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쓰겠습니다
‘여행은 결국 사진으로 남는다’‘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여행지에서 한번은 싸우게 된다’- 여행과 관련한 흔한 이야기다. 2009년, 우리의 스페인 여행도 그랬다.
우리 셋은 2000년 공무원으로 발령 받으면서 처음 만났다. 근무지는 달랐지만 비슷한 업무를 맡아 모르는 것을 서로 물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곧, 보고하고 지시받는 시스템에 빼앗기는 에너지의 댓가로 받는 게 월급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매년 휴가철마다 떠나는 해외여행이 가장 큰 기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가까운 일본에서 시작해 홍콩, 필리핀, 베트남 같은 동남아 패키지 여행만 하다가, 10년차 되던 해 스페인 자유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 처음인 우리는 흥분과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역할을 나누어 현지 민박집을 예약하고 항공권을 사고 자유여행 지역과 투어 받을 지역을 구분하면서 여행 일정표를 채워갔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그라나다와 세비야. 2009년 5월, 지금 생각해도 미소가 떠오르는, 햇살 좋았던 그곳으로 우리는 떠나게 되었다.
출발 직전 한 친구는 공항에서 여권이 없어져서 혼비백산 했고, 또 한 친구는 바르셀로나에서 새로 산 선글라스를 잃어버려, 구경하며 들렀던 모든 가게를 역주행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여행 중간쯤 되는 기간에 한 친구랑 가벼운 말다툼을 하여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버렸다. 도착하고 바로 그라나다와 세비야를 현지 투어 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이국적인 분위기와 멋진 날씨로 ‘너무 좋다’만 외쳤었는데,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와 우리끼리 자유여행을 시작하면서, 길을 찾고 헤매기도 하고 식당 메뉴를 정하면서 속상한 지점이 발생했던 것 같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총무를 맡았었는데 ‘그날의 총무’와 내가 숙소에 돌아와 말다툼을 했고 중간에 낀 한 친구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안절부절 했다. 불편한 잠을 잔 다음날 마르리드 왕궁과 프라도 미술관을 조용히 구경하고 마요르 광장과 솔 광장을 걷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전날만큼 심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개운하지도 않은 감정으로 숙소로 돌아가긴 싫었다. 두 친구도 같은 기분이었는지 걷는 속도가 느렸다. 우리는 큰 길을 벗어나 건물과 건물 사잇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자 큰 길과는 다른 분위기의 가게들이 불을 밝히고 저녁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와인 한잔 하고 갈까?”
“그래, 스페인 문어요리가 맛있다는데 안주로 시켜보자”
“뽈뽀 맞지? 가이드북에서 읽었었잖아”
어느새 우리는 야외 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와인과 뽈뽀와 해지는 마드리드의 거리에 취해 어제의 마음에서 놓여나자 다시 웃음과 장난과 남은 여행에 대한 기대가 차올랐다. 서로의 인생 샷을 찍어주고 세련된 매너를 가진 백발의 웨이터와도 사진을 찍었다.
그날 일정표에 없던 골목길로 불쑥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와인으로 붉어진 얼굴로 활짝 웃고 있는 우리를 사진으로 찍지 못했을 것이고, 팔다리를 자유롭게 휘적거리며 숙소로 돌아가던 우리를 기억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이어진 바르셀로나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반하고 구엘 공원에 탄성 지르며 보케리아 시장에서 하몽을 사먹었던 기억도 불편함 없이 떠올리지 못했을 테고. 편협한 마음에 친구와 싸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정에서 잠시 벗어났던 그 골목이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결국 사진으로 남은 그날의 한 장면은 “그때 우리 싸웠었지”가 아니라 “그때 뽈뽀 참 맛있었지”로, 우리의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