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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lle Mar 07. 2019

강아지 작명의 세계

꽤 오래걸리는 여정


탐색


나에게는 과거를 미화시키는 매우 속 편한 (위험한) 버릇이 있지만, 대체로 다른 사람에 대한 기억들은 정직하게 보관되는 편이기에 조심스럽게 회상해본다.


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친구가 자기는 집에서 이름이 '삐삐' 라고 말해주었다. 그제야 그녀의 콧잔등에 골고루 뿌려진 주근깨와 찡긋거리는 눈매, 붉은색으로 염색한 머리색이 보였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지어줬어?"

"우리 엄마."

"우와..!"


부러웠다. 왜인지는 몰랐지만. 서른 살의 나는 안다. 연인 간의 비밀스러운 호칭과, 오래된 친구 사이의 별명과, 할머니가 손주를 강아지라고 부르는 것의 이유를. 열두살의 나는... 글쎄, 그저 어렴풋이 '삐삐' 라는 이름에 사랑이 담겨있다고만 느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물론, 이 기억 역시 상당히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요즘 내가 유년시절을 대하는 마음이긴 합니다. 

 

현재로 돌아와서.


예비 견주인 나와 남편에게 주어진 과제 중 하나는 강아지 이름 짓기였다. 우리는 야심차게 '삐삐' 같은 이름을 찾아나섰다.


강아지는 회색 푸들이며, 꽤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엄마개가 다이어트를 자주 하셨다고요.


회색 푸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 엄마 닮으면 위풍당당할 것 같은데.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 어디 없나? 예전에 맨날 보던 <반지의 제왕> 의 마법사 할배, 간달프는 어떨까? 개 이름을 그렇게도 짓나?


검색창에 적어본다.

간달프, 개 이름

검색버튼, 클릭. 졸지에 '간달프' 인 각양각색의 개들 사진이 끝없이 펼쳐진다. 주루룩 주루룩, 신나게 내려본다. 하나같이 회색에다 근엄한 표정은 덤. 털들은 어쩜 이렇게 다 꼬질꼬질한지.. 이 친구들은 간달프를 닮으려고 일부러 바닥을 털로 쓸고 다니는게 확실하다. 괜찮은데?


"요즘 개들은 철수? 같은 독특한 한국이름들 많더라."

"간달프는 영어이름이야."

"그렇긴 한데 간달프도 특이하잖아. 일반적이지 않다고."

"그럼 개 부를때 '간달프야~' 라고 해?"

"어."

"사람들 많은데서 개 부를때 큰소리로 '간달프~' 이럴거라고?"

"그럴거라고."

"..."


남편의 입이 낙타가 풀 뜯어먹는마냥 씰룩거린다. 그는 이렇게 의사표현을 한다. 몇 번이고 설득해보지만, 간달프 얘기만 나오면 씰룩씰룩. 그렇게 간달프가 조금씩 멀어지는 사이, 잡아놨던 휴가 일정이 되었다. 우리는 일단 독일로 떠났다. 강아지 이름은 아직 정하지 못한 채로.


발견


뮌헨. 이상하게 거리에서 관현악 연주가 들릴 것만 같은 도시. 3할은 김치 생각, 3할은 강아지 생각에 빠져 맹한 나와 달리, 남편은 도착 24시간 만에 독일과 백 퍼센트 사랑에 빠졌다 (외국병..? 응, 아니겠지요). 그리고는 본인에게 '루드윅' 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는 것이었다.


"독일에 온 기념으로 독일스러운 이름을 만들고싶어."

"기념? 자석 사는거 말고?"

"루드윅 어때."

 

아니, 이젠 내가 입을 씰룩거릴 차례인가. 일상 속 키치함을 추구하는 나와 달리, 내 남편은 가끔 진지하게 독창적이어서 놀랄때가 있다. 동시에 이것도 사랑이라면 그의 괴짜같은 모습을 지켜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또 무엇일까. 그래, 루드윅 하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알았어. 루드윅이라고 불러줄께.


뮌헨에 대한 기억. 지구 끝 까지 닿을 것 같은 푸른 하늘. 하늘을 배경삼아 솟구쳐있는 나무들과 오래된 건축물들. 그리고 내 옆에는 하루종일 맥주에 반쯤 취해 감탄하는 루드윅.


뮌헨에서의 3일차 아침. 대망의 옥토버페스트 날이다. 우리는 독일 전통복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카페에 앉아 (현대복 차림으로) 모닝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정신없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나에게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강아지 이름을 루드윅으로 하면 어때?"

"...?"

"나는 루드윅 1세, 강아지는 루드윅 2세."

"너랑 개랑 이름이 같아?"

"응 이름도 물려주잖아. 의미있을거 같은데."


그런데 말입니다. 갑자기 맘에드는 건 왜일까요. 진짜로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인에게 독일식 이름을 붙여주는 남편의 기상천외함 이후 더 놀랄게 없는건지. 아니면 설마, 루드윅 해프닝은 개이름까지 고려한 남편의 큰 그림인 건가? 그간 수 없이 고민했지만 이렇게 강아지 이름은 1분도 안되어 결정되었고. 동시에 우리집에는 루드윅이 둘이 되었다. 1세 (인간), 그리고 2세 (개).


이후에도 강아지에게는 많은 이름이 생겼다. 풀네임은 '루드윅' 이지만, 닉네임은 '루디'. 거의 '루디' 라고 부른다. 요즘은 더 줄여서 '루~' 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고칠땐 '루!디!' 라고 하고, 남편은 기분 좋을때 '루디루~' 라고 노래한다. 친한 언니는 매번 '루디이~' 라고 소리지르기도. 요즘은 나도 모르게 콧소리로 '우리 강아지~' 라고 할 때가 많다. 아, 그리고 거의 항상, 똥 치울때 강아지는 '이놈의 개시키' 가 된다.


엄청난 이름을 지어보겠다고 몇 주간 옥신각신 했던 때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된다. 시간이 지나니 너무 많은 이름들이 생겨버렸기 때문. 우리와 지내며 루디에게는 풀네임, 닉네임, 예쁠 때 부르는 이름, 미울 때 부르는 이름, 귀여울 때 부르는 이름, 사랑스러울 때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세상에는, 나와 남편만 아는 루디의 모습들이 있다. 어울리는 이름과 별명들은 같이 살다보면 다가오기 마련이다.


마치, 오늘 아침 엄청 큰 똥을 싸고 루디에게 '똥개' 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듯 말입니다.


이름은 루디. 어울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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