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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Apr 02. 2024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이소진_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3월부터 작정한 건 아니지만, 읽다보니 000~ 여자들의 책들을 읽고 있다. 3월에는 <일하다 아픈 여자들>, <인생 샷 뒤의 여자들>, <재가 된 여자들>을 읽었고, 4월의 첫 날에는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을 읽었다. 90년대생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를 대중서로 출간한 이 책은 사용하는 SNS(페북)에서 자주 보았던 책이라 궁금증이 있었다. 왜 청년여성들은 ‘증발’하고 싶어 하는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일어나는 가족이란 이유로 옭아매는 통제와 착취, 성차별. 더 이상 결혼으로 노동불안정을 없애려 하지 않는, 그러나 성차별적 노동 시장의 현실 속에서 이들의 생애 전반으로 넓어진 노동 위험 확대의 불안한 삶. 신자유 페미니즘과 공정, 능력주의란 이름으로 가려져 스스로를 혐오하고 자책하는 삶. 청년여성을 불안하게 하고 우울을 갖게 하고 자살사고, 증발하고 싶게 하는 이유들은 너무 전방위적으로 존재한다. 사실 자살생각을 일상적으로 갖지 않고 살아온/살아가는 나에게 이 책은 나와 같이 계급과 젠더의 교차로에서 삶의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청년여성들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다르고, 나 역시도 이해하지 못하며 어떤 누군가를 흘려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한 감각의 책이기도 했다. 나의 원가족을 포함하여 나의 주변에는 삶은 살만 한 것, 살고 싶은 것이라 여기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물론 나 역시 삶은 지리멸렬한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고). 어떤 장면들에선 그래서 가슴이 시리고, 찔리는 아픔 같았다. 삶의 내내 가난과 가까웠고, 부모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이혼을 하고 돈이 없어 대학을 바로 가지 못했던 나에 대해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들이미는 성과중심주의가 없었던 과거의 삶은 가난한 삶과 맞물려 다행스럽게도 서로를 녹이는 무엇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사회에서 이런/지금 나는 뒤처지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 분명할 듯하지만. 살면서 죽고 싶다 생각해본 적 없던, 그런 나에게도 수년 전 죽고 싶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버스에서도 울고, 집에 와서도 엉엉 소리 내 데굴데굴 울면서 어둠 속에 존재하는 것 같았던 적이 있었다. 늘 인생은 살기 어려웠으나 살고 싶었던 나에게 내가, 나만이 온전히 만들지 않은 무지막지한 빚의 무게가 감당이 되지 않아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한, ‘증발’에 대해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그 시간동안 나에게는 많지 않아도 적어도 불안하다 여겨지지 않았던 고정적인 임금노동 공간이 있었고(그러나 그 공간 역시 불안의 요소가 될 때 삶의 비루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눈에 띄게 사라지지 않아도 늘어나지 않았고, 부모와 독립된 공간에 살았고, 부모로부터 함부로 대해지지 않았고, 주변에 곁들이 있었다. 이런 요소들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요소들 중 하나하나이지만, 누구에게나 존재하지 않고, 불안한 노동환경과 옭아매는 원가족과 드러낼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는 관계망 속에서 당신이 아는 그 청년여성은 증발의 꿈을 꾼다. 그의 이 꿈은 희망적인가? 도망갈 곳도 없이 이 끝을 선택이라 붙일 수 없으나 선택하게 되는 이들의 삶은 누구의 책임일까. 이것은 성별화된 사회문제이다. 사회적 고통이다. 저자의 에필로그 제목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당신의 탓이라고, 몫이라고 자책하는 수많은 크기에서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몫이다. 열심히 사는 당신이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기를. 그리고 열심히, 란 기준이 무너지기를. 열심히 살지 않아도 당신이 안전하고 불안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기를. 살아갈 수 있기를.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 이소진 지음, 오월의 봄


p8-9 나는 내 실패가 전적으로 내 잘못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규정짓던 실패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죽고 싶다는 마음은 때때로 나를 잠식했지만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살에 대한 생각은 옅어져갔다.


p10-11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 모든 걸 계획하고 선택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선택지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부모세대와는 다르다. 매 순간이 선택이다. 우리는 선택이 많아진 만큼 자신의 선택에 따른 위험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어서, 대학에 가고 싶어서 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개인의 책임으로 여겨진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준화된 경로에서, 이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된다' 표준화된 생애경로는 모두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명문대를 자퇴하는 학생들이 유명해지는 까닭은 그들의 선택이 표준화된 경로로부터의 과감한 이탈이기 때문이다. 명문대라는 이력에 따라올 혜택을 거부하 고 자신만의 길'을 선택했다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명문대를 자퇴하는 이들을 향한 사회적 관심은 어찌 됐든 이들의 손에 명성을 쥐여준다. 이런 식의 선택이 가능한 이들은 누가 뭐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등록금을 책임질 여유가 없어 스스로(?) 대학을 그만두는 사람들의 중단은 주목받지 못한다.


p12 그러나 우울, 불안 등의 정동은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적 고통, 즉 사회적 구성물이기도 하다. 고통을 경험하는 주체가 개인이라 하더라도 사회적 관계에 의해 고 통은 재/구성되기에 한 사회 내에서 개인의 위치와 그에 따른 의무나 역할 등은 사회적 고통의 다층적 경험을 야기한다.


