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그라파 나지오날 플렉스 시나몬 사용기
닙의 측면 중간 부분에는 절개가 있고, 둥근 홈이 양쪽으로 파여 있다.
이 절개는 단지 장식이 아니라 분명한 기능의 언어이다.
닙이 휘어지는 탄성을 스스로 허용하게끔 설계된 구조,
말하자면 필기라는 행위 속에서 인장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의도된 틈이다.
"닙의 중간 측면 부분을 절개해서, 필기 시 인장응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탄성으로 휘어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취지를 실물로 구현한 것이 바로 몬테그라파의 '나지오날 플렉스 시나몬(Nazionale Flex Cinnamon)'이다.
경성과 연성.
이 두 상반된 성질을 하나의 닙에 공존시키겠다는,
어쩌면 지나치게 야심찬 설계이다.
연성닙이라면 펠리칸 M1000, 오마스, 파이롯트 우루시, 스크리보 등을 사용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펜이 과연 '정통 플렉스'라 부를 만한지는 여전히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세미 플렉스 정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요즘은 힘을 거의 주지 않고 쓰기 때문에 이 펜의 플렉시블한 맛은 가끔, 잊을 만할 때 불쑥 느껴질 뿐이다.
아무리 플렉시블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무리하게 눌러 쓰면 닙 수명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힘을 주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이제는 힘 주고 쓰기가 두렵다.
하지만 초기에는 달랐다.
초기에는 과감했다.
세로획을 내릴 때, 힘껏 눌러 꾸욱 주고 내려썼다.
닙 끝은 날카롭고 뾰족하다가도 순간 부드럽고 넓은 선을 내며 종이를 타고 흘렀고,
샤프트는 낭창하게 휘어지며 그 탄성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 느낌은,
나뭇가지를 땅에 눌러 휘게 만든 다음 힘을 툭 놓았을 때 튕겨 나오는 그 반작용의 감촉에 가깝다.
휘어질 때의 조심스러운 탄성.
튕겨날 때의 손끝 반향.
좋았다.
그야말로 재미가 있었다.
날카로운 부드러움,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도시 여자의 세련되고 변덕스런 차가움이 내 손안으로 들어온 듯하다.
이 펜이 만들어진 나라는 만년필의 세계사 속에서 결코 잊히지 않는 한 축을 담당해왔다.
이탈리아는 형태, 예술, 물성의 감각을 통해 만년필을 감정의 도구로 변주했다.
1920년대, 피렌체와 토리노를 중심으로 퍼진 이탈리아식 만년필 생산은 처음엔 미국 파커나 워터맨의 영향을 받았지만 곧 자신들만의 조형미와 색채 감각, 그리고 감성적 필기감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오마스(OMAS), 오로라(Aurora), 델타(Delta), 비스콘티(Visconti), 그리고 몬테그라파(Montegrappa).
이탈리아 만년필은 수공예적 마감과 함께, 시를 쓰기 위한 도구로서의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그 어떤 만년필보다 '쓴다'는 행위가 아니라 '쓰는 사람'을 더 말하게 하는 펜이 바로 이탈리아 만년필이다.
1912년, 이탈리아 북부 바사노 델 그라파(Bassano del Grappa)에서 탄생한 몬테그라파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장에서 편지를 쓰기 위해 사용된 만년필 브랜드였다. 당시의 군인, 문인, 기자들이 사용하던 초기 모델들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감정과 기록의 증명서가 되었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존 도스 패소스(John Dos Passos) 같은 작가들도 전쟁 중 몬테그라파 펜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나지오날(Nazionale)' 은 몬테그라파의 1930년대 오리지널 모델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복각 라인이다. 당시 셀룰로이드 특유의 깊이 있는 색감과 감촉, 그리고 대담한 닙 설계를 다시 꺼내 든 것이다.
시나몬 색상 또한 그 이름처럼 따뜻하고, 약간은 스파이시한 향기마저 연상되는 색채를 품고 있다.
필기감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예민한 사람에게는 투박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힘을 빼고 쓰는 이에게는 과하게 예민한 닙일지도 모른다.
힘을 주면 응답하고, 힘을 빼면 잠잠해지는, 상대의 태도에 따라 자신을 바꾸는 닙이다.
좋다고 단정 지을 자신도 없고,
맞지 않는다고 말할 이유도 없다.
배럴이 약간 얇은 듯한 것 외에는 필기감도 좋고, 쓰는 재미도 있고, 보는 재미도 있다.
그저 이 펜을 쓰는 순간만큼은
내가 쓰는 글보다도 '글을 쓰는 나 자신'을 더 들여다보게 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전히 가장 아끼는 만년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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