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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적 패러독스

by 꽃피네

아침에 간병인이 몸을 씻기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간병인은 자신이 덮으려고 가져온 핑크색 담요를 내 몸 위에 덮어 3월 말의 한기를 막아 주었다.

남이 덮어야 할 담요의 따뜻함이 밀려오자, 문득 생존에 꼭 필요한 물건이 한 가지씩 밖에 없다면- 인공호흡기도 1개, 난방이 들어오지 않은 실내에서 덮을 담요도 하나, 응급 의약품도 한 사람을 살릴 도즈 밖에 없다면- 우리 중환자실 환자 중 누가 살아야 하는가, 이런 선택적 상황에 처한다면 누가 살아야 가장 가치가 있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비상 의료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우선 비루한 나는 선택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병원으로서는 생존 성공 가능성이 제일 높은 튼튼한 사람을 고른다고 볼 때, 우리 4인 중에 욕쟁이가 선택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만약에, 보편적 도덕법칙을 강조한 정언주의에 의거하여 공평하게 제비 뽑기를 한다면, 환자가 4명이니까 그래도 25%의 뽑힐 희망이 있었다.

아니 칸트의 윤리학에 기초한다면 우리들 중에 누가 살아야 할까, 살아야 할 사람을 정한다는 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병원이 도덕성에 기초한 정언주의로만 판단한다면, 살아야 할 환자를 선택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것은 분명하였다.

이성적 존재로서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보편적 법칙과, 인간을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목적 자체로 바라보려는 도덕적 정언명령이 병원에서는 무시될 때도 있을 것이다.

의료 행위를 할 때, 치료 가능성이 높은 쪽에 가치를 두는 공리주의 선택법이 생명을 중시한다는 병원에서도 알게 모르게 적용되곤 하는 것이다.

즉 어차피 죽을 사람은 적당히 연명이나 시키고, 살아날 수 있는 환자들만 살리면 된다는 효용성의 법칙이 생명을 다루는 병원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만약, 한 개인의 존재 가치 총량과 다수의 행복의 총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인간은 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효용성을 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기본 법칙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과 도덕성을 최고의 목적 가치로 본 칸트나, 인과 예를 중시한 공자나, 측은지심과 정의를 내세운 성선설 유가철학의 맹자나, 인간 행동의 이해타산을 따질 때 중용의 덕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윤리관이 여전히 인간 행동의 동기로써 중요시되는 이유는, 최소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량한 사회를 존속시키는 데 있어 선한 윤리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엄마 차라리 산소호흡기 떼고 아버지 빨리 보내 드리자"

작은 아들의 채근에 이 엄마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듯하다.

"이번 달에도 병원비가 엄마랑 합해서 두 사람에 130만 원 나왔는데, 비급여로 이렇게 많이 나오면 도무지 병원비 감당이 안된단 말이야"

이런 상황이라면, 병원비 때문에 아버지를 보내자는 작은 아들의 성화를 이 엄마가 과연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그러니까 말이다. 갈 사람은 빨리 가야지 산 사람이라도 살지…" 아마 이것이 엄마로서 작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일 것이다.

지자체로부터 경제적 보호를 받고 있는 기초수급자 가정의 아버지가 심부전으로 두어 달 전에 입원하였고, 빠르면 2-3일 후, 늦어도 2주 안에 사망할 아버지의 인공호흡기를 오늘 떼잖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늘 새벽에 사망했다고 치자, 병원은 병원비가 달랑달랑한 이 모자를 남편 살인죄나 직계존속살인죄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의료적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다.


내친김에, 간이 안되어 있어 심심하기로 악명 높은 대학병원 및 대형병원의 저염식단의 의료적 패러독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머라도 좀 드셔보세요. 달콤한 믹스커피에 제과점 빵이나 카스테라 찍어 그냥 훌훌 삼키세요"

중환자실 입원 후, 골절 수술일은 다가오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한술도 뜨지 않은 나를 붙잡고 간병인이 애원하였다.

