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직장생활기
“K가 피해자인 건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어쩔 수 없잖아. 막말로 우리가 다 나가? 얼마 전에 첫 애 생긴 B 입장은 생각 안 해 봤어?”
사내연애를 하던 K와 D의 결별 소식이 알려진 뒤, 회사는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두 사람은 같은 영업팀 소속이었다. 선임이었던 D는 K의 입사 후 줄기차게 매달려 연애를 시작했고, 이내 삐걱였다. 두 사람은 사내연애를, 아니 그냥 만나서는 안 될 사이였다. D는 부족한 자기 확신을 연인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했고, 그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여지 없이 돌변했다. 팀원 앞에서 K에게 소리를 지른 뒤 ‘공과 사를 구분하려 했다’는 변명을 늘어 놓은 것도 수차례, 결국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제가 생긴 건 회식이 끝난 어느 날 밤이었다. 소문마다 내용은 조금씩 달랐지만 큰 맥락은 다르지 않았다. K와 다른 직원의 관계를 의심한 D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폭언, 혹은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 경찰이 회사를 드나들기를 수차례. 결국 인사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두 사람은 분주하게 그곳을 불러다녔다.
정작 회사를 떠나게 된 것은 K였다. (1) 연애는 두 사람의 일이므로 회사가 관여할 것이 아니며, (2) 이로 인해 생긴 폭력 또한 회사와는 무관한 일이고, (3) 이런 사적인 일로 그간 회사에 많은 기여를 한 D를 내보낼 수 없다는 입장으로 정리됐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건 사실상 K를 내쫓는 일’이라며 수근댔지만 정작 아무도 나서서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나 제2의 K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K가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나는 날, 나는 트롤리 딜레마를 생각했다. 학부 1학년 시절 수강한 심리학 입문 수업에서 들은 이론이었다. “전차가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어요. 전차가 가는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묶여 있는 상황입니다. 전차가 가지 않는 반대편 선로에는 한 사람이 묶여 있죠. 여러분이 선로 밖에서 이 상황과 마주했다고 생각해 보죠.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선로전환기를 당기면 돼요. 하지만 그럼 반대편 선로에 있는 한 사람이 죽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싶나요?”
나를 포함해 강의실의 꽤 많은 사람들이 ‘레버를 당겨야 한다’는 데에 손을 들었다. 교수님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용을 조금 바꿔보죠. 전차가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어요. 아까와 마찬가지로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묶여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옆에는 전차를 멈출만큼 아주 무거운 사람이 서 있습니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선로 위로 밀쳐서 그 무게로 전차를 멈추게 하는 것인데, 이 경우 전차는 멈추게 되지만 그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이 상황에도 여러분은 한 사람을 희생하는 선택을 할 건가요?”
강의실 내부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레버를 당겨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손을 내렸다. 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교수님은 재차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트롤리 딜레마는 이런 식으로도 변형이 가능합니다. 우선 첫 번째 사람을 살펴보죠. 그는 최빈국에 사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느날 노숙자 소년을 어느 장소로 데려다 주는 대가로 1000달러를 받았어요. 소년을 데려다 준 뒤, 뒤늦게 그게 인신매매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냥 개의치 않았죠. 우리는 아마 이 사람을 ‘나쁜 놈’이라며 손가락질할 거예요.
반면 두 번째 사례는 선진국에 사는 어느 중산층의 이야기입니다. 그도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이 소식을 듣고 ‘나쁜 놈!’이라며 첫 번째 사례의 사람을 욕했죠. 그리고 그는 새로 나온 1000달러짜리 스마트폰을 샀어요. 이 순간에도 최빈국에서는 여전히 1000달러를 주고 받는 인신매매가 성행하고 있고, 만약 그 사람이 스마트폰을 포기하고 1000달러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지만 말이죠. 어떤가요. 자신의 선택이 간접적 혹은 직접적이라는 이유로 그 선택의 경중이나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고 싶나요?”
스무 살의 나는 그런 상황이라면, 그리고 내가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절대 그 중산층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아니, 나는 왜 조금도 변하지 못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