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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수민 Jun 23. 2019

수작이 "될 수도" 있었던 영화

엠마 톰슨과 이언 매큐언의 <칠드런 액트>

아담, 죽기로 결심하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몇 달 후면 18살이 될) 아담 헨리는 치료에 꼭 필요한 수혈을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하고 있다. 병원 측에 대항해 재판장에 선 아담의 부모는 그들 가족이 믿는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왜 수혈이 옳지 않은지를 설명하며, 수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담 본인의 뜻이라고 호소한다. 아동법The Children Act에 따르면 만 18세 미만의 아동 및 청소년들에게는 부모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치료를 위해 필요한 경우 강제로라도 수혈을 하도록 판결을 내리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맡은 판사 피오나 메이는 이와 같은 결정을 바로 내리지 않는다. 대신—이건 지극히 특이한 경우인데—장본인인 아담이 누워있는 병원으로 직접 찾아간다. 아담은 정말로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마저 버릴 각오가 된 것일까? 피오나는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기로 한다.





엄청난 걸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이언 매큐언의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고, 엠마 톰슨이 주연에, 심지어 그 남편 역할은 스탠리 투치. 영화 전반에 내세워진 '선택'이라는 테마와, 종교적 신념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는 강렬한 설정. 덤으로 중간중간 스쳐 지나가는 런던과 영국의 전원적인 풍경들까지. 오스카 노미네이트를 위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듯한 영화 <칠드런 액트>는 보기 전부터 '수작'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똑같이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영화화한 <어톤먼트>의 명성을 이을만한 그런 작품 말이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부분까지도 이러한 기대감은 계속된다. 등장인물들의 복잡미묘한 감정선도 섬세하게 표현되고, 아담의 케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선택의 딜레마 그리고 아담이 직접 던지는 철학적인 물음들은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연기도 훌륭하고, 절제된 영상미도 아름답다. 이 모든 요소가 쌓아 올리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막상 결말에 도착할 즈음에는 영화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만 느낌이라고 할까, 아니면 시작하다가 중간에 애매하게 끝내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담의 입을 빌려서 엄청난 '빅 퀘스천'이 던져진 것도 같은데, 영화가 끝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 질문으로 뭘 물어보겠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다. 주인공인 피오나의 결혼 생활 문제도 그렇다. 복잡다단한 감정과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있을 두 사람의 갈등을, 영화의 담담한 결말과 함께 해소할 수 있으려면 그 사이에 좀 더 많은 사건을 넣었어야 했다. 영화의 '서정적'인 면은 너무나 좋았는데, 그게 도리어 내러티브에서의 '정적'으로 이어진 느낌이다. 



<칠드런 액트>는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1시간 45분짜리 영화다. 긴 러닝타임을 차분한 분위기 조성에 공을 들이느라 다 써버렸다면, 이는 소설을 영화화할 경우의 단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 터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 자체에서 이미 이런 '구멍'이 뚫려있었다면, 그건 영화감독이 아니라 원작자 이언 매큐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원작 소설을 보지 못해서 무어라 말할 순 없지만 말이다. (읽으신 분이 있다면 부디 알려주시길) 어찌 됐건 <칠드런 액트>의 스토리라인과 설정은 관객에게 더 깊은 생각과 감동을 전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잠재력에 비해 실제로 스크린에 옮겨진 것이 너무 적다는 아쉬움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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