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앞에서 멈춘 호흡

by 또바기

퇴근길, 나는 늘 횡단보도 앞에서 멈춘다.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 몇십 초는 하루의 분주함 속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고요한 시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각자 자기만의 호흡에 집중한다. 나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오늘 내가 얼마나 숨 가쁘게 살아왔는지 실감한다. 횡단보도 앞에서의 멈춤은 단순한 정지가 아니라, 내 삶의 호흡을 확인하는 작은 의식이다.

횡단보도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직급도, 나이도, 사연도 상관없이 모두 같은 신호를 기다린다. 길 건너편을 향한 발걸음은 다 다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같은 자리에 묶여 있다. 누군가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또 누군가는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무심히 발끝을 굴리기도 한다. 그 모습들을 바라보면 묘하게 위로를 느낀다. 나만 바쁘게 사는 게 아니고, 나만 숨을 고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빨간 불빛은 멈춤을 강요하지만, 동시에 여유를 허락한다. 신호가 바뀌기 전까지는 아무도 건널 수 없다. 그 어쩔 수 없음 속에서 오히려 자유가 생긴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진다. 걷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오로지 기다리면 된다. 그래서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다. 강제로 부여된 멈춤이 내 안의 속도를 천천히 가라앉힌다.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자주 나를 돌아본다. 오늘 하루 나는 얼마나 서두르며 살았는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건너편에 보이는 건물과 불빛은 마치 내게 남은 길을 보여주는 듯하다. 저 길을 건너야 집에 닿고, 저 길을 건너야 오늘이 끝난다. 하지만 그 끝에 닿기 전,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하루는 단숨에 흘러가 버리고, 나는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가게 될 것이다.

가끔은 초록 불로 바뀌자마자 뛰듯이 건너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급한 발걸음을 보면서도,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을 때가 있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는 날에는 일부러 더 늦게, 더 느리게 발을 옮긴다. 그러면 거리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건물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빛,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서두르지 않으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횡단보도는 그 사실을 가장 확실히 알려준다.

어릴 적 기억 속 횡단보도도 떠오른다. 손을 꼭 잡아주던 엄마의 따뜻한 손,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뛰고 싶어 안달 나던 어린 마음. 그때의 횡단보도는 세상과 나를 잇는 커다란 다리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혼자 건너지만, 여전히 횡단보도 앞에서는 그때의 설렘과 긴장이 겹쳐진다. 삶의 길목마다 건너야 할 횡단보도가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멈추고, 기다리고, 다시 건너는 과정이 결국은 인생의 흐름과 다르지 않다.

퇴근길의 횡단보도는 하루를 정리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건너기 전에는 아직 일의 여운이 남아 있고, 건너고 나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시작된다. 불빛 하나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그 짧은 멈춤을 소중히 여긴다. 단 몇십 초의 기다림이지만, 그 시간에 내 마음은 하루를 내려놓고 내일을 준비한다.

오늘도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사람들 사이에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빨간 불이 초록으로 바뀌는 순간, 발걸음을 옮기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오늘도 여기까지 잘 왔다고, 이제는 집으로 가도 된다고. 횡단보도 앞에서 멈춘 호흡은 그렇게 내 하루를 부드럽게 마무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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