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존재의 냄새와 부재의 철학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감각적 고독과 절대적 욕망

by 콩코드


“그는 냄새가 없었다.”
이 간결하고 낯선 문장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 《향수》는 문학이 얼마나 낯설 수 있는가를 증명한 소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로 세계를 구성하고, 그 감각을 통해 한 인간의 존재와 부재를 철저하게 해부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후각이라는 비주류 감각을 전면에 내세워 인간 존재의 본질, 예술과 광기의 경계, 그리고 절대적 욕망이라는 깊은 질문들을 던진다. 《향수》는 단순한 살인자의 이야기도, 냄새에 대한 찬가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 증명의 은유로서의 향수, 그리고 비로소 인간이 되고자 했던 비인간의 기록이다.


서문: 냄새로 쓰인 소설, 언어의 반란


패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이야기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후각이라는 이질적인 감각을 통해, 패트리크 쥐스킨트는 인간 존재의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내면을 조용히 파고든다. 우리는 흔히 문학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이야기들을 접한다. 그러나 쥐스킨트는 그런 전통적인 감각의 틀을 깨고, 후각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쳐 놓는다. 냄새라는 감각은 대개 문학에서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만, 쥐스킨트는 이를 주요 감각으로 삼아 인간 존재와 욕망의 복잡한 미로를 탐구한다.


《향수》는 언어의 반란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각적, 청각적 묘사 대신 냄새라는 비가시적, 비청각적 감각을 소설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이다. 후각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작품은 언어와 감각의 경계를 허물며,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쥐스킨트는 후각을 문학적 장치로 변형시켜, 독자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후각 중심의 서사는 단순히 감각의 전달을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로 나아간다. 후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험하게 해주는 매개체로 작용하며, 그루누이의 여정을 따라가며 우리는 향기와 정체성, 욕망,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한 파격적인 성찰을 경험하게 된다. 쥐스킨트는 냄새라는 감각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며, 이 소설은 문학적 실험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서사 기법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쥐스킨트가 시도한 후각 중심의 서사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여는 작업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감각이 인간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의 본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려 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감각을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 존재의 심오한 부분을 탐구하는 문학적 실험이자 언어와 감각의 파격적인 만남이다.



후각이라는 감각의 전복

“그는 단 한 번도 사랑받은 적이 없었고, 그래서 사랑이란 냄새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문학은 오랫동안 눈으로 세계를 읽어왔다. 묘사는 시각을 따라 전개되고, 인물은 외모로 인식되며, 풍경은 빛과 색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읽는다는 행위를 '보는 것'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런데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향수》에서 이 오래된 문학의 습관을 무참히 뒤집는다. 그는 눈이 아니라, 코로 읽게 한다.


《향수》는 후각이라는 비주류 감각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감각의 위계를 전복하고, 인간 존재의 인식을 새롭게 설정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보잘것없는 외모와 말 없는 성격으로 존재감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각이라는 단 하나의 초감각적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단순한 냄새 구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해석하고 분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절대적 인지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단순한 향기나 악취를 넘어 존재의 흔적이자 정체성의 언어로 기능한다. 어떤 이는 라벤더처럼 고요하고, 또 어떤 이는 기름기 어린 고기처럼 추악하다. 그루누이는 냄새를 통해 사람의 본성을 읽고, 그 냄새들 속에서 자기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아무 냄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쥐스킨트는 여기서 후각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론적 감각으로 끌어올린다. ‘냄새가 없다’는 말은 이 소설에서 곧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은 냄새 없이 사랑받을 수 없고, 기억될 수도 없다. 냄새는 곧 삶의 증표이며, 죽음 이후에도 남는 감각의 흔적이다. 그루누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가장 강렬한 향기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런 점에서 《향수》는 감각의 문학을 실험한 소설인 동시에, 인간 존재를 향한 철학적 탐색이다. 시각과 언어로는 담기지 않는 그 무엇—냄새라는 세계를 통해 쥐스킨트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던진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 — 그루누이의 고독

