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의 장례식
우리는 지금 거대한 시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시체의 이름은 ‘국가’입니다.
매일 아침 뉴스를 장식하는 여의도의 고성과 비명, SNS를 가득 채운 증오의 언어들, 그리고 "이게 나라냐"라는 케케묵은 탄식은 사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유기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수명을 다한 기계가 관성에 의해 삐걱거리며 내는 기괴한 마찰음일 뿐입니다.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David Runciman)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이 지독한 풍경을 향해 가장 우아하고도 잔인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정말로 이 국가라는 기계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가?"
런시먼의 시선에서 현대 국가는 토마스 홉스가 묘사했던 그 위풍당당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아닙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만인의 투쟁을 종식하기 위해 시민들의 권리를 양도받아 탄생한,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리바이어던은 시민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비대해진 관료주의와 자본의 논리, 그리고 정교해진 감시 기술이 뒤엉킨 '거대한 알고리즘'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4년 혹은 5년마다 한 번씩 투표장에 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집니다. 하지만 런시먼은 냉소적으로 지적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선택하든 국가라는 기계의 톱니바퀴는 멈추지 않습니다. 세금은 걷히고, 규제는 쌓이며, 감시의 눈길은 더욱 촘촘해집니다. "국가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분 아래, 정작 우리는 국가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런시먼이 폭로하는 현대 국가의 첫 번째 기만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 기만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행정 서비스를 누리고 디지털 강국이라는 찬사를 받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국가를 불신하고 서로를 증오합니다. 정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갈등을 중계하며 먹고살고, 시민들은 각자의 에코 체임버 안에서 허상의 적을 향해 칼춤을 춥니다.
이 글은 런시먼의 통찰을 빌려, 우리 삶을 옥죄고 있는 국가권력의 민낯을 난도질하려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닙니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시스템을 억지로 가동하며 미래 세대의 자원을 약탈하는 '좀비 국가'에 대한 사망 선고이자, 리바이어던의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모두를 향한 서늘한 독설입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온 민주주의의 외형은 이미 무너졌으며, 우리는 지금 리바이어던의 장례식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런시먼이 현대 민주주의를 진단하며 던지는 가장 치명적인 비수는 바로 '정치의 희극화'입니다. 그는 우리가 민주주의의 정점에 서 있다고 믿는 바로 이 순간,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가장 천박한 방식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한국의 정치 현실은 런시먼이 묘사한 이 '소음의 지옥'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전시장과 같습니다.
팬덤 정치: 시민은 사라지고 '팬'만 남은 경기장
과거의 정치는 이익의 조정과 가치의 배분이라는 지루하지만 필수적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런시먼은 현대 정치가 더 이상 정책을 팔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신 '정체성'과 '소속감'을 팝니다.
한국의 이른바 '개딸'이나 '태극기 부대'로 상징되는 강력한 팬덤 정치는 런시먼의 시각에서 볼 때 민주주의의 활력이 아니라 '정치의 스포츠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 공공의 선(善)을 고민하는 시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라는 '스타'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상대 팀을 향해 야유를 퍼붓는 훌리건이 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 거대한 팬덤의 화력을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지만, 정작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런시먼은 지적합니다. "팬덤은 정치인을 검증하지 않는다. 그저 숭배하거나 증오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복잡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라, 자극적인 서사와 복수극이 난무하는 넷플릭스 드라마로 전락했습니다.
소음의 역설: 비명은 크지만 울림은 없다
우리는 SNS를 통해 24시간 정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권력자의 SNS에 직접 항의하며, 실시간으로 뉴스를 소비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민주주의의 확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런시먼은 이를 '소음 속의 죽음'이라고 규정합니다.
에코 체임버(Echo Chamber): 알고리즘은 우리가 듣고 싶은 목소리만 들려줍니다. 분노는 증폭되고 타협은 배신이 됩니다. 한국의 커뮤니티와 유튜브 정치는 이 소음을 극대화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되었습니다.
관심의 파편화: 소음이 커질수록 우리는 진짜 중요한 문제—예컨대 국가 채무의 폭발이나 연금 제도의 붕괴—에 집중할 능력을 상실합니다. 자극적인 말 한마디, 정치인의 실언 하나에 온 나라가 들끓다가 며칠 뒤면 망각의 늪으로 빠집니다.
