 일어나 앉는 것도 무척 힘들고 통증에 시달렸다.

조대병원 퇴원 당일, 의사는 내 양 옆구리에 튜브관에 매달린 동그란 공 같은 배양통과, 요의를 느낄 때 화장실을 가지 않도록 해주는 방광과 유린백을 연결하는 카테터를 제거했었다.

몸에 매달린 것들을 제거하자, 그 시원한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한병원에서는 바이탈 싸인모니터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상태였고, 진통제와 항생제 주사만 잘 맞으면 되었기에 몸을 움직이기는 날이 갈수록 더 수월하였다.

이 병원에서는 6명의 중환자가 한 병실에 있었는데 각자의 벽면에는 티브이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고, 이어폰을 꽂고 티브이를 시청하는 것이 간병인에게는 하나의 소일거리가 되었다. 그만큼 나는 스스로 움직이기를 희망하였다.

나는 선한병원 입원 첫날부터 혼자 화장실 가기를 원했는데, 간병인이 위험하다고 제지하였다. 그래서 간호사를 불러 항의했더니 휠체어를 타는 것은 좋은데 한 발자국도 못 떼는 상태니 반드시 간병인이 동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선한병원 입원 첫날부터, 나는 스스로 재활치료에 들어간 것이다.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고, 물병 꼭지를 돌리고, 약봉지를 찢는 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동작 자체를 스스로 하고 싶었다.

"왜 위험하게 장애인용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앉으려고 하세요. 기저귀 좀 차고 누워서 싸면 제가 다 닦아 드릴 텐데요"

"그래도 그렇지 부끄럽잖아요. 아무튼 정말 할 수 있는 데까지 혼자 해 보고 싶어요"

"환자니까 부끄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환자라면 누구나 누워서 쌀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러라고 간병인이 필요한 거잖아요"

"좀 도와주십시오. 일단 혼자 변기에 앉고 다시 휠체어에 옮겨 앉는 것만이라도 해 봅시다"

그리하여 복도를 돌아 반대편에 있는 커다란 장애인용 화장실까지 가서 일단 변기에 앉았는데 대변은 나오지가 않았다. 그러나 소변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요도의 카테터를 제거한 직후였기에 시원스럽게 나오지도 않았고 내 맘대로 소변을 볼 수도 없었다.

심지어 이번 사고로 어디가 망가졌는지 화장실을 가려고 휠체어에 앉으려고 할 때나, 복도를 다니면서 화장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옷에 싸기도 하였다.

그러면 간병인 물을 떠 와서 환자복을 벗기고, 비누로 닦아주었는데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발기해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물수건을 주면 왼손으로 내가 씻겠다고 해도 간병인은 괜찮다고 하며 개의치 않고 나를 씻기는 것이었다. 나는 옆의 다른 환자나 간병인들이 행여 들을까 봐 창피해서도 큰소리를 낼 수가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때의 시간은 정지한 듯 정말 느리게 흘렀고 내 심정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거기로 들어가고 싶었다.

조선대학병원에서 수술 전날 관장할 때처럼 부끄럽고 어디론지 숨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더 혼자서 용변을 처리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선한병원 입원 3일째가 되자, 드디어 나는 왼손으로 장애인을 위한 구조물을 잡고서 변기에 앉아 용변을 보고, 화장지로 닦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이 많아진 간병인은 티브이를 시청하기도 하고, 내 말동무가 되어 자신의 사생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나이 지긋한 노년층 여자들 참 생활력 하나는 강했다. 간병인은 기아자동차에 다녔던 남편이 밖으로만 나돌고, 가정을 등한시했다는 이야기며, 미용실을 해 주월동 삼익 세라믹 아파트를 샀다는 이야기며, 아들을 조대에 보내 졸업시켰고, 이제 건축사 시험을 쳐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찬 이야기들을 내게 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나와 간병인 사이에 유대감이 생겨났다. 그래서 아들 보러 집에 다녀오라고도 하고, 마음껏 외출해도 된다고도 하였지만 그녀는 한사코 사양하는 것이었다.

