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나는 우리 애들 부엌에 발도 못 들이게 했어.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우리 어머님은 적어도 나와 같이 살기 전까지는 매우 열린 시어머니였다. 예를 들어 집안일에 관해서라면, 집안일이란 게 본인이 오랜 세월 직접 해보니 생각보다 힘을 많이 요하더라, 그러니 항상 힘이 더 세고 튼튼한 남편을 써먹어라 말씀하셨던 분이다.
우리 집의 집안일 비중을 말하자면, 남편은 청소를 못하고 요리를 잘한다. 그래서 요리의 80프로는 남편이, 청소의 70프로는 내가 하는 편이다. 남편이 요리를 하면, 뒷정리는 보통 내가 한다. 청소 빨래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지만 그런 건 보통 내가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남편이 하더라도 꼼꼼하지 못하여 내 손이 한번 더 가기도 하고, 처음부터 내가 하기도 한다. 대신 남편은 요리를 잘하고 즐기니까, 그 부분은 온전히 맡겨둔다. 잘하는 부분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기도 하고 서로 부딪힐 일도 덜어주기 때문이기도 하고.. 뭐 어쨌든 내가 요리에 소질이 없지는 않으나, 남편이 하는 걸 맛있게 잘 먹고 칭찬도 많이 해주는 게 나름대로의 부부 사이를 즐겁게 유지하는 우리만의 규칙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머님은 요리에 진심이신 분이다. 다양한 식재료를 사면서 기쁨을 느끼시고, 본인이 하신 음식에 자부심이 있으며, 매일매일 새로운 요리를 하시는 것이 몸에 밴, 드라마에서 볼 법한 큰 손 어머니 타입이었다. 사실 우리 엄마가 그런 타입이 아니라, 맛깔스럽고 다양한 반찬을 해주시는 어머님이 항상 고맙고 대단해 보일 때가 많았다. (이 또한 같이 살기 전까지 … 였다. 이 부분은 또 나중의 에피소드에서 다루어 보겠다.)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신다고 해서 남편이 바뀌어야 할 부분은 없었다. 일찍 퇴근한 날이나 주말에 남편은 꼭 주방에 섰고, 여러 가지 음식을 해 보였다. 볶음밥 떡볶이처럼 쉬운 요리부터 가끔 닭개장 불고기 탕수육 갈비찜 같이 어려운 요리도 하긴 했다. 어머님 요리를 먹고 자랐으니 어머님의 맛 비슷하게 흉내를 낸, 꽤 먹음직한 음식이었다.
처음에 주방에 선 남편을 보고 어머님은
“얘가 뭘 할 줄 안다고~” 하시며 애매한 실소를 내보이셨다. 남편을 써먹으라던 어머님은 어디로 가신 건지.. 늘 주방에 서는 남편의 모습을 마뜩잖게 바라보셨다.
내가
“리리 아빠 생각보다 잘해요 어머님~” 하고 받으면
“글쎄, 나는 얘가 해주는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데 … 뭘 할 줄 알겠니, 얜 아무것도 할 줄 몰라~“
라고 하셨다.
이후로 몇 번의 아들이 해주는 음식을 같이 먹어 놓고도, 저 대화의 패턴은 반복되었다.
‘왜 그러시는 걸까, 남편이 나를 위해 음식을 하는 게 못마땅하신가 …’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기를 여러 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화 끝에 “잘했어, 요즘엔 남자도 같이 해야 하는 세상이야~ 보기 좋아 난 이런 게 훨씬 좋아”라는 말씀도 꼭 곁들이셨다.
무엇이 진심인지 모를 상황이지만 크게 신경쓰일정 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여느 때처럼 어머님의 그땐 그랬지 수다 삼매경에 장단을 맞춰드리던 차였다. 갑자기 남편의 요리 실력이 옛날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어머님이 한마디 툭 던지셨다.
“나는 우리 애들 어릴 때부터 부엌에 발도 못 들이게 했어.”
여기까진 괜찮았다. 뭐 그 시대 흔한 일이니까.
우리 집(친정)은 그 시대 답지 않게 아빠의 가사 참여도가 엄청 높았던 터라, 그런 얘기도 가끔 같이 하곤 했던 터다. 나는 아빠가 어릴 때 간식도 많이 만들어주고 해서 진짜 너무 좋았다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 한테도 아빠가 요리하는 건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고.
그런데 그 이후에 붙이신 말..
“남자가 부엌에 서면 능력을 못 펴고 기죽어 살아야 해. 그래서 나는 우리 애들 절.대.로 부엌에 못 들어오게 했어. 부엌 들락 거릴 시간에 공부해서 능력 키우고 돈 많이 벌어서 기죽지 말고 여자를 부리고 살라고 했지. “
너무 놀랐다. 여자를 부린다는 말도, 기죽어 산다는 말도, 단어 하나 하나 되짚어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어머님이 해오시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기에 이상했고, 그 말을 왜 지금 남편도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하시는 건지 그 의도조차 모르겠다. 되 받아치기를 잘하는 나이지만, 말문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하하하 웃음 아닌 글자 소리만 내고 말았다.
그땐 그랬지로 포장된 진심이었을까? 추억을 곱씹으며 우스갯 이야기로 하기엔 너무 생뚱맞고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로도 서너 번,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 꼭 그땐 그랬지 하다가 툭 튀어나왔다.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만.
보통은, 내가 알던 어머님의 모습이다.
남편이 가사를 같이 하면 잘한다고 하시고, 설거지든 요리든 나에게 크게 시키시지 않는다. 퇴근 후 이것저것 열심히 집안일을 하면 피곤하니 가서 쉬어라는 말도 자주 하신다. 내가 힘들까 봐, 청소도 아이들 뒤치다꺼리도 미리 해두신다.
그런데, 아직도 저 말은.. 잘 모르겠다. 나에게 난제로 남아있는 대화 중 하나이다.
아들내미 잘 키워놨더니 힘들게 일하고 와서 집에서까지 주방일을 하는 게 마뜩 찮으신건지, 그 원망이 혹여나에게 향해있는 건지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남편한테 따져 묻기도 했다.
“어머님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나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야? “
남편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머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우리의 생활 패턴이 바뀌지는 않는다. 남편은 여전히 요리를 많이 하고 집안일 참여도가 높은 편이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고맙지만, 다정하고 가정적인 그가 예뻐서 고마운 것일 뿐이지 아이쿠나 귀하신 몸이 도와주셔서 황송한 그런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부엌일을 시킬 것이다. 아들이든 딸이든 제 밥 정도는 스스로 차려 먹을 수 있게 가르치고, 뒷정리도 스스로 하는 게 당연하도록 말이다. 부엌에 들어가는 데는 남녀가 없다. 누가 누구를 부리는 것도 아니며, 그저 나중에 배우자가 생기면 같이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저절로 익히게끔 하고 싶다. 우리 아이들은 다행히 아빠도 요리를 하고 엄마도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내 며느리건, 내 사위건 가사를 할 때, 서로가 잘하는 일을 니일 내일 나누지 말고 도란도란 같이 해나가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때 나는 말해야지.
“예전에 네 아빠도 요리를 참 잘했어.”
뒤틀린 그땐 그랬지가 되지 않도록, 불순한 의도가 담기지 않도록, 담백하게. 간결하게. 아니면 아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