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볼까 시리즈 ] 02 어스맨
공정무역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무역이 아니에요. 생산자들과 저의 차이란 고작 그들은 저쪽 지구마을에서 태어났고, 저는 이쪽 지구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것뿐이죠. 우리는 동등한 높이의 선에 서 있습니다. 물건을 교환할 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생산자도 판매자도 똑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 즉 어스맨입니다.
당신을 일 년에 투표를 몇 번 할까? 사회에 당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인 ‘투표하기’는 많아도 일 년에 열 번이 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당신이 일 년에 하는 소비는 몇 번일까? 백 번? 천 번? 만 번? 아마 정확히 세기도 어려울 만큼 잦을 것이다. 현대인은 호모콘수무스(Homo Consumus)라 불릴 만큼 소비를 많이 하지만 소비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행위로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무엇을 사느냐는 분명하게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느냐, 어떤 가치를 옹호하느냐를 드러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갑 열기는 내가 사회에 보낼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다.
공정무역 제품을 소비하는 것 역시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는 한 방법이다. 노동을 착취하는 회사의 제품 대신 공정무역의 제품을 선택한다는 건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뜻을 담은 하나의 투표다. 서울혁신파크는 입주단체와 함께 각 단체가 꿈꾸는 미래를 독자에게 제안하는 <해볼까?> 시리즈를 만들고 있다. 두 번째로 소개할 곳은 공정무역 제품을 파는 ‘어스맨’이다. 어스맨과 함께 공정무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어스맨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어스맨은 공정무역브랜드입니다. 저희 회사 브랜드 로고에 보따리를 짊어진 보부상이 있어요. 보부상처럼 어스맨도 지구에 있는 마을과 마을 사이에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라는 의미죠. 보부상이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이었을 뿐 아니라 마을간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었듯 어스맨도 다양한 지구마을의 물건과 이야기를 전하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적경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공정무역이란 단어는 낯설고 모호하다. 무엇을 어떻게 공정하게 거래한다는 것일까? 최희진 대표의 입으로 들어보자.
-공정무역이란 무엇인가요?
제품의 생산과정에서 생산자들에게 노동에 대한 적당한 대가가 돌아가고, 이 거래를 통해 생산자들의 역량이 강화되는 방식의 무역이에요. 공정무역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제품 생산자들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해야 한다는 원칙도 있어요. 아동노동이 없어야 하고, 노동환경도 성차별이 없고 친환경적이어야 한다는 등 여러 기준이 있습니다. (인증 기준이 있는 걸까요?) 인증 기관이 여러 곳이 있죠. 가장 대표적으로는 WFTO(세계공정무역기구)나 FLO(국제공정무역상표기구) 같은 기관이 있어요. 그렇지만 인증을 꼭 받아야만 공정무역인 건 아닙니다. 생산자와 거래자가 공정무역의 원칙과 철학에 맞게 제품을 생산하고 유통한다면 그것도 공정무역이죠.
-공정무역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소비라는 편견이 있는데요.
먼저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은 그들이 정말 가난한가입니다. 제가 처음에 공정무역 생산지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가장 놀랐던 점은 그들이 가난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캐시 푸어(현금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가난을 단순히 경제적 수입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것 같거든요. 이들은 자연 자원을 생활 자원으로 바꾸는 기술이 있고, 자연과 공생하고 사람들과 나누는 마음이 있어 행복하고 풍요롭습니다. 마음이 넉넉해요. 그 공동체 안에 있다 보면 전혀 빈곤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죠. ‘가난한 사람 돕는 무역=공정무역’이라는 도식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어스맨이 공정무역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까지 같이 전하려고 하는 데는 이런 오해를 풀고자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단순히 가난한 이들을 돕는 착한 무역이 아닌’이라는 소개에서 시혜적 태도에 대한 경계가 느껴집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과 지속가능한 삶을 확산시킨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스맨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초기에 공정무역의 캐치프레이즈도 Trade-Not-Aid(원조가 아닌 거래를)였어요. 누군가를 돕는 원조 방식에서는 도움 받는 사람을 수동적 존재로 보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공정무역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입니다. 다만 기존 거래가 힘 있는 사람이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고 있었던 거라면, 공정무역은 동등한 관계에서 파트너십을 맺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생산자의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거죠. 경제적으로 소외되었던 개도국의 소규모 생산자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거래인 거죠.
공정무역은 소규모로 다양한 품종을 만드는 농부들과 거래를 하다 보니 공장식 대량 생산 기업의 제품에 비해 가격이 비쌀 것 같다. 실제로 공정무역 관련 제품은 비쌌던 기억이 났다. 공정무역 제품은 정말 비싼 걸까?
-공정무역 제품은 비싸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해주실 말이 있으실 것 같아요.
