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 ‘세상을 제대로 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세상을 바라본다. 뉴스 앱의 알림, 소셜미디어 피드, 텔레비전 속 브레이킹 뉴스까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세상을 ‘점점 더 위험하고 불안한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전쟁, 테러, 질병, 범죄, 기후 재난. 이런 키워드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할수록, 세계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인상이 굳어진다. 그 인식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때로는 세상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세상은 그렇게 나빠지고 있기만 할까?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는 이러한 인식에 단호히 반문한다.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 나빠지고 있기만 한가요?”
그가 제시하는 수많은 데이터는 우리의 직관을 뒤엎는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짜 세계의 수치와 흐름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세계는 분명히 더 나아지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극빈층의 감소, 교육 수준의 향상, 평균 수명의 증가, 아동 사망률의 꾸준한 하락.
통계는 세상이 개선되어 왔음을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 책은 단지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사실대로 보는 법’을 회복하기 위한 안내서이자, 본능과 편견, 두려움에 갇힌 사고로부터 벗어나려는 인식의 혁명이다.
이 글은 《팩트풀니스》를 깊이 있게 톺아보며,
우리가 얼마나 자주, 어떻게 세계를 오해해 왔는지를 되짚고,
그 오해를 바로잡는 ‘팩트에 기반한 사고의 기술’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본능의 함정 – 왜 우리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가
‘세계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말, 당신에겐 어떻게 들리는가?
대부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 말은 어쩐지 현실 감각 없는 낙관론자들의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빈곤, 전쟁, 기후 위기, 전염병, 테러, 불평등—우리는 매일같이 세상의 어두운 단면과 마주한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결론 내린다.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그렇게 믿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언론이 전하는 뉴스, 학교에서 배운 역사, 그리고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모습이 하나같이 그렇게 말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팩트풀니스》는 이 흔들림 없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이 책은 단순히 통념을 반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방대한 데이터와 통계, 그리고 치밀한 관찰을 통해, 세상은 실제로 훨씬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리 있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증명해 보인다.
방대한 데이터와 통계, 그리고 치밀한 관찰을 통해, 세상은 실제로 훨씬 더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리 있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증명해 보인다.
저자 한스 로슬링은 세계적인 의사이자 통계학자다.
수십 년간 그는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보건과 교육 문제를 연구하며, 수치와 현장의 경험을 함께 축적해 왔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강연에서 사람들에게 간단한 퀴즈를 던졌다.
“세계 평균 수명은 몇 세일까요?”
“극빈층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전 세계 어린이 가운데 백신을 맞은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요?”
놀랍게도, 세계 곳곳의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조차 대부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정답률은 거의 무작위 선택 수준이었고, 때로는 침팬지가 임의로 고른 것보다도 낮았다.
로슬링은 이 충격적인 결과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건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드는, 특정한 사고방식—바로 본능의 작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세상을 오해하게 되는 걸까?
《팩트풀니스》는 그 이유를 ‘10가지 본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구분하려 하고, 극단적인 이미지에 더 강하게 반응하며, 나쁜 소식에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극단 본능’이다.
우리는 현실의 중간지대를 자주 놓친다.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절망과 성공—우리는 세상을 이처럼 양극단으로만 분류하곤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훨씬 더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삶이 존재한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중간 수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고, 백신을 접종하며, 전기를 사용하고, 휴대폰을 소지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처럼 ‘평범하고 긍정적인 변화’는 뉴스의 헤드라인이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변화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된다.
이 지점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뉴스는 본질적으로 ‘예외’를 다룬다.
변화 없는 일상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그 결과, 폭력, 사고, 테러, 재난, 비극 같은 사건들이 뉴스 화면을 장악하고,
이는 곧 전 세계가 그런 일들로 가득 차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진다.
한스 로슬링은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세상이 위험해 보이는 것은, 실제로 위험한 사건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위험한 사건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는 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편이고 예외이지만, 그것이 마치 전체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터는 전체를 말해준다.
한 사람의 고통이나 한 사건의 비극이 아닌,
수십 년의 시간과 수십억 명의 삶을 관통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팩트풀니스》에 따르면,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 극빈층의 비율은 절반 이하로 줄었고,
유아 사망률은 현저히 감소했다.
세계 평균 수명은 70세를 넘어섰으며,
교육과 백신 접종률, 깨끗한 식수와 전기의 보급률도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문제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방향성이다.