내 오른발은 사고당시부터 발목 삼복사 골절로 인해 못 움직이는 상태였고 골절수술 후 무겁기 짝이 없는 통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 통깁스는 조선대병원에서 5월 15일 날 해체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교통사고 발생일 3월 23일부터 약 두 달 동안 발과 발가락을 일절 못쓰게 된 것이다. 나중에 해남우리종합병원에서 알게 되었지만, 심경근전도 검사를 해보니 좌골신경 손상까지 있어 오른쪽 발 다리의 감각마비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선한병원에서는 좌골신경 손상을 몰랐기에 통깁스를 오랫동안 하고 있으면 관절이 완전히 굳어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통깁스 안에 들어있는 발이 근지러워서 못 살겠다고 날이면 날마다 하소연을 해댔다. 실제로도 신경안제와 진통제 주사에 의지해 하루하루 살았지만 늘 극심한 작열감과 통증으로 다리 전체가 화끈거리고 근지럽기까지 하였다.

선한병원 담당 주치의는 처음엔 조선대 병원이 처치했기에 조대 의료진이 통깁스를 해체해야 한다고 그랬지만, 허리고, 깁스 위쪽 허벅지고 근지럽다고 쇠로 된 안마손으로 빡빡 긁어 상처를 내놨더니 깁스를 잘라주겠단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는 내게 그까짓 통깁스가 의학적 치료 행위로 얼마나 필요한 것이냐고 따졌던 것이다.

그랬더니 통깁스를 잘라내고, 부목을 받치고 천으로 감아 간이 깁스를 해준 것이었다. 그래도 오른쪽 발가락에 힘이 들어갈리는 없었지만 틈나는 대로 간병인에게 다리와 발가락을 만져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완전 마비였던 오른 발가락들이 지금에 와서는 조금이나마 까닥거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간병인의 도움도 컸으리라.

선한병원에서 내가 해낸 제일 가치 있었던 일은 바로 통깁스를 잘라내도록 한 일이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어느 날, 나는 "만약 발이 온전하면 네게로 갈 것인데"라고 한탄하며 메타세콰이아에게 물어보았다.

이 화석식물은 어차피 거동 자체가 불편해서 통깁스를 하나, 그것을 잘라내나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똑같을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오래 산 자가 더 현명한 법! 나는 수억 년 전, 중생대부터 오랜 세월을 살아남은 이 낙엽 침엽수의 지혜를 빌렸다.

그리하여 통깁스를 대신한 간이 깁스로 인하여 오른 다리와 발이 더 가벼워졌고, 휠체어에 타고 내리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게 되었다.


2025년 4월 23일,

그렇게 선한병원에서 15일간의 집중치료를 마친 나는 본격적인 재활치료를 위해 해남우리종합병원 2 신경외과에 입원하였다.

병원은 넓은 면적에 3층 건물로 지어져 있었는데, 아름다운 자연과 완전히 동화되어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요정들의 아기자기한 어린이집처럼 무척 깔끔하고 정겹게 보였다.

병원 앞쪽으로는, 정문 약국 너머로 철이 일러 아무 작물도 심겨 있지 않아 논바닥을 드러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농부들이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해 모내기를 하려면 아직도 한 달포나 남았다. 저 멀리 들판 끝에는 낮은 산들이 해남군과 강진군의 자연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북쪽으로는 해남 금강산에서 뻗어 나온 능선을 따라가면, 해남군과 옥천면에 걸쳐 해발 493미터의 만대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뒤에서 이 병원을 품고 있었다.

해남우리종합병원의 담장을 따라서 쭉 뻗어나간 넝쿨장미, 무궁화, 대롱나무, 줄사철, 철쭉 그리고 늘 푸른 꽃동백이 바깥과 경계를 이루었다.

각 병동 건물 앞과 주변에는 이발을 단정히 한 향나무며 호랑가시나무와 같은 사철 푸른 나무와 본관 옆에는 제법 넓은 시렁 위에 등나무들이 서로 얽혀 있었다.

정원과 주차장 주위에는 잘 단장된 붉은 소나무며 단풍나무, 붉은순나무, 도토리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멀구슬나무, 측백나무, 꽝꽝나무, 야자종려와 자그마한 파초며 바나나 등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도시 병원에서 귀향한 나무늘보가 산책하면서 재활치료 하기 안성맞춤인 이 병원은 주차장마저도 잘 가꾸어진 정원 속에 있었다.