공정무역 제품이 비싸다고 이야기할 때 보통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제품과 비교하세요. 예를 들어 공정무역 초콜릿이 가나 초콜릿보다 비싸다는 거죠. 그렇게 비교하면 비싸다고 느껴질 수 있죠. 공정무역 제품은 소규모 생산자들이 만들기 때문에 대규모 가공공장의 제품에 비해서 생산성이 낮아요. 그렇지만 공정무역에서는 노동권리나 자연보호 같은 지켜야 할 가치들에 대한 비용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일반 제품보다 좀 더 비쌉니다. 하지만 공정무역 제품이 대개 친환경, 유기농 제품임을 고려했을 때는 친환경 제품군들에 비해 쌀 때도 많아요.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익의 일부를 공동체에 환원하면 다른 기업에 비해 경영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가요?
공정무역 브랜드 회사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영리기업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영리 기업은 최대한의 수익을 발생시켜 주주 같은 이해관계자들에게 돌려주는 게 목적이지만, 사회적기업 목적이 이익의 극대화가 아니니까요. 사회적 기업의 존재이유는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고, 기업으로서 지속할 수 있는 수익이 발생하면 되기 때문에 불리한 원가구조에도 불구하고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공정무역 제품에 대한 또 다른 오해가 있을까요?
품질이 좋지 않다는 편견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공정무역이 시작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인데 제품 종류도 많지 않고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그때는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조차 낯설었을 때니 초기의 공정무역 단체들 모두 고군분투했을 거 같아요.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제품 종류도 굉장히 다양해지고 시장경쟁력도 갖추게 되었어요. 세계적으로 공정무역 시장이 11조 정도라고 해요. 비싸기만 하고 제품이 좋지 않으면 시장이 이렇게 크게 유지될 리 없겠죠? 편견을 버리고 도전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공정무역 제품이 내게 좋은 게 뭘까? 공정무역 제품을 구매해서 내게 직접적으로 좋은 점은 없는지 궁금했다.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소비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도 좋지만, 보다 직관적이고 빠른 피드백에도 목이 말랐다. 공정무역 제품은 누가 사고, 그 제품을 사면 뭐가 좋을까?
-보통 어떤 분들이 어스맨의 제품을 구매하시나요?
제품별로 고객층이 달라지는데요. 어스맨 건과일 같은 경우에는 아기를 가진 부모들이 많이 찾습니다.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믿고 아이에게 먹일 수 있는 거죠. 건강을 신경 쓰는 사람들도 건과일을 지속적으로 구매하세요. 유니크한 제품을 찾는 작가들, 패션을 신경 써야 하는 스타일리스트들이 수공예품을 찾기도 합니다. 수공예품은 라오스에서 직접 재배한 목화로 만들어져요. 염색과 베틀까지 모두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생산성은 낮고 원가는 높지만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제품이 되죠.
-공정무역 제품을 사면 고객들은 어떤 점이 좋은가요?
소비자들에게는 선택권이 넓어져요. 예전이라면 시장에 소개될 수 없었을 제품을 공정무역브랜드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까요. 파키스탄의 공정무역 농부들은 다품종 소량생산을 합니다. 한 집에 가진 체리나무가 두 세 그루 뿐이에요. 한 명이 일 년 동안 재배하는 건체리가 10kg이 채 되지 않아요. 그런 체리가 시장에 와서 거래되는 게 놀라운 거죠. (소비자들이 이 제품은 안전하다라고 믿고 살 수 있는 것도 장점일 것 같아요. 소비자들에게 어디까지 제품 제작 과정을 공유하시나요?) 저희 브랜드 모든 제품의 뒷면에는 큐알코드가 있어요. 큐알코드를 통해 접속하면 이 제품은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 생산자는 어떤 사람인지, 생산환경은 어떤지 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공정무역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모두 행복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중간 유통상인인 보부상들은 어떨까? 그들도 행복해졌을까? 최희진 대표가 어스맨을 계속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대표님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일반 기업을 다니시다가 공정무역 사업에 뛰어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더 행복해지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일반 기업을 다닐 때는 100%로 행복하지 않았죠. 20대 후반에 퇴사하고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지구 구석구석을 다녔어요. 그 시기에 라오스에 있는 공정무역 회사에 프로젝트 인턴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공정무역이 생산자 개개인에게 작지만 단단한 임팩트를 만들어가고 있는 걸 봤죠. 이후에 한국에 돌아와 어스맨을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9년 전이네요.
흔히 ‘옳은 일’이라 여겨지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쉽게 자신을 정의로운 히어로로 상상하고,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혜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공정무역은 ‘가난한 생산자’들을 위한 ‘착한 봉사’가 아니며, 공정무역으로 만들어가는 사회는 우리가 함께 누릴 미래다. 공정무역에서는 불쌍한 사람을 돕는 슈퍼맨이 없다. 다만 어스맨이 있을 뿐!
인터뷰 ㅣ박초롱 (딴짓매거진 편집장)
영상 촬영 편집 ㅣ요지경필름
사진 ㅣ서울혁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