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선배는 다 어디로 갔을까?

철학적 직장생활기

by 이준형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오랜만이다 야. 잘 지냈지?”


새로 이사한 선배의 집은 선배만큼이나 군더더기 없고, 또 따뜻했다. 모난 곳 없이 하얗고 말끔하게 칠해진 벽과 천장, 필요한 것들은 모두 준비되어 있지만 결코 과하지는 않은 가전과 가구들, 처음 오는 사람이라도 용도를 알 수 있을 만큼 잘 정돈된 방들까지. “선배, 집 너무 예쁜데요? 꼭 선배 같아요.” “너 온다고 급하게 치웠어. 평소에는 애들 본다고 아주 난장판이다 야.” 선배는 특유의 쿨한 화법으로 대답하며 내 멋쩍은 칭찬을 넘겼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역시나 아이였다. 올해 미운 일곱살이 된 첫째가 얼마나 말을 안 듣는지, 게다가 말귀 알아듣는 영악함까지 더해져서 얼마나 귀찮게 떼를 쓰는지,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갓 100일을 넘긴 아이는 밤에도 두 시간마다 깨는데 나와 남편이 며칠째 잠을 못자고 있는 상황인지 등등. 선배는 “그래도 첫째 기를 때랑은 다르게 사소한 문제들은 넘겨버리게 되더라고”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선배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의 꽃으로 주목 받는 음성학 분야를 연구한 뒤 글로벌 IT업체에서 근무한 재원이었다. 본인은 매번 별 거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선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선배가 얼마나 치열하고, 또 치밀하게 미래를 준비해 왔는지를.


선배의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한 건 아이를 낳은 뒤부터였다. 과정은 꽤 시시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육아에 대한 부담과 ‘당분간’이라는 합리화와 함께 아내가 퇴사를 선택하는 맞벌이 부부의 선택.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당분간이지 못한’ 당분간. 그 사이 경력, 직급 등 여러 면에서 치고 나가는 동기. 그리고 정체된 자의 불안까지. “요즘 다시 알아보고 있긴 한데 잘 모르겠어. 가까스로 면접에 올라가도 일단 갓 태어난 아기가 있다고 하면 반응이 싸해지더라고. 이러다 그냥 계속 아이만 길러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야.” 늘상 유쾌하던 선배의 표정이 이때만큼은 조금 무겁게만 느껴졌다.

“정의의 원칙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선택된다.”

1980년 어느 날, 뮌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오디션이 열렸다. 이날 응시자 중엔 앞서 10번 가까이 오디션에서 탈락한 트롬본 연주자가 있었다. 이름은 아비 코난트. 그는 당시 보기 드문 여성 트롬본 연주자였다. 트롬본은 남자가 더 잘 연주한다는 막연한 편견이 존재하던 시기. 어쨌거나 오디션 연주가 시작되었고, ‘이번에도’라는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심사위원 전원의 전폭적인 동의로 합격이 결정된 것이다.


비슷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한 유명 기업에서 채용을 실시했다. 경쟁률은 약 40대 1.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경쟁률이었다. 마케터, 에디터, 통계 전문가, 통번역가 등 다양한 직군이 포함된 당시 채용 결과는 놀라웠다. 선발 인원 전원이 여성이었으며, 명문대 출신이 아닌 경우도 3분의 2에 달했던 것이다. 이는 남성 SKY 출신 합격자 비율이 6~70%를 상회하던 기존과 크게 어긋나는 결과였다.


시기도, 장소도 다른 두 채용 과정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블라인드 오디션’ 방식을 통해 합격자를 선발했다는 것이었다. 20세기의 도덕철학자 존 롤스는 이런 공정한 결과를 얻기 위한 핵심 요소로 ‘운의 중립화’를 말했다. 운의 중립화란 삶의 출발선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규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출신 지역과 성별, 빈부격차 등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 우연하게 주어진 조건을 배제하고 경쟁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


그는 운의 중립 상태를 만들기 위한 조건으로 무지(無知)의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운이 돌아가도록 만들 수 있는 요소를 모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지의 장막’을 고안했다. 무지의 장막이란 블라인드 오디션과 유사한 구조다. 학력이나 성별 등을 배제하고 평가해 실력 있는 인재를 선발한 것처럼,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무지의 장막을 치고 평등한 조건에서 토론해 정의의 원칙에 걸맞은 합의를 이끌어내자는 아이디어이다. 즉, 그는 정의가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신념이 아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선배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선배의 집을 나서며 채용 소식을 전했던 기자의 의미심장한 마무리를 떠올렸다. “만약 블라인드 오디션이 아니었다면, 이들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요? 경기불황으로 차가웠던 지난해 고용 시장에서, 여성 취업자는 남성 취업자 대비 1.75배나 많은 14만 명이 감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