런시먼은 묻습니다. "모두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면, 누가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인가?" 비명이 커질수록 토론은 불가능해지고,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기능을 잃은 채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사법화라는 도피처: 정치의 실종과 판사의 통치
정치가 소음으로 가득 차 해결 능력을 상실할 때, 권력은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합니다. 한국 정치가 보여주는 가장 비겁한 모습 중 하나는 모든 갈등을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사안마다 "법대로 하자"며 검찰의 캐비닛을 뒤지고 법원의 판결을 기다립니다. 런시먼은 이를 '기술 관료적 독재'의 전조로 봅니다. 선출된 권력이 스스로의 무능을 자인하며 '법치'라는 이름 아래 사법 기구 뒤로 숨는 순간, 민주주의는 고사합니다. 판결문은 갈등을 종결시킬지 모르나,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합니다.
결국 우리 시대의 정치는 시민을 '구경꾼'으로 만들고, 갈등은 '수사 대상'으로 치부하며, 미래는 '소음' 속에 파묻어버렸습니다. 런시먼의 독설은 명확합니다. "당신이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느끼는 그 뜨거운 정의감은 사실 국가가 당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던져준 장난감에 불과하다."
런시먼이 현대 국가를 향해 던지는 가장 잔인한 통찰은 바로 ‘시간의 불일치’입니다. 국가는 영원할 것처럼 굴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의 시계는 오직 다음 선거라는 짧은 주기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이 시차 사이에서 희생되는 것은 언제나 ‘목소리 없는 미래’입니다. 한국의 저출생 재앙은 런시먼의 시각에서 볼 때 단순한 인구 통계의 위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거대한 계약 체계가 사실상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 사기)’였음을 알리는 파산 신고입니다.
미래를 먹어 치우는 ‘현재의 독재’
런시먼은 현대 민주주의가 ‘현재 편향적(Presentist)’이라고 단언합니다. 표를 가진 사람들의 요구는 즉각적이고 강렬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투표권이 없는 미래 세대의 요구는 아무런 정치적 힘이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는 이 ‘현재의 독재’가 가장 극단적으로 치닫는 현장입니다. 연금 개혁, 건강보험 재정, 부동산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정은 ‘지금의 유권자’를 달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런시먼은 묻습니다. "미래의 자원을 끌어다 현재의 갈등을 봉합하는 행위가 사기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기성세대의 자산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청년들의 주거 사다리를 걷어차고,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 할 국가 채무를 눈덩이처럼 불리면서도 국가는 "모두를 위한 복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폰지 사기의 수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미래 세대)의 돈으로 먼저 들어온 사람(현재 세대)의 수익을 보전해주다가, 결국 신규 가입자가 끊기면 시스템 전체가 붕괴하는 파국 말입니다.
저출생: 시스템 붕괴를 직감한 동물적 거부
한국의 합계출산율 0.7명대라는 숫자는 세계가 경악하는 수치지만, 런시먼의 논리로 보면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반응입니다. 청년들은 국가라는 기계가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연료로 삼아 기득권의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국가의 무능: 수백조 원을 저출생 대책에 쏟아부었다는 정부의 발표는 기만입니다. 그 돈의 대부분은 근본적인 구조 개혁이 아니라, 낡은 시스템의 균열을 메우는 임시방편에 쓰였습니다.
희망의 거세: 런시먼은 국가가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상실할 때 시민들은 번식을 멈춘다고 말합니다. 내 아이가 이 거대한 다단계 사기극의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출생을 거부하는 것은 시민이 국가에 던질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유일한 ‘비협조 투쟁’입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리바이어던
런시먼은 국가가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작고, 개인의 삶을 세세히 간섭하기에는 너무 비대하다고 꼬집습니다. 기후 위기나 인구 절벽 같은 거대한 파도는 국가라는 울타리를 비웃으며 밀려오는데, 국가는 여전히 ‘국경 안의 지지율’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자유를 양도했지만, 이제 국가는 거대한 자원 배분 기계로 전락하여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를 두고 싸우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런시먼의 독설은 뼈아픕니다. "당신의 국가는 당신의 노후를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사기극에 참여하기를 강요할 뿐이다." 결국 저출생은 한국 사회가 마주한 '진실의 순간'입니다. 국가라는 이름의 리바이어던은 이미 죽어 썩어가고 있으며, 그 악취를 가리기 위해 미래 세대의 희망을 향수처럼 뿌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파산한 계약서를 찢어버리고, 전혀 다른 방식의 공동체를 상상해야만 합니다.