정원 밑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이 사시사철 졸졸졸 노래를 불렀다. 벌 나비도 봄꽃을 찾았다. 마치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 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듯한 정경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우리는 응급실에서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입원 환자 한 분을 보낸다길레 성명을 보니 아는 분과 똑같은 거예요." 해남우리종합병원 9병동의 수간호사가 메디컬 스트레처에 실려 온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워했다.

"아니 자전거 타고 집에 가는데, 전 기억나지는 않지만 카니발 승용차가 뒤에서 느닷없이 꽝 박았다고 하데요! 죽다 살아났습니다."

"아이고! 큰일 날 뻔했네요. 보니까 수술도 여러 군데 하시고"

응급실에서 9병동으로 옮겨가니, 십 년 전에 교통사고로 골반뼈를 다쳤을 때, 나를 보살펴주었던 수간호사가 어떻게, 이렇게 크게 다쳤는지 걱정해 주었다.

"아 삼복사에, 쇄골에, 허리에, 이빨에, 고관절 대퇴부 골절에 여기저기 다쳤습니다. 이만한 게 다행이네요"

"아휴 그러게요. 잘 치료하시면 곧 회복되실 거예요. 샘! 모시고 가셔서 905실 자리 봐주세요"

수간호사의 금방 좋아진다는 말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과거의 인연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다. 생면부지였지만 어느샌가 챙겨주고 자기 일인 양 안타까워하니 말이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상에 누우니, 간호사가 와서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하였다.

"어떻게 다치셨어요? 어디 병원에서 무슨 수술했어요?"라고 어디가 아픈지, 무슨 기왕증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고혈압과 당뇨는 필수 질문 사항이었다. 일절 그런 약을 복용한 적도 없고 교통사고 전에는 어떠한 약도 복용한 적이 없다고 하자, 이번에는 다른 간호사가 옥시미터와 디지털 혈압계를 가지고 와서 혈압과 맥박을 체크해 갔다.

선임 간호사들 몇 명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세월 참 빠르다. 다들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나만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듯하였다.

모름지기 매사에 자기 하기 나름이겠지만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거 병원 생활 잘 풀리겠는걸' 하며 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어피머리를 한 또 다른 간호사가 와 통증관리를 위한 포도당에 비타민 B군 및 C, 진통제를 첨가한 수액 주사를 놓았다.

"어머 많이 다치셨네요. 쥐엄쥐엄 해 보세요" 하이톤도 로우톤도 아닌 굉장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사과를 한입 베어물 때 나는 사각 소리, 포도알이 톡 하고 터지는 듯한 듣기 좋은 상냥하고 청량한 목소리였다.

명찰을 보니 우리나라에 만육천 명 정도 있는 희귀성인 편모씨로 되어 있었다. 편작의 후예런가 그녀는 상냥하고 듣기에 아주 편안한 목소리의 친절한 간호사였다.

오후 5시가 되자 어김없이 저녁식사 전동 카트가 미끄러져 왔다. 어랍쇼! 베트남에서 병원 근처 마을로 시집온 서글서글한 아주머니가 우리 병동 식사 배달을 맡고 있었는데,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다.

이 베트남 여자는 생활력이 강한 사람으로 동남아시아 남방계 민족만의 특색이 있었다. 베트남 인구의 85%를 차지하고 있는 비엣족- 베트남 민족- 가운데에서도 피부가 흰 편의 젊은 아주머니였다.

이 사람들은 모국어가 분화되지 않은 언어라서 한국어를 할 때 어른들에게도 혀 짧은 반말로 막말하기 십상이었다.

우리 한국어는 여러 가지 소리로 서로 다른 뜻을 나타내는 고도로 분화된 언어인 반면, 티응비엣- 베트남어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한 가지 소리로 나타내는 분화된 언어와 달리, 분화되지 않은 언어는 하나의 발음으로 여러 가지 넓은 의미의 사물이나 현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베트남어의 드엉이란 낱말은 길, 도로, 통로라는 말이고, 티응이라는 말은 소리, 언어, 말을 뜻한다.

