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의 정치: 삶과 꿈을 함께 묻다

성장과 분배, 이분법 너머의 새로운 사회 상상

by 콩코드


프롤로그: 질문으로 시작하기


“성장은 분배를 희생시켜야만 가능한가?”

“분배를 말하면 무조건 반(反)성장인가?”


이 질문들은 우리가 너무 오래,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온 전제들을 흔든다. 마치 성장과 분배는 서로를 해치는 적대항인 것처럼,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은 오히려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상상력을 가두는 족쇄가 아닐까.


어쩌면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삶이 버거운 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밥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이상은 누구의 것이 되는가?”


우리는 ‘성장’을 말할 때 종종 숫자를, 그래프를, 경제지표를 떠올린다. 그러나 삶은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아침을 준비하고, 지하철을 타고, 하루의 고단함을 견뎌야 한다. 그런 삶의 조건이 무너진 자리에서, 꿈은 공허해지고 이상은 기득권의 특권이 된다.


분배는 ‘나눠주는 것’ 이전에, 모두가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낼 수 있어야, 비로소 살아갈 이유와 방향이 생긴다. 밥과 이상, 삶과 꿈은 애초부터 갈라질 수 없는 하나였다.


이 글은 그 단절된 연결을 다시 복원하려는 시도다.

성장과 분배의 허위 대립을 넘어서,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설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려 한다. 그것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회를 ‘정의롭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이념적 갈등 구조: 성장 vs. 분배라는 허위 대립


“성장을 말하면 분배는 멀어지고, 분배를 말하면 성장은 멈춘다.”

이 오래된 공식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정책 결정과 공적 담론을 지배해왔다. 성장과 분배를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설정해버린 이 프레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갈등을 만들어내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불필요한 이념적 대치를 부추겨 왔다.


이 허위 대립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담론의 강력한 영향력이 존재한다.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는 ‘성장이 먼저’라는 논리를 앞세우며, 분배 문제는 성장 이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대부분의 경우 지켜지지 않았다. 성장은 이루어졌지만, 과실은 고르게 나누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소득 격차와 자산 불균형은 더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성장 우선’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강한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슬로건처럼 활용된다. 분배를 주장하면 ‘포퓰리즘’이란 낙인이 따라붙고, 성장을 강조하면 ‘현실주의’란 이름이 붙는다. 이 프레임은 경제적 선택지를 제한하고,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단순한 수치로 환원하는 폭력적인 단순화다.


한편, 분배를 중시하는 목소리는 종종 ‘비현실적이다’, ‘경제를 망친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 이유는 분배를 단지 ‘나눠주는 행위’로 축소해 해석하거나, 그것이 자원의 무한한 소비와 충돌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배란 단순히 소비의 확대가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재조정하는 일이다. 누구나 교육받고, 치료받고, 일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하는 일이며, 이는 곧 지속 가능한 성장의 전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성장과 분배는 대립적이지 않다. 성장 없는 분배는 지속 가능하지 않고, 분배 없는 성장은 사회적 동력을 잃는다. 이는 수많은 경제학 연구와 정책 경험이 보여주는 사실이다.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내수가 위축되고, 소비는 둔화되며, 사회적 불안정성은 투자 환경을 악화시킨다. 반대로 공정한 분배는 더 넓은 경제 주체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 전체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기반이 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진짜 문제는 성장과 분배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둘을 함께 작동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허위 대립을 벗어나야 실질적인 해법이 보인다. 성장과 분배는 평행선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그리고 그 두 기둥 위에만,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사회라는 집이 세워질 수 있다.


삶의 조건으로서의 분배


우리는 때때로 착각한다.

국가의 GDP가 오르면 국민 모두가 조금은 더 나아진 삶을 살게 될 거라고. 하지만 숫자가 말하는 ‘성장’은 종종 사람의 ‘삶’을 말해주지 않는다. 수치는 오르는데, 삶은 제자리거나 더 나빠지는 현실은 이를 분명히 증명한다.


그렇다. 성장만으로는 사람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한 사회의 총소득이 늘었다고 해서, 그 부가 모두에게 골고루 흘러가지는 않는다. 높은 성장률을 자랑해도, 그늘 아래선 여전히 의료비를 감당 못해 치료를 미루는 이들이 있고, 비싼 월세에 쫓겨 고단한 하루를 반복하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빈곤율은 고착되고, 기회의 사다리는 끊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도전'이나 '꿈'은 공허한 수사가 된다.


이때 분배란 단순히 돈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다. 분배는 사람들로 하여금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교육받을 권리, 제대로 쉴 수 있는 주거 공간,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는 기본권, 인간다운 노동환경. 이 모든 것이 삶을 가능케 하는 토대다. 분배란 바로 이 토대를 사회 전체에 보다 공정하게 제공하려는 시도이며, 그것은 곧 한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존중하는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사는 게 돼야 살아갈 희망도 생긴다.”