p14 우선, 낮은 사회경제적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자살에 가장 취약하다.!" 사회경제적 집단이 낮을수록 (당연하게도) 실업률, 교육적 불이익, 빈곤율이 높아져 자살위험이 상승한다. 빈곤은 여러 영역에서의 위험을 발생시키는데 이 위험은 중첩되며 축적된다. 또한 자살률에는 성별화된 패턴이 존재한다. 서구권의 경우, 일반적으로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에 비해 2배에서 4배가량 더 높지만,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역전 현상도 관찰된다. 중국의 경우 남성보다 여성의 자살률이 더 높으며, 인도는 비슷한 비율을 보인다. 중국의 자살은 주로 농촌 지역에서 농약 섭취의 형태로 시행되는데, 이는 가족과 국가가 여성을 규제하는 정도가 농촌지역일수록 높기 때문이다.


p51 부모의 폭력은 반드시 물리적 폭행이 동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녀의 삶에 위협이 될 수 있다.


p90-91 보육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직장 내 괴롭힘이 이처럼 만연한 까닭은 어린이집 원장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가 활발하여 이러한 분위기가 산업 전반에서 통용되기 때문이다. 한 번의 문제 제기가 다른 어린이집으로의 취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에서 보육교사들은 원장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다.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환경은 이들의 지위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전문대를 중심으로 매년 배출되는 신규 노동력의 존재는 해고해도 괜찮은 노동자로 이들을 위치시킨다.


p125 이러한 상황에서 하경이 느끼는 '불안'은 막연한 감정이 아닌 구체적인 정동으로 자리잡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에서 '고졸'이라는 그녀의 학력과 그로 인해 제한되는 일자리는 ‘1인 가구'로서의 생존 가능성을 비관하게 만든다. "좋은 데를 가려면 너무 애매"한, 경력이 안 좋은 경력은 아닌데 또 좋은 경력은 아닌" 지금의 경력에서 하경은 스스로의 삶을 '전전하는 삶'으로 의미화한다.


p127-128 이처럼 청년여성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여성집중직종으로 드러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적 구조는 청년여성들의 능력이 임금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개입해 저임금을 유발한다.


p135 민간 노동시장에 잔존하는 성차별적 구조를 목도한 민준과 지혜가 결국 공무원 시험을 선택했다는 점은 청년세대가 공정함의 척도로 '시험'이라는 카드를 선택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3년간 시험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민준과 일과 병행해야 하는 지혜의 상황은 시험도 그다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방증하지만 이 정도의 불공정은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며 이를 만회할 '노력'이라는 개인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민준이나 지혜가 경험한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실상 없다. 남성 노동자에 대한 선호 앞에서 여성들의 노력은 무화된다.


p139 청년여성들의 서사에서 능력은 성차별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되지만, 능력의 인정이 성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능력주의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오히려 존재의 불안정을 가중한다.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들은 성차별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계급상승을 위해 자기 자신을 개선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자아실현 담론과 능력주의는 조직의 입장에서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작동한다.


p143-144 그러나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언어인 '능력주의'는 차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없는 허구적 기획이다.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일환으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야기된 실패를 개인의 무능력으로 포장하여 도덕적 멍에를 씌우 는 역할을 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는 '노력'이라는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되고 은폐되며 성공하지 못한 나머지 '잉여'들은 실 패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목소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가부장적 사회제도 아래에서 능력주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 적 구조를 비가시화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개인으로 호명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능력을 개인이 아닌 집단의 특성을 기반으로 측정하는 이중적인 체계로 기능한다? 즉,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성불평등한 분배구조를 지우고, 여성을 마치 남성과 동일하게 능력에 따라 평가받는 개인으로 포장 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실상 여성이기 때문에 분배에 차등을 두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 것이다.


p146 정리하자면, 능력주의는 결코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 등의 구조적 차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여전히 많은 청년여성은 이러한 구조적 차별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의미화한다. 능력은 이러한 차별 위에서 재정의되며, 따라서 이러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혹독한 기준이 적용된다. "여자애들은 공부를 안 해서, 그만둬서, 끈기가 없어서"라는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자행되는 노골적인 성차별은 "내가 잘해야겠다. 그래야 후배들한테도 이런 편견이 안 내려가니까"라는 결말로, 채용에서의 불공정은 “내 가 시험을 정말 압도적으로 잘 치면 안 뽑을 수 없겠지. 다음에 잘해야지"라는 다짐으로 귀결되고 있다.


p163 정리하자면, 참여자들이 모두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실함만으로 성과를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성공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치료 담론의 범람 속에서 이들의 성찰은 스스로에게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느끼게 하였으며, 이러한 생각 속에서 청년여성들은 현실의 도전이나 문제 해결을 회피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유예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회피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 으므로, 결국 이들은 언제가 됐든 그러한 결정을 하는 자신의 문제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 모든 문제의 원인은 또다시 게으르고 나태한 '나 자신'으로 되돌아와 "내가 원하는 대 로 못 살 바에야 죽는 게"(재윤) 나은, "노력과 노동이 없는 죽 음이 편해 보이는" (윤미)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p170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어 1998년 이후 노동시장에 진입한 세대에서는 학력에 따른 계급화 경향이 관찰된다. 고졸여성의 사례에서 취업보다 결혼을 우선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 당시만 해도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진 청년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노동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전략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금의 여성들은 그러한 생애주기 이행을 거부한다. 결국 노동위험은 생애 전반으로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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