즉 일물일어설과 거리가 먼 언어 중 하나가 베트남어, 베트남말, 베트남소리인 티응비엣인 것이다.

나는 이런 미분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시골이 채워지는 오늘날 현실을 개탄한다. 나이 많은 시골 남자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딸뻘보다도 어린 동남아시아 여자들을 데려 와서 씨받이나 성적 만족을 도모한 결과이다.

그 이면의 원인에는 일부 한국 여자들이 무조건 서울 경기도살이만을 고집하며, 자신들은 별로 갖추지 못했으면서도 남자들에게 자신들보다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하며 시골살이를 기피한 많은 영포티 여자들의 페미니즘과 비혼주의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집올 한국여자가 없는 농어촌으로 시집오는 외국 여자들은 대개 자국 내에서도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그야말로 영어 ABC도 모르는 여자들이다.

하기야 교육 수준이 높은 동남아 여자들이라면 한국 시골, 그것도 농촌의 혼기를 놓친 사람들에게 어디 시집인들 오겠는가.

나는 이 아주머니가 병원 식당일을 마치고 귀가하여, 중국의 치파오와 닮은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원뿔형의 깔때기 삿갓인 논라를 쓰고 꾸옥응으- 국어를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런 한국 농어촌의 다문화는 다른 나라들의 슬럼가의 다문화와 진배없는 미래의 암흑이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이들에게 문화의 다양성을 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미풍양속의 문화가 짓이겨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새로운 저열한 방식의 다문화 확산인 것이다.

나는 분화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열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화는 우열을 논할 수 없는 그 지역의 사회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열대 지방의 언어들은 그 지역 생활에 필요한 어휘와 문법을 발달시켜 왔다.

열대지방에는 하얀 겨울도, 눈 녹고 화사한 봄도, 울긋불긋한 가을도 없다. 오직 여름만이, 우기와 건기가 계속되기 때문에 어휘와 문법 자체가 단순하고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환경이 그들에게 필요한 적은 수의 단어들을 만들었기에 우리의 분화된 언어는 열대 정글에서는 과유불급인 것이다.

그러니 교육을 받지 못한 열대지방의 원주민을 성적 욕구나 후손을 만들기 위한 씨받이로 데려와서는 아니 될 것이다.

무슬림들이 미국이나 서구 유럽의 나라들에게 큰소리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슬람을 믿는 여자들의 위대한 자궁이며, 실제로 무슬림들은 급격하게 이슬람 종교 인구를 증가시켜 다른 국가들을 존폐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 한국 농어촌으로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의 여자들이 무더기로 들어와 그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전파시키듯이 말이다.

이처럼 나이 든 시골 사람들이 동남아 어린 여자와의 결혼을 한다는 것은 금수만도 못한 도덕적 타락이며, 어이없는 인종 개악이다.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 베트남 여자들은 한국 농촌에 시집온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대다수의 베트남 여자들과는 수준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모국어가 표현하지 못하는 복잡한 사회 현상과 물상에 대한 개념을 영어나 다른 분화된 언어로 알고 있으며, 혼기를 놓친 한국의 시골 늙은이에게 절대로 시집오지 않는다.

이렇듯 한국여자들의 페미니즘에 기댄 비혼주의며, 그들이 기피한 시골살이가 우리 한국 사회를 망치고 있다.

15-20년 전부터 베트남에서 교육 수준이 낮은 신부들이 여기 시골에 시집왔는데, 한국 국적 취득 후, 한 마을에 6명이 시집왔다면 5명은 이혼하거나 도망갔다.

그녀들은 한국 여자로 변신하여 베트남 남자를 불러들이거나, 한국 내 베트남 남자와 혼인하여 둘 다 한국인으로 둔갑하는 어이없는 일이 실제로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우리는 이런 한국 농어촌의 슬픈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새로 옮긴 병원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푸어박 자나?"

"누구?"

" 벌써 잊었어? 나야 나 라비 샤르마! 제니와 마르코, 아이샤와 파티마도 왔어. 정원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아 라비! 태양의 보호! 반가워"

나는 잠결에도 라비를 반갑게 맞았다.

라비는 머리에 존엄과 종교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파그리를 하고 있었다. 라비는 더 현명해 보였다. 우리는 어둠이 깔린 병원 정원으로 스며들었다.