문제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세상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개선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근거에 기반한, 이성적인 낙관이다.
한스 로슬링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기술에 ‘팩트풀니스(Factfulness)’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세상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라는 말이 아니다.
팩트풀니스란, 직관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해 현실을 바라보려는 태도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바로,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결국 이 첫 장은 독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는가?
두려움과 본능이 왜곡한 렌즈인가, 아니면 사실과 통계로 다듬어진 새로운 렌즈인가?
세상은 여전히 복잡하고, 때로는 잔인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히, 조용히 나아지고 있는 흐름이 존재한다.
《팩트풀니스》는 바로 그 흐름을 포착할 수 있는 시선을 길러주는 안내서다.
우리가 가진 오래된 인식을 벗기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
사실에 기초한 희망의 기술이다.
10가지 본능 – 오해가 세상을 가린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보고 싶은 대로, 혹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본다.
인간은 원래 복잡한 정보를 빠르게 해석하고 판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존재였다.
이러한 진화적 유산은 때로는 유익하지만,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데이터와 복합적인 이슈들이 얽힌 오늘날에는
오히려 오해와 왜곡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팩트풀니스》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명료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짓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10가지 본능’을 제시한다.
이 본능들은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서 조용히 작동한다.
그러나 실상은,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심리적 필터에 가깝다.
우리가 객관적인 현실 대신, 왜곡된 인상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 간극 본능 – ‘두 개의 세계’라는 착각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 우리는 세상을 둘로 나누기 좋아한다. 그러나 이분법은 현실을 왜곡한다. 세계 인구의 75%가 ‘중간 소득 수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지금 이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으며,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뉴스를 본다. ‘가난한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단계의 발전을 밟고 있는 나라들’이 있을 뿐이다. 간극 본능은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보려는 우리의 습관에서 비롯된다.
2. 부정 본능 – 나쁜 소식만 보이는 이유
좋은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쉽게 믿지 않는다. 오히려 나쁜 소식이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이는 생존과 관련된 진화적 경고 시스템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본능은 오늘날 미디어 환경에서 더욱 증폭된다. 전쟁, 범죄, 기후 재난은 눈에 잘 띄는 반면, 아동 사망률 감소나 전염병 퇴치 같은 ‘조용한 진보’는 뉴스가 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세상의 전반적인 진전을 체감하지 못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실을 덮어버린다.
3. 직선 본능 – 변화는 직선이 아니다
무언가가 증가하고 있다면, 그 증가는 계속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많은 변화는 S자 곡선이나 종형 곡선, 혹은 흔들리는 진자처럼 움직인다. 예를 들어 인구 증가율은 이미 많은 지역에서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추세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직선적 사고에 갇혀 공포를 키운다. 세상은 선형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4. 공포 본능 – 위험의 과잉지각
공포는 본능적으로 빠르고 강력하다. 비행기 사고, 테러, 전염병은 통계적으로 드물지만, 뉴스에서는 자주 다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이 훨씬 흔한 일처럼 느낀다. 이로 인해 우리는 실제보다 위험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공포는 우리의 이성보다 빠르게 반응하며, 사실보다 강력하게 현실을 지배한다.
5. 크기 본능 – 숫자를 절댓값으로만 보는 오류
수치를 볼 때 우리는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 "천 명이 굶고 있다"는 말은 분명 충격적이다. 하지만 전체 인구 대비 몇 퍼센트인가? 과거에는 얼마나 많았던가? 크기 본능은 우리를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 맥락 없이 반응하게 만든다. 숫자는 크다고 무조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적 맥락이 중요하다.
6. 일반화 본능 – 한 사례로 전체를 판단하는 습관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경험은 쉽게 일반화된다. “아프리카는 전쟁과 기아의 대륙이다.” “이슬람권은 모두 여성 억압이 심하다.” 이런 일반화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한 정보를 단순화해 받아들이며, 차이를 인식할 여유 없이 '같은 집단'으로 묶어버린다. 하지만 세상은 지역, 문화, 역사, 경제 수준 등 수많은 변수가 얽힌 복잡한 구조다. 무지로 인한 일반화는 가장 위험한 판단 오류다.