교통사고 후, 이상하게도 식욕을 완전히 상실한 나는 어떠한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일동안 전적으로 수액에 영양 공급을 의지하였다.

한국의 대학병원, 대형병원 음식은 심심하기 짝이 없는 저염식에 맛 또한 정말 없다. 그렇다고 건강식도 아니다.

수십 년간 소금 간 잘된 음식을 먹어온 환자들에게 입원한 며칠 동안 저염식을 준다고 한들, 그것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겠는가 하는 모순은 오늘날 한국의 대학병원이나 대형병원이 가지고 있는 의료적 패러독스이다.

이러한 의료적 패러독스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나타낸다. 일부 특정 환자들의 건강을 위해 설계된 저염식이 오히려 다른 일반 환자들의 식욕 저하, 영양 섭취 부족, 심리적 스트레스를 유발해 치료 회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이 모순의 본질을 살펴보자면, 병원의 저염식은 고혈압, 심부전, 신부전 등 염분 섭취가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질환을 관리하기 위해 설계된다.

이런 환자들에게만 극저염 치료 식단을 강제하고, 대부분의 환자 및 병원 근무자들을 위해서는 최소한 간이라도 제대로 되어있는 식단을 제공해야 되지 않겠는가.

일반환자에게 며칠 동안 저염식을 강요한다고 해도, 이 맛없는 병원식단이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하는데 보탬이 되기는커녕, 몇 가지 문제- 영양결핍 또는 영양 부족의 문제, 맛없는 음식이 주는 심리적 스트레스 문제-를 야기해, 잠깐동안의 저염식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의심받게 될 것이다.

한국의 대학병원 및 대형병원이 이러한 형식적 건강주의를 내세워 과도한 의료화를 강행하는 것은 대단히 우려할만한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 병원밥 먹어봤지? 소금 하나도 안 들어간 최고의 건강식이야. 믿고 한번 입원해 봐. 싹 다 고쳐줄게!" 이렇게 자기 병원 우수하다고 맛없는 음식도 내세우는 꼴이다.

건강이라는 명목 아래 환자의 개별적 필요나 삶의 질을 간과하고, 보여주기식으로 저염식 표준을 강요하는 모순과, 고착화된 의료적 관료주의가 오늘날 한국의 대학병원에 팽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병원들이 환자의 건강을 우선시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환자의 삶의 질이나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관행이 문제인 것이다. 이는 환자 중심의 치료에도 역행한다.

획일화된 저염식은 질병의 종류, 개인의 선호도, 환자의 문화적 배경 및 심리적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병원의 방침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의료적 한계이다.

병원은 저염식이 환자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일반 환자의 식욕, 영양 상태, 심리적 안녕을 해칠 수 있는 치료적 모순으로 나타날 수 있다.

저염식의 획일적 강제는 형식적 건강주의나 과도한 의료화의 사례로 볼 수 있으며, 환자 중심적이지 않은 의료 관행의 한계로 대다수 한국의 병원들이 타파해야 할 의료적 패러독스라 할 것이다.


욕쟁이 환자의 아내가 남편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빠여보 좀 어때요?"

"이런 엿 같은 병원, 이것도 음식이라고 매끼 내놓네 C8"

"아이 여보~ 이런 데서 욕하시면 안 되어요. 퇴원해서 집에 가서 당신 맘껏 하세요"

병원 저염식에 뿔이난 욕쟁이에게 그의 아내인 딸기가 살짝 눈을 흘기며 어떤 은밀한 기대를 담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병원장 짜아슥들 아가리에 처넣을까 보다. 한심한 녀석들, 졸라 맛없는 밥 먹으면서도 맛있는 척, 위선 떠는 꼬락서니들이라니"

"아이 그래도 다 환자 생각해서 빨리 낳으라고 싱겁게 하시는 걸 거예요"

"치료는 개뿔! 이렇게 맛없는 밥을 먹는 것은 고통이라고!"

맞다. 이것은 치료행위가 아니라 차라리 형벌이다. 한국 병원의 의료적 패러독스의 두 얼굴인 것이다. 이것은 의료적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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