“그는 냄새가 없었다. 다시 말해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는 감각을 통해 인식된다. 우리가 누구를 본다는 것은 그를 인식하고, 받아들인다는 사회적 행위다. 하지만 《향수》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후각이라는 감각의 세계에서조차 부재한 존재였다. 그는 냄새가 없었다. 단지 냄새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체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쥐스킨트는 이 부재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루누이는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기에, 타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고, 때론 동물보다도 더 낮은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그 무취성(無臭性)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천재적 후각 능력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모든 냄새를 감지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감지할 수 없다.


그루누이의 여정은 사랑받고자 하는 여정이 아니라, 인정받고자 하는 존재의 필사적 투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나’의 증표를 그는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존재를 ‘발명’해야 했다. 피와 지방, 뼈와 향으로 구성된 인위적 정체성. 살인의 정수에서 추출된 향수를 통해, 그루누이는 세상에 자기 자신을 덧씌운다.


하지만 그 향기는 진짜 ‘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에 비친 가장 이상적인 ‘타자’ 일뿐이다. 그루누이는 그 향수로 세상의 숭배와 사랑을 얻지만, 정작 자신의 존재는 더 깊이 지워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루누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낸 허상의 향기를 사랑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인간이 사랑받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진짜 나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걸친 냄새, 표정, 말투, 사회적 가면 때문인가?”


그루누이는 이러한 질문에 극단적인 방식으로 답한다.

그는 냄새가 없음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자’였고, 냄새를 얻었을 때는 ‘자기가 아닌 자’가 되었다. 존재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의해 구성되기에, 그는 끝내 진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향수는 무엇을 덮고 있는가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가릴 수 있다.”

향수는 원래 자신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다. 자연의 냄새 위에 덧씌워지는 문명적 장막이며, 인간이 야성에서 문명으로 넘어오면서 만들어낸 ‘냄새의 의복’이다. 그러나 《향수》에서 향수는 단지 미(美)의 보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위장하고 조작하고 왜곡하는 무기이며, 그루누이의 경우, 자기 존재를 발명하고 구성하기 위한 궁극의 가면이다.


그루누이는 아무 향기도 없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향수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없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향수는 단순한 향기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감각과 마음을 지배하고, 그를 사랑하게 만들고, 신격화하게 하며, 심지어 죽음도 불사하게 만든다.


향수는 그루누이를 ‘그루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준다. 사람들은 그 향기를 통해 그에게 다가오고, 경배하고, 찬탄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랑은 그루누이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의 향수, 곧 허상과 환상, 욕망과 투사에 향한 것이다.


쥐스킨트는 이 지점에서 인간 감정의 허상을 정면으로 직시한다. 향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실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향기에 투영된 이상적인 이미지, 욕망의 대상, 자신이 갈망하던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루누이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랑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끝내 그 누구도 진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모든 향수와 함께 자기 자신도 파괴해 버린다.


결국 향수는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부재를 감추는 장치였다. 향수는 그루누이의 외로움을 덮고 있었고, 그의 무취를 감추고 있었고, 그의 죽음보다 더 깊은 고독을 숨기고 있었다.



예술인가, 욕망의 결정체인가

“그의 향수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었다.”

그루누이가 만들어낸 마지막 향수는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인간의 살결과 감정, 젊음과 순수를 정밀하게 채취하고, 추출하고, 정제하여 완성된 결정체. 그것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과 완결성을 지닌, 냄새로 구현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향수는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시선을 끌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누군가를 무릎 꿇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예술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미를 위한 미인가, 아니면 욕망의 도구인가.

그루누이의 향수는 아름답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무섭도록 음험하다. 향수를 맡은 사람들은 제 이성을 잃고, 자신 안의 가장 원초적 욕망에 무릎 꿇는다. 쾌락과 흥분, 사랑과 헌신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한순간 그루누이는 신처럼 추앙받는다.


