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굴뚝 위에서 망가졌다... 비참하게 내려왔다" 뉴스를 보고..
'삶'과 '죽음'중에서 뭘 선택해야 할까?
'삶'은 그 앞에 '화려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지 않는한 언론이나 여론은 주목하지 않는다. 그 앞에 '비참한'이나 '억울한'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는다면 냉대를 받을 수도 있다. 심 할 경우 손가락질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억울하고 비참한 심정을 호소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하지만 '죽음'도 그들에게는 그냥 작은 이슈일 뿐이다. 성완종처럼 정치 스캔들을 풀어 놓거나, 장자연처럼 섹스 스캔들을 풀어 놓지 않는한... 언론과 여론은 그들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잠시 주목할 뿐이다. 하물며 해고 노동자 같은 평범한(?) 자극은...
그런데 언론과 여론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주목하는 선택이 있다.
'삶'과 '죽음'에서 세 번째 선택 '과 '다.
'과 '는 '삶 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바로 생명을 건 투쟁이다.
극단적인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고 한발 한발 예정된 죽음으로 걸어들어가는 행위가 바로 '과 '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과 '의 뒤에 붙은 공백이다.
'과 '보다는
'과 '가
'과 '와같이....
그 공백이 길면 길수록 혹은 많으면 많을수록, 여론과 언론에게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일부는 우호적이기도 하다.
김진숙 지도가 그러했고, 유민 아빠가 그 '과 '를 선택했다. 언론과 여론은 그들을 정말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말로는 그들을 걱정하고 위로했지만, 그들이 원한 건 그 상황이 전해주는 말초적인 자극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상황이 악화될수록 언론과 여론은 흥분했다. 그리고 그들이 굴뚝에서 내려오고 단식을 중단하자 그 관심은 급속히 냉랭해졌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웃긴 건 이런 반응이 '포르노'를 볼 때 나타나는 패턴과 비슷하다는 거다.
자극적인 영상이 화면 가득할 때 흥분을 주체 못하고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주목하지만, 한 번 욕정을 분출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외면하는...
우리는 그들의 목숨 건 투쟁을 그렇게 포르노 보듯 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기사를 외면하는 거다. 채액이 덕지덕지 묻은 두루마리 화장지를 외면하듯, 그렇게 외면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