7. 운명 본능 – 변화 불가능이라는 믿음
사람과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저 나라는 원래 그렇다." "그 문화는 절대 바뀌지 않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여성 교육률이 크게 향상된 이란, 출산율이 급감한 방글라데시, 급속한 도시화를 이룬 중국. 세상은 끊임없이 바뀌고 있으며, 운명처럼 고정된 현실은 없다. 운명 본능은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8. 단일 원인 본능 – 하나의 이유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유혹
어떤 문제든 하나의 원인만으로 설명하고 싶어지는 본능이 있다. “가난은 부패 때문이야.” “기후 위기는 자본주의 때문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 현상은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잃는다.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9. 비난 본능 –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지는 마음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원인을 찾아 비난하고 싶어진다. 정치인, 제도, 특정 국가, 혹은 개인. 비난은 일시적으로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문제의 본질을 가리기도 한다. 비난은 감정의 해소이지만, 해법은 아니다. 문제 해결보다 비난이 우선되는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10. 다급함 본능 – 지금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
위기감은 결정을 빠르게 유도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긴급하게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시간을 두고 복합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사안이 있다. 다급함 본능은 우리를 성급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든다. 침착하게 정보를 분석하고, 속도가 아닌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10가지 본능은, 우리가 왜 세상을 정확히 보지 못하는지를 보여주는 렌즈이자 동시에 경고음이다. 한스 로슬링은 이를 통해 ‘세상이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오해해서’ 비관한다고 말한다. 진짜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방식이다.
그리고 이 인식을 교정하는 일은 단지 통계를 잘 이해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 즉 세상을 대하는 방식의 전환이다. 성급한 결론을 유보하고, 전체를 바라보며, 오해를 의심하고, 맥락을 찾는 일. 팩트풀니스란 바로 그 태도를 일상화하는 삶의 방식이다.
3장. 데이터가 말하는 세계 – 팩트의 힘으로 다시 보는 현실
수치와 통계는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스 로슬링에게 데이터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언어다. 그것은 익명의 숫자가 아니다.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 아이를 잃지 않은 부모, 생존의 문턱을 넘은 수많은 얼굴들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그 데이터가 전하는 세계의 진짜 모습을 마주한다. 그것은 흔히 우리가 뉴스나 인터넷에서 접하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세상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우선, 극빈층의 감소는 경이롭다. 1800년대에는 전 세계 인구의 85%가 극빈 상태에서 살았다. 하루 2달러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가는 삶. 그러나 2017년 기준, 그 비율은 9%로 줄었다. 단순히 ‘줄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진보다. 특히 지난 20년간, 하루 1,000명 이상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매일매일, 그만큼의 사람들이 전기를 얻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이 변화는 조용하지만 강력하다.
더 나아가 유아 사망률의 변화는 세계가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 세계에서 태어난 아이 5명 중 1명은 다섯 번째 생일을 맞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수치는 20명 중 1명 수준으로 줄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100명 중 1명 이하로 떨어졌다. 이는 백신 접종률의 상승, 의료 접근성의 향상, 교육 수준의 증가 덕분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단지 의학이나 기술의 진보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의 협력과 정책의 힘이 만들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교육과 전기, 그리고 연결된 세계
또 다른 주목할 변화는 여성 교육 수준의 향상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여성의 평균 교육 기간은 3년 미만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과 남성의 교육 격차가 줄었고, 많은 지역에서는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앞지르기도 한다. 여성의 교육은 단지 개인의 권리 실현을 넘어, 출산율 감소, 아동 건강 개선, 가계 소득 증가와 연결된다. 하나의 변화는 또 다른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전기의 보급률 역시 세계 변화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전기 보급률은 20% 미만이었다. 지금은 절반 이상이 전기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고립에서 연결로 나아가고 있다. 휴대폰 사용률도 마찬가지다. 이제 휴대폰은 단지 통신 수단이 아니라, 은행, 교육, 건강, 시장의 입구가 된다. 정보의 접근은 곧 기회의 확장을 의미한다.
언론은 왜 이 진보를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놀라운 진보를 실감하지 못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언론은 예외와 비극,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다. 뉴스는 ‘변하지 않는 긍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해 동안 수백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뉴스보다, 한 곳에서 발생한 테러나 지진이 훨씬 더 큰 헤드라인이 된다. 이는 언론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우리는 세상의 전반적인 변화를 놓친다.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 속에, 세상은 나빠지고 있다는 오해를 반복한다.