런시먼은 현대 민주주의가 '선거'라는 형식에 갇혀 질식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우리가 매번 더 나은 인물을 뽑으려 애쓰지만, 결국 여의도라는 거대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정치인들을 보며 절망하는 이유를 구조에서 찾습니다. 선거는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이며, 승자독식의 경쟁 속에서 정치는 필연적으로 적대와 증오를 먹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에 런시먼이 내놓은 처방전은 경악스럽습니다. "선거를 폐지하고 제비뽑기로 통치자를 정하자"는 것입니다.
선거라는 '민주적 독재'의 종말
우리는 투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런시먼은 선거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고사시킨다고 일갈합니다. 선거는 '말 잘하는 사람', '돈 많은 사람', '권력의 뒷배가 있는 사람'만을 걸러내는 필터입니다. 결국 여의도는 우리와 닮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보다 훨씬 탐욕스럽거나 훨씬 매끄러운 이들의 전유물이 됩니다.
한국의 국회를 보십시오. 300명의 의원 중 평범한 월급쟁이, 경력 단절 여성, 고립된 청년의 삶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런시먼은 제안합니다. "여의도를 해체하고, 인구 통계에 맞춰 무작위로 추출된 300명의 보통 시민에게 입법권을 주자." 이것이 바로 고대 아테네가 실천했던 '추첨제 민주주의(Sortition)'의 귀환입니다.
'전문성의 신화'라는 기만
추첨제에 대한 가장 큰 반발은 "평범한 시민이 예산을 짜고 법을 만들 수 있느냐"는 의구심입니다. 런시먼은 이 질문에 가장 독한 조소를 보냅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정말로 전문적입니까? 그들이 아는 유일한 전문성은 다음 선거에서 이기는 기술뿐 아닙니까?"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은 다음 선거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대표의 눈치를 보거나, 공천을 받기 위해 극렬 지지층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죠. 그들은 전문가들의 조력을 받으며 오직 '상식'과 '공공의 이익'만을 토론하게 됩니다. 한국의 고질적인 정쟁—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사는 멸절의 정치—은 추첨제라는 낯선 도구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 의회는 더 이상 '누구의 편인가'를 묻지 않고 '무엇이 옳은가'를 묻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의도라는 성역을 무너뜨리는 가장 민주적인 방법
런시먼은 추첨제가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의 선거 민주주의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제비뽑기는 인간의 야심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입니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부동산, 연금, 교육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해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해법을 실행했을 때 잃게 될 '표'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기 2년의 추첨직 의원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임기를 마치면 다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만든 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런시먼의 독설은 여의도의 높은 담벼락을 향합니다. "민주주의는 엘리트들이 시민을 대신해 싸워주는 드라마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 중 누구라도 권력의 자리에 앉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이다." 제비뽑기는 그 믿음을 실현하는 가장 도발적이고도 유일한 길입니다.
런시먼이 던지는 가장 불온하고도 논리적인 폭탄은 바로 '아동 투표권'입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가 '성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하면서, 인류의 가장 긴 미래를 책임져야 할 주체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고 일갈합니다. 특히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한국에서 이 제안은 단순한 파격을 넘어, 기득권화된 노년층 중심의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가장 날카로운 독설이 됩니다.
6세 아이에게 투표권을? 런시먼의 도발적 논리
"애들이 뭘 안다고 투표를 합니까?"라는 질문에 런시먼은 차갑게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치매를 앓는 노인이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성인의 투표권은 왜 박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투표권을 '지적 능력의 증명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으로 정의해 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아이들에게만 '무지'라는 낙인을 찍어 문밖으로 내쫓습니다.