"터번 조심해 라비! 다리 위에 드리워진 소나무 가지에 파그리 구겨질라"

"고마워 푸어박. 내 파그리는 자동으로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 있거든. 그러니 파그리 걱정 마"

주차장 정원 벤치에는 낯익은 유령들이 모여있었다. 조선대학병원 뒷마당 바비큐파티로 다이어트에 실패한 제니는 풍만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았고, 청바지에 기타 백을 맨 마르코는 여전히 유쾌했으며, 샴쌍둥이인 아이샤와 파티마는 하나뿐인 엉덩이를 가지고 화장실 가자! 나중에 가자! 그새를 못 참고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시디크, 너희 둘 다 아까부터 오줌 마렵다고 했지? 아무 데나 들어가서 싸라. 우리는 재밌게 놀란다" 제니가 샴쌍둥이인 아이샤와 파티마 자매를 놀려댔다.

"에휴 이럴 땐 자궁이고 질이고 절반으로 잘라 나눠버리고 싶다니깐! 하기야 그거 분리하려다가 우리가 죽었잖아."

"이 무식한 녀석들아. 그것 분리하면 둘 다 죽고, 진짜 운 좋아도, 용케 한 명만 살 수 있는 거야"

아이샤와 파티마의 푸념에 내가 제니를 거들자, 라비와 마르코도 참견하였다.

"아이샤가 살 거야? 아니면 파티마가 살 거야? 아니면 누가 죽을 건데?"

"가위 바위 보로 할 거야? 너네들은 자매잖아. 같이 살아야지 분리를 왜 해?"

친구들의 이런 질타에 멍해진 둘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리가 한 게 아냐. 코타키나발루 병원 의사가 무료로 수술해 준다고 우리 부모님을 꼬드겨서 우리가 희생된 거란 말이야"라고 중얼거리며 손잡고 나란히 큰 측백나무 뒤로 사라졌다.

"질을 공동 소유하니 쟤들은 얼마나 좋을까? 하기야 뒤뚱뒤뚱 걷는 폼이 꼭 트랜스포머 같은 변신 로봇 같기도 하지만, 저년들은 오르가슴도 두 사람, 아니 두 유령이 같이 느낄 거야"

화장실 찾으러 큰 측백나무 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샤와 파티마를 보고 제니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한쪽 허리를 한껏 뒤튼 다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꽉 끼는 청바지 속의 커다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한 번 찰싹 두드려보았다.

달이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제니가 두드린 북소리가 둥 떨어졌다. 어쩜 엉덩이에서 저처럼 둥둥 쇠북소리가 날 수 있다니 유령들의 세계는 가히 불가사의하였다.

잠시 후, 아이샤와 파티마가 뒤뚱거리며 돌아오자, 라비가 의견들을 물었다.

"일단은 우리도 오고 가기 편하게 여기 해남에도 유령의 계단부터 만들자"

"그럴까?"

"그러자!"

"푸어박 어디에 유령의 계단을 설치하면 좋을까? 무슨 좋은 아이디어 없어?"

유령의 계단을 만들자고 하는 라비의 제안에 모두들 찬성하였다. 제니는 나에게 해남에 유령의 계단을 설치할 적당한 장소를 물었다.

유령의 계단은 유령들의 집인 지하세계 플루토로 가는 통로로 카론이 뱃사공으로 있는 증오의 강, 스틱스강이다.

사람이 죽으면 생전의 행실에 따라 천당으로, 극락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지하세계인 플루토는 한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해 차마 눈을 감지 못했던 이들이나, 아직 이승의 연을 놓지 못한 사자들이 유령이 되어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것이다.

"병원 뒤쪽 산 어때? 만대산이라고 정상 부근에 큰 바위 두 개가 서로 기대고 있는데, 두 바위 사이에는 비를 피할 만한 조그만 공간이 있어. 거기가 좋을 것 같은데"

"큰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다고? 그거 맘에 드네. 유령의 계단은 삐걱삐걱 소리가 나야 제맛이거든.

우리가 플루토의 지하세상에서 카론의 배를 타고 세상에 나올 때 말이야.

