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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곳에서 Jul 14. 2024

4월 말, 순례길에 눈이 내리면...

스페인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으로

드디어 산티아고 순례길 출발일의 아침이 밝았다. 나의 계획은 사무실로 출근해서 풀근무를 한 뒤, 퇴근 후 기차역으로 바로 이동하여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하필 이 날 중요한 미팅이 있어, 정장에 구두를 신고 배낭을 메고 사무실로 향했다.


정신없이 업무를 하루를 보내고, 진행되던 프로젝트와 관련된 한국/스페인 주요 컨택포인트에게 휴가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렸다. 조금은 찝찝한 기분으로 업무를 마무리했다. 항상 휴가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업무가 몰리는 것 같다. 왜 직장인은 업무를 하면서 항상 휴가를 갈망하고, 휴가 가서는 머릿속으로 업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기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업무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등산복으로 환복을 한 뒤, 사무실에서 나왔다.

10호선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역에서 지하철 타고 출발!

나의 순례길 첫 출발지인 스페인 사리아(Sarria)로 가는 기차에 타기 위해서는 마드리드 차마르틴역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사무실에서 차마르틴 기차역까지 지하철로 한 번에 갈 수 있어서 편하게 이동했다. 낮까지만 해도 좋았던 마드리드의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원래 4월 말~5월 초는 마드리드 날씨가 가장 좋은 시즌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후변화 탓인지 요즘따라 날씨가 쌀쌀하고 비도 자주 내린다. 다행히 비를 맞지 않고 기차에 탑승하여 날씨앱을 켜보니, 순례길 루트 모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순례길 여행 5일 중 하루 빼고 모두 비가 예정되어 있었다. 기차는 이미 출발했지만, 왠지 사서 고생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 여행 전부터 가기 싫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리아 행 스페인 고속열차 Renfe,, 괜히 가는건 아닌지 고민하면서 찍은 사진

기차에는 나와 같은 5일짜리 순례길 여행객이 제법 많아 보였다. 우연히 반대편 좌석에 딱 봐도 순례길 여행객으로 보이는 마드리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이동했다. 내 삼촌뻘 되는 3명의 아저씨들은 중학생의 소풍여행 가기 전과 같이 들떠있었다. 내가 비가 와서 걱정이라고 하니, 순례길에서는 보통 비가 강한 바람과 같이 몰아쳐서 우산, 판초우의 모두 있으나 마나라고 한다. 그냥 쫄딱 젖을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고, 비가 오다가 또 금방 그치기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조언해 주었다.


사리아에는 밤 12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알베르게는 순례자의 휴식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보통 저녁 10시면 모두 문을 걸어 잠근다. 사전에 알베르게에 연락하여 나의 도착 시간을 알려주었고, 다행히 알베르게 주인이 조용히 문을 열어줘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침에 찍은 Sarria의 풍경. 흐린 날씨와 비에 젖은 돌길이 운치있게 보였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순례자 여권인 크리덴셜을 구입했다. 크리덴셜은 순례길 중간중간에 도장을 찍는 종이로, 나중에 크리덴셜을 통해 걸어온 길을 증명한다. 이곳에 내가 방문한 장소, 알베르게 등에 비치된 도장을 하나하나 찍어서 채워나가면 된다. 크리덴셜에 찍힌 도장을 통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기준으로 도보 100km 이상, 자전거 200km 이상 순례한 것을 증명해야 순례길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크리덴셜이 있어야 공립 알베르게에서 순례자 인증이 가능하며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숙박을 할 수 있다.

나의 순례길 발자국을 채워 줄 크리덴셜 구입!

근처 카페에서 대충 아침을 때운 뒤, 오전 8시경에 첫 목적지인 포르토마린으로 출발했다. 첫날 아침부터 비가 와서 우산, 판초우의 모두 챙기지 않은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생각 정리 하러 떠난 순례길 위에서 첫 1시간은 판초우의를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했다. 때마침 비가 그쳐서 다시 마음을 잡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걸었다. 12년 전 스페인에서 어학연수로 열심히 공부했던 스페인어 덕분에 취업도 하고, 이렇게 스페인에 주재원 근무를 하면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룬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순례길 중 찍은 사진. 처음에는 사진과 영상을 계속 찍었으나, 갈수록 모든 풍경이 다 비슷하여 눈으로만 담았다.

