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알고리즘 |수식의 통제: 보이지 않는

설계도가 만든 감옥

by 안녕 콩코드


​중세의 수학자, 현대의 유령이 되다


​언어는 때로 한 개인의 이름을 박제하여 인류 전체의 운명을 규정하는 형용사로 바꾸어놓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호흡하듯 마주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단어의 뿌리는 9세기 페르시아의 수학자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이름에 닿아 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건너온 ‘0’이라는 혁명적인 개념을 아랍의 수식으로 체계화하여 유럽에 전파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은 라틴어화되어 ‘알고리트미(Algoritmi)’가 되었고, 세월의 풍화를 거쳐 오늘날 문명을 가동하는 거대한 보이지 않는 설계도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알콰리즈미가 수학의 기틀을 닦으며 꿈꿨던 것은 ‘해결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복잡하게 얽힌 세상의 문제들을 명확한 단계별 절차로 나누어 누구나 정답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했습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에서 유래한 ‘알제브라(Algebra, 대수학)’가 ‘부서진 것들의 재결합’ 혹은 ‘복원’을 의미했듯이, 알고리즘은 본래 혼돈 속에서 질서를 회복하려는 선한 의지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1,2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름은 본래의 맥락을 잃고 거대한 유령이 되어 우리 곁을 떠돕니다. 과거의 알고리즘이 ‘문제를 푸는 도구’였다면, 현대의 알고리즘은 ‘인간을 푸는 도구’로 진화했습니다. 이제 수식은 숫자를 계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욕망과 선택, 심지어는 고독의 깊이까지 계산하여 그 결과를 우리 앞에 내어놓습니다. 도구였던 수식이 주인이 되어 인간의 사유를 설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매끄러운 절차라는 이름의 통제


​알고리즘의 본질은 ‘단계적인 절차’에 있습니다.


​어떤 입력을 넣었을 때, 미리 정해진 논리 구조를 통과하여 반드시 특정한 출력을 내놓게 만드는 강제적인 흐름입니다. 이 과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감정의 동요도, 망설임의 여백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논리적인 선후 관계만이 지배하는 이 매끄러운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는 ‘변수’로 치환됩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알고리즘의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오늘 마실 커피의 종류를 추천받고, 내가 읽어야 할 뉴스의 순서를 배정받으며, 내가 호감을 느낄 법한 타인의 얼굴을 제안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너무도 매끄러워 우리는 이것을 ‘편리함’이라 부르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편리함의 이면에는 지독한 ‘거세’가 숨겨져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우리 대신 선택을 내릴 때마다,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능력인 ‘우연한 마주침’과 ‘고통스러운 결단’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것이 아는 것은 ‘과거의 나’일 뿐입니다. 수식은 내가 어제 클릭한 것들을 토대로 ‘내일의 나’를 규정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변화할 가능성을 상실한 채, 자신의 취향이라는 이름의 원형 감옥에 갇힙니다. 이것은 1편에서 논했던 크리스털의 투명함이 한 단계 더 진화한 형태입니다. 크리스털이 우리를 세상과 격리했다면, 알고리즘은 그 격리된 방 안의 가구 배치와 조명 밝기, 심지어 우리가 꾸어야 할 꿈의 종류까지 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검은 상자(Black Box)와 신성한 수식


​현대 알고리즘의 가장 서늘한 지점은 그것이 ‘검은 상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알콰리즈미의 수학은 논리적 인과관계가 명확했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누구나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딥러닝과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개발자조차 그 내부의 연산 과정을 완벽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수만 개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연산은 오직 결과값으로만 자신을 증명합니다.


​이 지점에서 알고리즘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신앙’의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우리는 왜 검색 결과의 첫 페이지에 이 정보가 떠 있는지, 왜 내가 이 상품을 사야 한다는 추천을 받는지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시스템의 권위를 믿고 따릅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거부할 수 없는 명령, 그것은 고대 사회의 신탁(Oracle)과 다르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성전의 사제 대신 알고리즘의 연산을 받들며, 수식이 내린 판결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용 등급을 수용합니다.


​이 검은 상자 안에서 인간의 ‘신체성’은 완벽하게 소외됩니다.


​수식에는 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겪는 삶의 비릿한 통증이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을 ‘노이즈(Noise)’로 간주하여 제거합니다. 오직 데이터화될 수 있는 것만이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알고리즘의 지도에 따라 길을 찾고, 알고리즘의 평가에 따라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의 감각이 보내는 신호를 불신하게 됩니다.


​내 발바닥이 느끼는 지면의 질감보다 화면 속 GPS의 점이 더 정확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수식의 통제 아래 놓인 자발적 포로가 됩니다.



​스키너의 상자와 디지털 도파민


​행동심리학자 B.F. 스키너는 쥐가 지렛대를 누를 때마다 먹이가 나오는 상자를 통해 생명체가 어떻게 보상 체계에 길들여지는지를 증명했습니다. 현대의 알고리즘은 인류 전체를 거대한 ‘스키너의 상자’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뇌가 보상과 쾌락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치밀하게 계산합니다.


​우리가 SNS의 피드를 아래로 당겨 새로고침을 할 때, 알고리즘은 ‘가변 보상’이라는 수식을 가동합니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기대감이 주는 쾌락은 일정한 먹이가 나올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중독을 일으킵니다. 수식은 우리가 화면에 머무는 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리의 불안과 분노, 욕망을 연료로 사용합니다.


​이 통제는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친절하고 매혹적입니다. 수식은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을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던져줍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합니다.


​자유 의지는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최적화된 경로’ 안에서 서서히 마비됩니다. 2편의 주제인 수식의 통제는 바로 이 지점, 즉 우리가 스스로 통제당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만든다는 데 그 진정한 공포가 있습니다. 아바타라는 가상의 자아로 승천하기 전, 우리는 먼저 알고리즘이라는 매끄러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부품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기록하는 자의 저항: 오류의 틈새를 발굴하다


​수필가는 알고리즘이 ‘노이즈’라고 부르며 삭제해버린 것들을 다시 주워 모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수식은 효율을 숭상하지만, 수필은 ‘비효율’의 가치를 증언합니다. 알고리즘은 가장 빠른 길을 가라고 명령하지만, 기록하는 자는 일부러 길을 잃고 헤매며 그 과정에서 마주친 이름 없는 잡풀과 낡은 벽돌의 질감을 기록합니다. 수식은 우리를 취향의 집단으로 분류하지만, 문장은 그 분류를 거부하고 단 한 명뿐인 구체적인 ‘개인’의 고독을 이야기합니다.


​[어원으로 읽는 문명]의 두 번째 장을 마무리하며, 나는 알콰리즈미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그가 0을 통해 발견한 것은 결코 ‘인간의 부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인간 사유의 무한한 가능성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알고리즘이 설계한 매끄러운 문장들을 거부합니다.


​대신 비문(非文)이 섞이고 호흡이 거칠지라도, 수식이 결코 예측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뒤틀린 진심을 적어 내려가려 합니다. 알고리즘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은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계산되지 않는 슬픔을 느끼고, 추천되지 않는 길을 걸으며,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육체의 고통을 껴안는 것. 그 예기치 못한 오류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수식의 통제를 뚫고 다시 ‘살아있는 존재’로 회복되는 기적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크리스털의 방 안에서, 알고리즘이 짜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당신에게 나는 묻습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 중, 수식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은 단 1분이라도 있었습니까? 그 1분이 바로 당신이 진짜로 살았던 유일한 시간일지 모릅니다.



월, 화, 목 연재
이전 01화크리스털 | 관조의 오만: 투명한 장벽 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