그 고물배가 삐걱대며 울어대듯이, 바위들끼리 비벼대며 노래한다면 볼만하겠는데!"

나와 라비의 대화에 유령들은 일제히 맞장구를 치며 동의하였다.

"한번 가보자"

우리들은 시커먼 어둠 속의 만대산을 날아올랐다. 사람들이 지나다녔는지 조그만 오솔길이 북동쪽으로는 해남읍 금강산 쪽으로, 남서쪽으로는 우슬재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편평한 정상부근에서 우슬재 방향의 능선 쪽으로 큰 바위 두 개가 의좋은 형제처럼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그 안에는 한 두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있었다.

유령들은 일제히 "영치기영차!" 하고 힘을 합쳐 바위들을 움직여 보았다. 처음에는 힘겹게 "삐이걱 삐이걱" 하고 바위들이 겨우 움직였다.

"어랍쇼! 이게!

마르코! 네가 힘을 덜 썼지?" 하고 제니가 앙칼지게 쏘아붙이자,

"아냐, 난 아냐! 영끌한 날 몰아세우다니 서운하기 그지없네" 하고 마르코가 울상을 지었다.

"그럼 누구야! 누가 힘을 안 쓴 거야!" 제니의 추궁에

"우린 절대 아냐!" 아이샤와 파티마도 이구동성으로 대꾸하며 손사래를 쳤다.

"자자! 싸우지들 말아! 처음에는 매사가

다 힘든 법이라고. 인간의 영혼 푸어박 너도 힘 좀 보태 봐" 라비가 내 넋에게까지 동참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나의 영혼과 서로를 마주 본 유령들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팔소매를 걷어붙이자, "그르렁 그르렁" 몸서리쳐지는 낮은 소리에 비로소 바위들이 리듬에 올라타 춤을 추었다.

바위들이 내는 소리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의 4악장 인트로 부분처럼 강렬한 저음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유령들도 신이 났는지 바위 두 개를 가지고 문질러 비벼대면서 그 심포니 제4악장 인트로 나머지 부분을 연주하였다.

"이야! 이거 딱이네 딱이야!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병원도 잡힐 듯이 바로 내려다보이고, 산 너머 저쪽으로는 해남읍도 보이고, 금강골 저수지에, 금강산 둘레길도 있고 경치 참 좋네 "라고 하며 라비가 감탄해하였다.

그러자 다른 유령들도 "우리 생각도 그래, 라비!"라고 동의하며 다들 새로 생긴 유령의 계단에 흡족해하였다.

"이 아름다운 경치에 빠져 푸어박이 나무늘보가 되었구나. 게다가 여긴 독수리도 없어서 도시에서 귀향한 나무늘보가 병을 치료하기에 딱이네" 제니가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해남읍 팔각정인 태평정을 기점으로, 마산면 아침재, 은적사, 북창, 송석, 옥천면 신계를 지나 다시 해남읍 금강골 구간까지 이어지는 총 길이 34.26km의 해남 금강산 둘레길이 발아래 놓여 있었다.

이 해남 금강산 둘레길은 해남읍의 진산인 488m의 금강산과 493m의 만대산 일대에 걸쳐 있는 명품 둘레길로, 나 푸어박이 그래블바이크를 타고 팔각정에서 출발하여 해남과 마산면의 경계인 가파른 아침재를 넘었지 않았던가.

"지금은 머리도 감기 힘들고, 옷도 갈아입기도 어렵고,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든데 예전처럼 다시 바이크를 타고 저 길을 달릴 수 있을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절망적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비록 굼벵이처럼 느리지만 당분간은 나무늘보로 만족하자. 그 교통사고로 육체가 처참히 깨지고 부서졌을 때,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천만다행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또한 비록 육체는 누워서 나무늘보처럼 옷을 갈아입을망정, 내 영혼은 신이 정한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관계된 금단의 구역을 제외하고는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내게 있어 시간은 초질량 항성의 강한 중력장에 잡혀버린 떠돌이 행성의 철들지 못한 피터팬처럼 다른 사람들보다 느리게 흐르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의 넋은 그렇게 새로 입원한 해남우리종합병원 뒷산인 만대산과 해남 금강산을 유령들과 함께 노다니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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