런시먼은 6세 정도면 자신의 선호도를 표현할 수 있으며, 그보다 어린 영유아의 경우 부모가 대리권을 행사하더라도 그것이 현재의 '미래 부재 정치'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합니다. 아이들은 국가의 결정에 가장 오랫동안, 가장 깊게 영향을 받을 당사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칼자루(투표권)를 쥐여주지 않는 것은, 내일의 주인에게 오늘의 빚잔치를 강요하는 명백한 민주주의적 폭거입니다.
'실버 민주주의'의 함정과 한국적 비극
한국의 정치는 이미 '실버 민주주의'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50대 이상인 상황에서, 어떤 정치인도 장노년층의 표심을 거스르는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자산 보존의 정치: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고, 연금 수령액을 유지하며, 의료 혜택을 늘리는 정책에는 수조 원이 투입됩니다. 반면 교육 환경 개선이나 청년 주거 지원은 매번 '재정 건전성'이라는 벽에 부딪힙니다.
미래의 식민화: 런시먼의 시각에서 한국의 청년과 아이들은 '미래라는 식민지'의 주민들입니다. 현재의 유권자들은 미래 세대의 노동력과 세금을 담보로 현재의 안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투표권이 없다면, 정치인들은 영원히 20년 뒤의 재앙(기후 위기, 연금 고갈)보다 내일 아침의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여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표가 정치를 '장기적'으로 바꾼다
아이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는 순간, 정치는 '본능적'으로 미래를 향하게 됩니다. 정치인들은 이제 경로당뿐만 아니라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찾아가 공약을 내걸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린이 복지'를 늘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예산 편성 우선순위가 '현재의 소비'에서 '미래를 위한 투자'로 강제 이동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런시먼은 확신합니다. 아이들의 표가 정치적 상수가 될 때 비로소 국가는 '유통기한'을 걱정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이죠.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은 이 제안을 비웃겠지만, 런시먼의 독설은 그 웃음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당신들이 아이들의 투표권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표가 당신들의 안락한 현재를 위협할까 봐 두렵기 때문 아닌가?" 리바이어던이 살아남기 위해 미래를 잡아먹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우리는 이제 아이들의 손에 투표용지라는 방어용 무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데이비드 런시먼이 우리에게 던진 이 지독한 독설들은 결코 '정치적 냉소'를 권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숨 쉬듯 당연하게 여기는 국가라는 기계가 이미 고장 났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는 '절박한 희망'의 주문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에게 우리의 자유와 안전을 저당 잡힌 채, 그 기계가 우리를 짓밟아도 "나를 지켜주기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여왔습니다. 런시먼은 이 기묘한 의존 관계를 '정치적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여의도의 소음이 민주주의라고 믿으며 침몰하는 배 위에서 1등석 자리를 두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이 기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배의 설계도를 다시 그릴 것인가. 런시먼이 제시한 '추첨제'와 '아동 투표권'은 단순한 정책 제안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의 기득권 체제를 지탱하는 '선거'와 '성인 중심주의'라는 성역에 던지는 돌직구입니다.
민주주의는 형태가 아니라 '정신'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4년마다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타인의 미래를 함부로 약탈할 수 없으며, 우리 중 평범한 누구라도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런시먼의 질문을 통과한 뒤 우리가 마주해야 할 민주주의의 진짜 얼굴은 훨씬 더 불편하고 낯설 것입니다. 그것은 전문가가 아닌 이웃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내일의 안락함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생존을 먼저 고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는 '시민'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징표입니다.
리바이어던의 장례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제 리바이어던의 그림자에서 걸어 나옵시다. 국가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를 데이터로 관리하고 세금의 원천으로 취급할 뿐입니다. 런시먼의 독설은 여기서 멈추지만, 우리의 정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여의도의 화려한 조명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비뽑기로 뽑힌 평범한 시민들이 모인 소박한 회의실에, 그리고 처음으로 투표권을 쥐고 미래를 고민하는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 있습니다. 낡은 시스템과 함께 서서히 질식할 것인가, 아니면 런시먼의 대담한 질문을 들고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
"당신은 오늘, 이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계를 멈추는 모래알이 될 것인가?" 런시먼의 마지막 질문이 당신의 귓가에 서늘하게 박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