그가 만든 향수는 ‘인간의 순수함’을 증류한 것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인간의 탐욕과 집단적 광기에 의존한다. 예술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의 감각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쥐스킨트는 다시,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

“예술은 본디 조작인가?”

“우리가 어떤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그것은 자유로운 반응인가, 아니면 길들여진 반응인가?”


그루누이는 자신의 향수로 모든 것을 얻는다. 사랑, 숭배, 용서, 무죄.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진심으로 이해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그루누이가 아니라, 그가 만든 향기의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창조자였지만, 동시에 철저히 고독한 존재였다.

이 지점에서 향수는 예술이라기보다, 인간 욕망의 집결체로 드러난다. 감각을 무장해제시키고, 이성을 마비시키며, 환상을 현실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장치.

그루누이가 만든 향수는 미(美)가 아니라, 욕망이 만든 피라미드의 정점이다.


그래서 이 향수는 결국 예술이 아니라 질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아름다워서 사랑하는가, 아니면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철학적 결말 - 존재의 역설

“그는 사라졌다. 향기도, 이름도, 기억도 없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완전히 존재했다.”

그루누이는 마지막 향수를 남김없이 몸에 뿌린다. 그리고 그 향기는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거지들, 떠돌이들, 인간 군상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사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먹어치운다.


이 장면은 단순한 쇼크로 쓰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선언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루누이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존재하고 싶어 했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존재하지 않던 자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냄새가 없었다. 이는 이 소설의 핵심적 은유다.

향이 없다는 것 = 타인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 =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루누이는 향수를 통해 인식되기를, 사랑받기를, 존재를 ‘확신’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궁극의 향수를 완성하고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그 순간, 그는 가장 깊은 소외와 무의미를 체감한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이 만든 ‘가짜 그루누이’를 사랑하는 것이며, 진짜 그는 여전히 무취의 허공 속에 부유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사랑한 척’ 하는 이들을 향해 마지막 향수를 뿌리고, 그들의 집단적 탐닉과 광기를 이용해, 스스로를 파괴한다.

그루누이는 자신이 창조한 향기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쥐스킨트가 던지는 ‘존재의 역설’이다.


존재하고 싶어 했던 자가, 결국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완성된다.

가장 강렬한 향기 속에서, 가장 무취한 죽음을 맞는다.


그루누이의 죽음은 파괴가 아니라, 해방이기도 하다.

자신의 향기로부터,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그는 처음으로 진짜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부정이라는 형태로만 가능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비극적 해소이자 철학적 완결이다.



맺음말. 감각을 넘어선 인간 이해의 시도


《향수》는 냄새를 다루는 소설이지만, 진짜로 탐구하는 것은 ‘감각 너머의 인간’이다.

그루누이의 여정은 단지 완벽한 향기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탐구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인식되는가"**라는 질문을 품은, 존재론적 여정이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은 후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타인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혐오한다.

쥐스킨트는 이 미세한 감각 하나로, 인간이 얼마나 감각에 지배받는 존재인지, 그리고 그 감각을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지를 낱낱이 드러낸다.


그루누이는 감각의 천재였지만, 감정의 불구자였다.

그는 냄새를 통해 세상을 꿰뚫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가 만든 향수는 신을 만들 수 있었지만, 친구 하나를 만들지 못했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쥐스킨트는 말한다.

감각은 인간을 이해하는 창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인간에 도달할 수 없다.


《향수》는 미각도, 촉각도 아닌, 가장 본능적인 후각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한 최초의 고전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감각의 해체를 통해 인간 본질로 다가가려는 철학적 시도였다.

우리가 진정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낄 때, 그것은 그 사람의 향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그 향기에 덧씌운 환상 때문일까?


그루누이의 향수는 사라졌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바로 《향수》라는 작품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다.


"향기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 향기를 쫓는 마음만은,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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