이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분배의 진정한 의미를 꿰뚫는 통찰이다. 지금 여기를 버텨낼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없다면, 그 누구도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할 수 없다. 분배는 꿈의 결과가 아니라 꿈의 시작이다.


분배 없는 성장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눈부신 겉모습 뒤에, 가장 기본적인 삶의 안정이 빠져 있다면, 그 집은 쉽게 무너진다. 반대로, 삶의 조건이 탄탄하게 설계될 때, 개인의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사회는 그만큼 더 풍요로워진다.


분배는 ‘시혜’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며, 사회가 구성원에게 보내는 존중의 신호다. 이 약속이 지켜지는 사회에서만, 진정한 성장—사람과 공동체 모두가 함께 커가는—이 가능하다.



‘꿈’을 말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삶을 떠받치는 최소한의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


개인의 자기실현은 고립된 공간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꿈꾸고 도전할 수 있으려면, 제도와 자원의 조건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태어난 환경이 삶의 출발선을 결정하고, 교육·주거·보건·노동의 격차가 곧 인생의 격차로 이어지는 사회에서는, 능력조차 발휘될 기회조차 갖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오래된 신화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분배 정의 없이 주어지는 능력주의는, 결국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된다. 어떤 이는 평탄한 길 위에서, 어떤 이는 깊은 진창 위에서 달리기를 시작한다면, 그 결승선의 결과를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출발선이 불평등한데, 결과의 차이를 ‘능력’ 탓으로 돌리는 것은 잔인한 착각이다.


그렇기에 “꿈은 모든 이의 권리”라고 말하려면, 먼저 꿈을 꿀 수 있는 삶의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삶의 바탕 없이 이상은 자라지 않는다.

거름 없이는 꽃이 피지 못하고, 뿌리 없이 줄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분배는 사람들로 하여금 꿈꿀 권리를 갖게 하는 첫 번째 사회적 약속이다.

자기계발서 한 권, 성공담 하나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 앞에서, 우리 사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우리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의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가?”


성장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살 수 있는 조건,

이상을 말하기 전에, 먼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고,

우리가 무엇을 ‘정의’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성장과 분배의 동시성: 새로운 균형의 상상


성장은 반드시 누군가를 밀어내야 가능한 것일까?

분배는 언제나 성장을 늦추는 걸림돌일까?


이 오래된 질문에 대해 이미 여러 나라가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답을 내놓았다.


북유럽 복지국가들 —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 그리고 독일은 분배 정의와 경제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며 안정된 성과를 이뤄냈다. 이들 국가는 단지 ‘재정이 풍부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투자를 사회의 중심 원리로 삼고, 사회적 신뢰와 제도적 투명성을 바탕으로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결과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개념이 바로 질 좋은 성장(quality growth)과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다.

이는 단순히 숫자상의 GDP 확대를 뜻하지 않는다. 성장의 혜택이 사회 전체로 골고루 퍼지며, 삶의 질이 동반 상승하는 성장을 의미한다. 기술 발전과 생산성 증대가 극소수의 부를 강화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교육·복지·고용 시스템에 재투자되어 모두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할 때, 성장은 더 강력하고 지속 가능해진다.


즉, 성장과 분배는 병렬적인 가치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조건이며,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수 있다.


성장이 분배를 가능케 하고,

분배는 더 건강한 소비와 교육, 인재 양성을 통해

다시 새로운 성장을 가능케 한다.


이는 더 이상 이상적인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구현된 현실의 일부다.

우리는 이제 선택을 강요받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쪽이냐, 저쪽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전환의 언어가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더 많은 사람이 수혜를 느끼는 성장.

더 많은 기회가 순환하고, 더 많은 가능성이 뿌리내리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함께 상상하고 설계해야 할 새로운 균형이다.


결론: 삶과 꿈의 균형, 새로운 사회적 상상


분배 없는 성장은 공허하고,

성장 없는 분배는 지속 불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 둘을 대립항으로 두고 논쟁하는 낡은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숫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을 살리는 성장이어야 하고, 꿈을 품게 하는 분배여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극단적 경쟁과 결과 중심의 논리에 지쳤다.

무엇이든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크게 만들어내는 시스템 속에서,

정작 ‘왜 살아가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소외되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질을 중심에 둔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그 계약은 단순한 제도의 재설계가 아니다.

누구나 살아낼 수 있는 조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이어주는 공동체적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다시 묻는다.

성장은 반드시 나눔을 희생해야만 가능한가?

분배는 언제나 성장을 방해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요. 더 나은 길이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그 길을 상상하고, 설계하고, 함께 걸어갈 수 있을 때,

사회는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 위에 유지되지 않는다.


“꿈을 꿀 수 있는 사회란, 살아낼 수 있는 사회다.”


그 문장이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실감되는 현실이 되는 날을

우리는 지금, 함께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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