한스 로슬링은 여기서 ‘기초 데이터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단순한 정보 소비자가 아니라, 데이터를 ‘묻고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 출산율이 줄었다면, 그 원인이 교육일 수도 있고, 도시화일 수도 있으며, 보건정책의 변화일 수도 있다. 단편적인 뉴스가 아니라, 긴 흐름과 맥락을 볼 수 있어야 세상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팩트’가 말해주는 희망
이 장에서 다룬 수많은 수치는 결국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세상은 실제로 좋아지고 있다." 이는 맹목적인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에 기반한 냉정한 관찰이다.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은 문제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이다. 팩트풀니스는 이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의 판단을 점검하며, 세상을 다시 믿을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안도감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과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할 수 없다’는 체념 대신, ‘이미 가능했다’는 증거는 행동의 기반이 된다. 데이터는, 단지 과거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미래를 열어갈 나침반이다.
4장. 팩트풀한 삶 – 인식의 전환이 만드는 새로운 선택
팩트풀니스는 단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나아가 삶의 결정을 내리는 기준을 바꾸는 실질적인 도구다. 지금껏 우리는 본능과 직관에 의해 판단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이끌려 반응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실에 기반해 이해하면, 보다 정확하고, 냉철하며, 근거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이것이 팩트풀한 삶의 시작이다.
데이터는 정책을 바꾼다
정책은 믿음에서 출발한다. 만약 지도자가 세계를 ‘망해가는 곳’으로 인식한다면, 그가 내놓는 해법은 방어적이고 폐쇄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세상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협력과 연대, 미래를 향한 투자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예컨대 개발 원조는 빈곤한 나라를 ‘도움만 받는 존재’로 간주하는 시혜적 시선에서 벗어나, 동반자적 관점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보건, 교육, 여성 권리 등 핵심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왜 효과적인지, 실제 데이터를 통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팩트에 기반한 개발정책은 눈에 띄는 성과를 낳았다. 말라리아 퇴치 캠페인, 여성 보건 지원 프로그램, 유니세프의 예방접종 확대 사업 등은 ‘세상이 나빠진다’는 인식이 아니라 ‘좋아지고 있다’는 근거 위에서 지속 가능성을 설계한 사례들이다. 팩트는 사회 문제를 추상적인 고통이 아니라, 구체적 해결 가능한 과제로 전환시킨다.
교육은 세계 시민을 길러낸다
팩트풀니스는 교육의 방식에도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많은 학교가 과거의 데이터를 가르치고, 세상을 고정된 틀로 이해하게 만든다. 한스 로슬링은 학생들에게 “이 세상에 대해 정말로 아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교육은 ‘암기’가 아닌 ‘판단력’의 훈련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세계 곳곳에서 실시한 퀴즈 실험에서 드러났듯,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실제 세계의 변화에 대해 무지하거나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단지 개인의 무지가 아니라, 교육의 실패다. 교육은 시대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반영하고, 오해를 교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대륙은 어디인가?’ 같은 질문은 시험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을 여는 열쇠다. 팩트풀한 교육은 비관이 아니라 호기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삶의 태도에 스며드는 팩트풀니스
팩트풀니스는 결국 개인의 태도에서 시작된다. 언론을 접할 때, 숫자를 볼 때, 세상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늘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정보는 정확한가?’ ‘맥락은 있는가?’ ‘예외를 전체로 확대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논리적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다. 감정의 과잉 반응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술이기도 하다. 불안과 공포, 분노는 순간적인 판단을 흐리고, 오해를 확대 재생산한다. 팩트풀니스는 그 감정들을 완전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들을 다스릴 ‘거리 두기’를 가능하게 만든다.
예컨대, SNS에서 떠도는 한 사건에 대해 격분하기 전에, ‘이 일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인가?’, ‘비슷한 사건은 과거에도 있었는가?’, ‘해당 정보는 누가 제공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책임 있는 시민이자 소비자가 된다.
팩트풀한 사회를 위한 조건
팩트풀한 삶은 개인의 실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정보 생태계, 미디어 환경, 정치 문화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팩트풀니스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공공 통계 시스템
감정보다 정보 중심의 언론 보도 문화
학교에서 통계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 훈련 강화
정치적 담론에서 사실에 근거한 주장과 반박의 룰 강화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개인의 인식 전환은 공동체 전체의 판단력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다. 팩트풀한 사회는 비관 대신 해결책을 찾고, 혐오 대신 이해를 선택하며, 단기 반응보다 장기 구조를 고민하는 사회다.
