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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한잔의 여유 Mar 07. 2024

재활 속 분단된 가족 이야기

시니어들의 디지털 역량이 향후 삶의 행복감을 결정한다

273번째 에피소드이다.


요새 특강을 가게 되면 이런 말을 자주 반복하는 편이다. "앞으로 로컬에 살아가시면서 가장 중요한 미래역량은 시니어들과 함께 일하는 성과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청년들의 정주여건 개선, 유치 등을 수없이 정치권이 말하지만 그건 정치인들이기에 할 수 밖에 없는 레토릭일 뿐입니다. 현실적이지 않으며 인구학적으로, 또는 수도권 집중화 현상을 고려한다면 로컬에서 사업주들은 시니어들을 고용해서 성과를 내야 하고, 근로자라면 시니어들과 함께 어울려 팀 단위의 목표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그게 현실이며 적응하시고 리딩하시는 분들만이 그나마 로컬에서 기회를 찾으실 겁니다." 약간 스스로 말하면서도 <사이비 교주>같지만, 그게 현실이다.


또 한가지, 최근 극심하게 체감하고 있는 사회문제는 시니어들의 디지털 역량이다. 정말 이의 숙련도에 따라 삶의 행복감이 결정된다. 내가 벌써 혼자 지낸지 5개월 차를 맞이하고 있다. 작년 11월부터 아버지의 수술로 인해 전담 간병인 역할을 자처한 엄마로 인해 캥거루족이었던 난 이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엄마의 따뜻한 밥은 기대할 수도 없었고 그저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는 자취생이 된 거다. 십여년을 자취를 하다 이제는 질려 다시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왔건만 다시금 자취가 시작되었다. 수술 이후 아버지의 재활은 생각보단 한치앞을 모르는 끊임없는 동굴 속 터널이다. 일주일 하루는 꼬박꼬박 간병 겸 면회를 가며 반복적 질문을 해댈 뿐이다. "좀 어때요?" 수술 이후 재발할 수도 있기에 항암치료와 더불어 다시금 하반신 신경을 살려야 하는 재활운동은 꽤 타이트하게 진행되며 사람을 고되게 한다. 세상, 긍정적인 아버지 마저도 가끔은 지친 기색을 보인다. 엄마도 병실 옆 간이침대에서 지낸지 5개월 차를 맞이하였다. 재활 속 분단된 가족이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아버지는 연말정산, 연금수령 등 본인이 직접 처리해야 하는 행정업무 등이 쏟아져오자 난처해져버렸다. 난 이 시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이전까지 인터넷뱅킹, 금융인증서 등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가방 속 가족관계증명서는 필수 아이템이 되었고 대리인 자격으로 업무처리를 하다 비효율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나기 일수였다. 터벅터벅 돌아오면 아파트 공과금 납부부터 자동차보험까지, 멀리 떨어져 재활의지가 충만한 환자로, 또 그를 성심성의껏 간병하는 간병인인 부모가 병원을 나와 상시처리할 수 없는 업무를 담당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직면하고 있다. 오늘 또한 기타 이유로 본인인증 절차 등을 거치며 혼자 내뱉은 말은 "와,, 이거 진짜 시니어들은 도저히 혼자 적응을 못하면 살기 더 어려워지겠는데?"였다. 스마트폰으로 전화만 쓰다 카톡으로 겨우, 요새 정치난장판 이외에는 사용자층이 없는 페이스북도 눈팅 정도 겨우, 그리고 유튜브 시청 정도만 가능한 수준인 시니어들에게 발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는 발만 빠른 정도가 아니라 총알속도 그 이상이다. 시니어들의 디지털 리터러시가 미래역량으로 제시되어야만 반드시 생존을 할 수 있다. 성장을 하기 위한 역량이 아니고 생존을 할 수 있는 역량, 즉 삶의 행복감과 직결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아버지가 요청한 일은 비효율이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결국은 해내고 만다. 두번, 세번을 계속 해서라도 하면 된다. 왜냐하면 내 부모이고 나는 그들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가족공동체가 가지는 부채의식, 책임감, 연민과 존경심이 수십년 간 쌓였기에 그 어떤 이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이 "가족"이다. 다만, 향후 미래사회에서는 가족공동체이란 존재가 약해지고 느슨해질 수 밖에 없다. 핵가족화를 넘어선 작년 4분기 출생률 0.65란 숫자가 말해주듯이 비혼, 개인주의로 가족공동체 자체의 무성립이 더욱 득세하고 만다. 즉, 앞서 말한 나를 부모와 동일한 수준으로 느끼는 자녀를 보유할 확률이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서 만약 내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 된다면 내 삶의 행복감은 온전히 디지털 리터러시의 체결강도에 따라 결정될 수 밖에 없다. 최근, 대안으로 사회적돌봄 등을 위해 사회적가족 등을 언급하지만, 그리고 나 역시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그 관계성이 앞서 말한 내가 거동이 불편한 상황에서 위와 같은 상황들을 척척 채결해줄 수 있는지는, 또는 비효율을 결국 뚫고 모두 해내고야 마는 의지 생성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느슨한 상호호혜적 관계망이 핵심이기에 관계성의 끈끈함은 전통적 가족공동체에 비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기존 전통적 가족공동체를 지킬 수 있다면 지키며 사회적가족 제도가 보완될 분야에서 보완되는 것이 결론적으로 궁극적 사회적돌봄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독고다이 인생을 확실하게 살고 싶다면 정말 어느 시대에 비추어봐도 압도적 디지털 역량만 있다면 일단 삶의 행복감이 최소한으로 유지될 순 있을거다. 하지만 다소 비현설적이다. 이런 고민을 넘어 고뇌를 최근 수없이 하며 분단된 가족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아버지의 재활이 언제 끝날지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낙천적인 분이기에 희망을 가지며 다시금 두다리로 땅을 딛고 걸을 수 있는 아버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엄마, 그리고 졸업 후 늦깍이 대학 입학이 우리 가족에게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왔으면 한다. 그렇다면 나도 이 시기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기로 기억하며 삶을 더 풍성한 감정선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이 시기가 내 서른여섯살 초반을 장식하며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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