비에 젖은 흙냄새를 맡으며 3시간쯤 걸었을 때, 슬슬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보니 인터넷으로만 봤던 바르(Bar)가 눈앞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순례를 관광화 시킨 정부의 노력이었다. 표지판도 많이 설치되어 있고, 길도 깔끔하게 잘 닦여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바르(Bar)가 중간중간에 있어 지친 순례자의 허기를 달래주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과 피자 한 조각을 먹었다. 맛은 썩 좋진 않았으나 소금에 절인듯한 짠맛, 고칼로리 음식, 카페인을 섭취하니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루종일 비가 내릴랑 말랑한 날씨가 계속되어 비가 안 올 때 최대한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 다시 서둘러 길을 나섰다.

순례길 중 처음으로 방문한 Bar. 춥고 외로운 길을 걷다 Bar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때만 해도 고어텍스 재킷과 고어텍스 등산화를 믿고 판초우의는 사지 않았다. 그렇게 1시간쯤 더 걸었을 무렵, 갑자기 진눈깨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숲 한복판에 있어서 눈을 피할 길이 없었다. 판초우의를 사지 않은 것이 너무 후회되기 시작했다. 한국 돈으로 4만원 정도면 이런 불편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뭘 믿고 이런 짓궂은 날씨를 대비하지 않았는지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20분쯤 비 같은 눈에 온몸과 가방이 쫄딱 젖었고, 양말도 젖어서 불편함과 찝찝함이 계속되었다. 다행히 멀리 작은 마을이 보여 간이 대피소 같은 곳에서 잠시 눈 구경을 했다. 젖은 몸에 바람이 세차게 불어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비수기라 사람이 많이 없었는데, 저 멀리 젊은 스페인 여성이 혼자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여성도 우산과 판초우의가 없어 보였다. 왜 우의를 챙기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미니멀리스트라서 새로운 짐을 늘리기 싫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런데 우의가 보이면 당장 살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잠시 눈 구경을 하면서 초콜릿을 먹고 따뜻한 샤워를 빨리 하고 싶어서 눈길을 헤치고 목적지로 향했다.

4월 말에 눈이 올진 몰랐다..

그렇게 걷고 걸어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100km 남았다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내가 생각한 순례길은 아웃도어 옷을 입고 표지판과 함께 멋진 인증샷을 남기는 것이었지만, 눈이 많이 내리고 너무 추워서 대충 사진만 찍고 다시 빠르게 이동했다. 스쳐가는 순례객들 얼굴에 모두 '고생'이라는 단어가 쓰여있었지만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인사만큼은 잊지 않고 건네주었다. 해외에서 외국어로 생활하면서 외국어로 소통하고 말을 이어 나가는 것이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그래서 순례길에서는 입을 닫고 약간은 폐쇄적으로 나의 길을 가자고 다짐했지만, 궂은 날씨에서 일종의 동지애가 생겨서 인지 자연스레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최종 목적지까지 100km 남았다고 안내해주는 비석 & 두번째 목적지 포르토마린 입구의 다리

도착하자마자 알베르게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했다. 여느 알베르게가 그렇듯 시설이 매우 좋지는 않아서, 따뜻한 물이 간헐적으로 나왔다. 그래도 샤워를 하고 침낭에 잠시 들어가서 몸을 데우니 기분이 상쾌했다. 짐을 정리하면서 빨래를 하기 위해 세탁실로 향했는데, 이미 빨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때 대만, 일본 순례자가 사람이 많으니 같이 빨래를 돌리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더 빨리 빨래를 돌리고, 세탁기 및 건조기 사용 비용도 분담할 수 있었다. 이대로 그냥 누워있기는 아쉬워서 포르토마린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다.

포르토마린의 주요 명소. 마을 전체는 약 15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저녁때가 되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그때 알베르게 같은 방에서 묵고 있던 이탈리아 남자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밥이라도 좀 편하게 혼자 먹고 싶었는데 또 외국어를 쓰면서 스몰토킹을 하려니 거부감이 들었다.그래고 먼저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해 준 게 고마워서 같이 먹었다. 이 친구는 스페인 레온(Leon)에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하였고, 나보다 2배는 더 많이 걷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이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니 나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았다. 나이도 동갑이고 같은 시기에 스페인 같은 도시에서 어학연수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친구도 다른 나라에서 주재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국과 이탈리아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런 비슷한 성장배경과 생활환경으로 인해 금세 친구가 되었다. 둘다 식성도 아주 좋아서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같이 숙소로 돌아왔다. 이 친구의 이름은 스테파노였고,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이태리 친구와 방문한 식당. 돼지고기 항정살로 만든 요리가 아주 꿀맛이었다.

다음 날이 되어 나는 7시 30분에 알베르게에서 나와 팔레스 데 레이로 향했다. 스테파노는 이탈리아 사람답게 자기는 늦잠을 자고 늦게 출발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스테파노는 이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스쳐가는 인연인 줄 알았다. (2일차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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