《팩트풀니스》가 제안하는 것은 단지 '세상을 더 긍정적으로 보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믿고 있는 것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재점검하라는 근본적인 요청이다.
5장. ‘무지의 지도’에서 ‘사실의 나침반’으로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은 늘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본능적으로 위험에 더 민감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단순화를 추구하며, 극적인 사건에 주의를 빼앗기도록 진화해 왔다. 하지만 이 본능들이, 정보의 홍수 속에서 왜곡된 이미지에 기생할 때, 우리는 ‘무지의 지도’를 들고 세상을 헤매게 된다. 이 장은 그 지도를 내려놓고, ‘사실의 나침반’을 다시 손에 쥐기 위한 마지막 안내서다.
본능을 다스린다는 것
《팩트풀니스》가 말하는 ‘본능’은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다. 그러나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있다. 첫째, 의식적으로 거리 두기. 감정이 격해질 때, 특히 어떤 사건에 대해 ‘즉각적 반응’을 요구받을 때, 잠시 멈춰야 한다. “이게 정말 전부일까?”, “내가 놓치고 있는 맥락은 없을까?” 같은 질문은 자동화된 사고에서 우리를 구해낸다.
둘째, 전체를 보는 훈련. 데이터를 볼 때, 단일 수치가 아니라 흐름과 비교를 본다. 지난 10년, 50년간의 변화 속에서 지금의 수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개발도상국의 유아 사망률이 줄어든 것은 그 지역이 가진 ‘가능성’과 ‘정책 효과’의 지표다.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희망이 읽혀야 한다.
셋째, 틀 안에서 벗어나기. 국가, 문화, 종교에 따라 사람을 구분하고 일반화하는 습관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보다 유연하고 공정한 세계 인식을 갖게 된다. 세계는 단지 ‘우리 대 그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슷한 꿈을 꾸고, 아이를 지키려 애쓰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팩트가 주는 용기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그것은 희망에 근거를 부여하는 행위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되, 그것을 ‘극복 가능한 것’으로 바라보는 용기. 세계의 빈곤율이 줄어들고, 여성의 교육률이 올라가고, 백신 접종률이 높아지는 현실은, 우리가 만든 변화이고, 앞으로도 만들 수 있는 변화다.
이런 용기는 정책을, 교육을, 삶을 바꾼다. '현실을 정확히 보는 것'에서 출발한 행동은 불필요한 분노를 줄이고, 과장된 위기의식을 걷어내며,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의 길을 제시한다. 이는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단단하게 만든다. 더 나은 미래는 추상적인 희망이 아니라, 꾸준한 팩트의 축적에서 비롯된 결과다.
팩트풀니스, 일상의 기술
팩트풀니스는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삶의 기술이다. 뉴스 속 세상을 볼 때, 복잡한 세계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녀 교육에 대해 고민할 때, 우리는 ‘사실에 기반한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처음엔 낯설고 느릴 수 있다. 그러나 반복될수록, 삶의 기준은 점점 더 단단해진다. 불안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 타인을 편견 없이 이해하려는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태도. 이것이 팩트풀니스가 말하는 새로운 문해력이다.
한스 로슬링은 말했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가능주의자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세상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었고,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맺음말
이제 우리는 ‘무지의 지형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걷어낼 방법 또한 손에 넣었다. 그것은 특별한 도구나 지식이 아니다. 단지, 질문을 던지는 용기, 더 많은 맥락을 보려는 노력, 본능과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각. 그 모든 것이 모여, 우리는 세상과 조금 더 정직하게 마주설 수 있게 된다.
팩트풀니스는 세상을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팩트를 믿고, 행동하라는 요청이다.
그렇게 믿고, 조금 더 나아가길 바란다. 우리가 함께 그리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작가의 말 · 가능한 세상을 향하여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내 생각을 수없이 의심했다. 내가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 뉴스에서 보던 절망적인 사건들만으로 ‘세계 전체’를 단정짓고 있었던 건 아닐까?
《팩트풀니스》는 그런 나의 태도를 조용히 흔들었다. 처음에는 불편했고, 다음에는 놀라웠으며, 마지막에는 감동스러웠다. 변화는 생각보다 많았고, 더디지만 멈추지 않았으며,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가 팩트를 마주한다는 것은 단지 냉정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따뜻한 현실감이다. 문제를 직면하고, 가능성을 믿고,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신호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앎이 더 나은 선택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나침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