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서울의 공기는 무거웠다
2016년 3월, 서울 포시즌스 호텔 주위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과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대국장으로 향하는 이세돌 9단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그를 바라보는 인류의 시선은 투사(鬪士)를 응원하는 그것과 닮아 있었다. 상대는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
대국 전, 바둑계의 중론은 이세돌의 압승이었다. 바둑은 가로세로 19줄, 총 361개의 점 위에서 펼쳐지는 우주의 언어다. 가능한 수의 조합은 '10^{170}개(10의 170승 개)'로, 관측 가능한 우주의 원자 수보다 많다. 인간은 이 무한한 확률을 다 계산하지 않는다. 대신 '기세', '두터움', 혹은 '직관'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적인 느낌으로 돌을 놓는다. 기계가 감히 인간의 '수읽기'와 '직관'을 흉내 낼 수 없으리라는 믿음, 그것이 인류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의 성벽이었다.
무너진 성벽: 기계는 감정이 없다
하지만 대국이 시작되자 성벽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알파고는 인간의 상식을 비웃는 수를 두었다. 바둑책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하수(下手) 같은 수를 두는가 하면, 때로는 허를 찌르는 강수(强手)를 두었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점은 알파고에게 '흔들림'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은 위기에 몰리면 손이 떨리고, 승기를 잡으면 자만하며, 시간이 쫓기면 실수를 한다. 하지만 알파고는 승률이 가장 높은 단 하나의 점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세돌이 고뇌하며 머리를 쥐어뜯는 동안, 알파고의 본체인 구글 서버실의 냉각팬은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3연패. 인류가 쌓아 올린 수천 년의 바둑 역사가 단 며칠 만에 부정당하는 듯한 참혹한 패배였다. 이세돌은 대국 후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류가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사람들은 지능의 왕좌가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제4국, 인류가 던진 유일한 비수 ‘78수’
그리고 3월 13일, 제4국이 시작되었다.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고 분위기는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반전이 한창이던 오후, 이세돌은 바둑판 정중앙에 '끼우는 수'를 던졌다. 바로 전설이 된 '78수'였다.
그 수는 기괴했다. 해설자들도, 알파고의 대리인인 아자 황도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알파고의 연산 회로가 예측한 확률 0.0001% 미만의 영역에 존재하던 수였다. 알파고는 당황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학습한 수만 개의 기보 중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 생소한 반응에 알파고의 가치망(Value Network)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후 알파고는 믿기 힘든 실수를 연발했다. 인간 초보자도 두지 않을 법한 자충수를 두며 자멸해 나갔다. 튜링이 말했던 '이미테이션 게임'의 판세가 뒤집힌 순간이었다. 이세돌은 기계의 논리 체계를 뚫고 들어가 그 안의 허점을 찔렀다. 78수는 단순한 바둑 한 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계가 보는 '확률의 바다'에 인간이 던진 '자유의지의 불꽃'이었다.
알파고가 본 것은 바둑판인가, 우주의 확률인가
알파고의 승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알파고는 바둑을 '이해'하고 두었는가? 아니면 그저 '계산'했을 뿐인가?
알파고에게 바둑판은 흑과 백의 돌이 놓인 미학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저 승률이라는 결과값을 도출하기 위한 거대한 데이터 행렬일 뿐이다. 알파고는 '신의 한 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상대보다 반 집이라도 더 많이 이길 확률'이 51%인 곳을 찾아 돌을 놓았을 뿐이다.
인간이 바둑에서 '도(道)'를 찾고 '인생'을 배울 때, 알파고는 그 안에서 '최적화'를 찾았다. 여기서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서글픈 진실을 마주한다. 기계는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른다. 알파고는 이세돌을 이겼지만, 승리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했고 자기가 둔 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몰랐다. 지능은 인간을 넘어섰을지 모르나, '의식'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신의 한 수'의 종말 이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이후, 바둑계는 영원히 바뀌었다. 이제 프로 기사들은 AI를 스승으로 모신다. 과거에 '금기'시되던 수들이 AI가 추천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수(正手)'가 되었다. 수천 년간 인간이 쌓아 올린 바둑의 미학은 데이터의 효율성 앞에 무너졌다. '신의 한 수'는 더 이상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라, 연산 장치가 찾아낸 확률의 최상단에 위치한 숫자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알파고를 만든 것도 인간이며, 그 알파고를 오류에 빠뜨린 유일한 존재 역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이세돌의 78수는 인류가 기계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이자 초대장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지능을 창조한다 해도, 인간에게는 계산되지 않는 '의외성'과 '투지'라는 신비가 남아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브런치 독자 여러분, 여러분의 삶 역시 데이터로 환산하면 99%의 확률로 정해진 길을 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끔은 세상의 계산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 당신만의 '78수'를 던져보십시오.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키고 세상이 당황하는 그 틈새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숨 쉬고 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요.
다음 화에서는 알파고가 열어젖힌 이 거대한 '블랙박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AI가 내린 결론을 인간이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 '블랙박스'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공포스러운 통찰을 다뤄보겠습니다.
[작가 노트]
9화는 독자들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대국의 긴장감과 함께 '확률 대 직관', '지능 대 의식'이라는 철학적 대비를 극대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