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madicgirl Dec 03. 2016

D212.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는 법

Part2.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는 법, 북미 로드트립_미국







로드트립! 하면 뜨거운 사막을 가르며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썬루프 밖으로 몸을 내밀고 바람을 가르는 장면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추위와 졸음과의 싸움. 밤새 좁은 차 안에서 덜덜 떨며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쑤셔온다. 이 놈의 땅덩이는 얼마나 넓고 광활한지 몇 시간을 달려도 아무것도 없는 같은 풍경이 이어지니 눈에는 곧 졸음이 맺히기 일쑤. 배낭여행 중 달리는 버스 안에서 놓치는 풍경을 안타까워하던 내가 떠올랐는지 그는 자꾸만 내려서 사진을 찍겠냐고 묻는다. 힘들게 운전하는 그를 기쁘게 하려고 열심히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지만 그조차 며칠이 반복되자 시들해져 버렸다. 


운전만 아니라면 우린 고요함을 곧잘 즐기는 사람들이다. 연애 초반, 말없이 밥을 먹어도 불편하지 않은 서로를 딱 마음에 들어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가뜩이나 말이 많지 않은 두 사람이, 북적이는 버스와 호스텔을 오가다 이렇게 하루 종일 단 둘이서만 한 공간에 앉아 하루를 보내게 되니 정적의 순간은 더 자주 찾아온다. 침묵이 무서운 것은 지독한 잠의 유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보조석에 앉은 나의 탓이 더 크지만 평소 차를 타면 멀미하듯 잠에 빠져드는 나로선 내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일을 해내는 기분. 그 와중에 볼륨을 키워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귓가에 맴도는 자장가가 되어 달달 외울 지경이다. 







여느 하루와 다름없이 끝없는 사막을 달리고 있는 오늘은 우리의 기념일. 수줍게 서로의 마음을 열어보였던 5월의 이날은 아직 한 번도 오지 않은 결혼기념일보다 더 익숙하고 특별한 날이다. 겨우내 칙칙했던 하늘이 빛나고 남들은 이미 한참 전에 벗어던진 두터운 겨울 옷들을 그제서야 벗어던지고 한껏 움츠러들었던 몸을 펼치는 투명한 연둣빛의 계절. 아직 조금 쌀쌀하지만 바깥바람을 맞으며 맥주 한 모금 하기 딱 좋은 날씨. 나에겐 진짜 싱그러운 봄의 시작을 의미하는 이날이 올 때마다 우리는 산으로, 강으로 바람을 맞으며 뛰쳐나갔다. 근사한 레스토랑보다 김밥 한 줄을 먹어도 푸른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겐 이 하루를 더 특별하게 보내는 방법이니까.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잇는, 아무것도 없는 길 한가운데에는 계절이 없다. 나뭇가지들이 앙상한 고원지대에는 봄은 커녕 겨울이 한창이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바로 어제 콜로라도의 산 위에서는 눈과 우박 세례를 피해 도망쳐야 했는데 하루를 꼬박 달려 사막에 이르자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겨울과 여름 사이, 그런 의미에서라면 봄인가. 







아침부터 쉬지 않고 달려왔더니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배도 고프다. 차를 멈춰두고 껴입었던 옷들을 벗어던지고는 산 지 며칠 지난 빵을 와구와구 뜯어먹는다. 오늘 양치는 했지? 대답을 얼버무리는 그는 보나 마나 오늘도 양치를 나 몰래 건너뛴 것 같다. 으이그. 꼬질꼬질하길 이를 데 없지만 천진난만하게 빵을 먹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몇 달 전 내가 삐뚤빼뚤 잘라놓은 머리도 좋다며 손질 한번 안 하고 여태껏 더벅머리로 세상을 누비는 그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파랗고 저 멀리 모뉴먼트 밸리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엄청난 이 여행을 일상으로 보내고 있는 우리가 신기해지는 순간이다. 8년 전 그때 상상할 수 없었던 곳에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으로, 하지만 참 우리답게 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자연을 즐기는 일조차 요란한 장비와 보여주기 위한 사진들로 먼저 도배가 되어버리는 오늘날. 그런 화려함 따위 없어도, 눈이 번쩍 뜨이는 스릴이 없어도, 조금은 더럽고 힘들어도, 비록 피곤에 절어 길 위에서 하품을 쏟아내더라도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좋다. 추위를 이겨내며 끓여먹는 라면 한 그릇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되었던 어제, 모래바람 속에서도 따뜻한 사막의 공기에 감사할 수 있는 오늘처럼 특별한 풍경을 담담하게 살아내고 또 담담한 하루를 특별하게 살아내는 우리가 참 좋다.


또 다른 5월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맞이하게 될까. 시간이 흐르면 이 순간도 희미해질 테지만 매년 5월이 오면 떠올릴 거야. 캠핑장에서 만난 작은 토끼와 푸른 대지와 붉은 사막을 건너던 우리를. 





매거진의 이전글 D207. 여행 제 2막, 겁 없는 로드트립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