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해진 리바이어던의 그림자: 우리를 삼키는

‘보호’라는 이름의 우상

by 안녕 콩코드

성경 속의 괴물, 우리 곁에 현신하다

​1651년, 토머스 홉스는 전란의 공포 속에서 국가라는 존재를 성경 속 거대 괴물인 ‘리바이어던(Leviathan)’에 비유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즉 죽음의 공포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여 만든 ‘가책 없는 전능함’. 그것이 홉스가 정의한 국가의 기원이었다.


​그러나 2026년 대한민국, 우리가 마주한 리바이어던은 더 이상 외부의 적이나 무질서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패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의 리바이어던은 시민의 안위를 명분 삼아 개인의 사유와 일상을 낱낱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관리형 포식자’로 진화했다. 미셸 푸코가 경고했던 ‘생명정치(Biopolitics)’의 현신이다. 국가는 이제 단순히 영토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신체와 행동, 심지어는 무의식적 습관까지 데이터화하여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는 안전이라는 달콤한 사탕을 얻기 위해, 주권자로서의 존엄이라는 거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는 우리 손으로 빚어낸 이 괴물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


​디지털 파놉티콘, 족쇄가 된 안전의 네트워크

​현대 한국 사회의 리바이어던은 칼과 창 대신 ‘데이터’라는 보이지 않는 촉수로 시민을 휘감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인프라는 역설적으로 국가가 개인을 감시하기 가장 좋은 토양이 되었다. 도처에 깔린 AI CCTV, 실시간 동선 파악, 통합된 금융 데이터 내역은 리바이어던의 거대한 서버 속으로 끊임없이 흡수된다. 최근 논의되는 ‘디지털 ID 통합’과 ‘실시간 행태 분석 시스템’은 공익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본질은 거대한 감옥, 즉 파놉티콘의 현대적 완성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시민의 안전’과 ‘효율적 행정’이라는 신성불가침의 명분하에 진행된다는 점이다. 재난을 예방하고 질병의 확산을 막는다는 논리는 그 어떤 비판도 ‘공익을 저해하는 불온한 목소리’로 치부하게 만든다. 조르조 아감벤이 지적했듯, 국가는 위기 상황을 ‘예외상태’로 규정함으로써 법적 권리조차 정지시키는 통제권을 상시화하고 있다. 감시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인간의 자율성은 질식한다. 스스로 검열하고 국가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생각의 폭을 좁히는 시민들이 가득한 사회는 이미 그 자체로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는 보호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기 쉬운 ‘번호표 붙은 데이터’로 전락하고 있다.


​책임 없는 관료제의 늪과 법률 만능주의의 독배

​리바이어던의 몸집을 불리는 가장 강력한 엔진은 ‘법률 만능주의’와 ‘거대 관료제’다.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정치는 실종되고, 그 빈자리를 규제와 처벌이 메운다. 정치권은 스스로 갈등을 조정할 능력을 상실한 채, 모든 판단을 사법부나 행정적 규제 기구에 떠넘긴다. 정치가 사법화되고 행정이 비대해지는 사이, 시민 간의 자율적 중재 능력은 거세된다.


​리바이어던은 갈등을 먹고 자란다. 규제가 늘어날수록 관료의 권한은 커지며, 그들은 자신들의 영속성을 위해 더 촘촘한 법망을 짜낸다. 더욱 기만적인 것은 이 거대 기구가 지닌 ‘무책임성’이다. 현대의 리바이어던은 권한은 무한히 행사하되, 실패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 사회적 참사나 정책의 실패 앞에서 권력은 ‘시스템의 한계’나 ‘매뉴얼의 부재’라는 추상적 언어 뒤로 숨어버린다. 하위직 실무자에게만 책임을 묻고 정작 정책의 설계자들은 건재한 현실은 리바이어던의 무오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제의에 가깝다. 관료주의라는 리바이어던의 장기(臟器)는 이제 시민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보존을 위해 박동하고 있다.


공동체의 파편화, 불신을 양분 삼는 통치술

​홉스가 리바이어던을 요청했던 이유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리바이어던은 역설적으로 시민들 사이의 ‘불신’을 조장하고 이를 통제의 동력으로 삼는다. 이웃 간의 층간소음 갈등부터 온라인상의 이념 전쟁까지, 시민들은 스스로 대화하고 타협하기보다 국가라는 ‘거대 심판관’의 입을 바라본다. 국가 권력이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시민들이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게 만드는 시스템, 이것이 리바이어던이 꿈꾸는 완벽한 통치다.


​정치 권력은 진영 논리와 혐오를 동원해 시민을 파편화한다. 서로를 적대시하는 시민들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국가에게 더 큰 칼을 쥐여달라고 애원한다. 리바이어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국민을 통합하기보다 분열된 상태로 두는 것이 통치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 국가의 개입에 매달리는 순간, 우리는 리바이어던의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셈이다. 공동체의 자정 능력이 사라진 자리에 리바이어던의 독점적 폭력만이 질서라는 이름으로 군림하고 있다.


괴물을 길들이고 주권을 회복할 시간

​리바이어던은 우리가 공포를 이기기 위해 스스로 빚어낸 우상이다. 우상의 힘은 맹목적인 믿음과 의존에서 나온다. 우리가 국가라는 기구에 모든 해결책을 구걸할 때, 리바이어던은 우리의 영혼까지 잠식할 권리를 얻는다. 국가는 당신을 보호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을 분류하고, 기록하며,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 묶어둘 뿐이다.


​이제 우리는 안전이라는 환상을 위해 자유라는 실체를 팔아치우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첫째, 비판적 의심의 복원이다. 국가의 행정이 선의에 기반한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권력은 본래 오만하며, 견제받지 않을 때 반드시 타락한다. 둘째, 자율적 연대의 강화다. 법과 국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끼리 대화하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시민 사회의 근육을 다시 키워야 한다. 셋째, 책임의 정치 구현이다. 실패한 권력에게는 반드시 그 대가를 묻고, 국가가 시민의 군주가 아닌 ‘고용된 대리인’임을 명확히 각인시켜야 한다.


​리바이어던은 필요할 수 있으나,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인 없는 방 안에 괴물이 가득 차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권자로서의 자리를 되찾아야 한다. 리바이어던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치기 전에, 우리는 그 그림자를 걷어낼 횃불을 들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마지막 책무이자 자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