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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대디 Feb 20. 2020

나는 어떤 돼지인가?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를 보고

   

아내가 갑작스러운 젖몸살로 며칠간 꽤나 고생을 했다. 다행히 집 근처에 모유센터가 있어 하루 한 시간씩 수일간 마사지를 받게 되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내가 아들을 데리고 같이 가기도 민망했기에 아내 홀로 병원으로 가는 운전대를 잡았다.      


아내가 떠나면 나는 간절하게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아들아. 졸리지 않니?’     

10개월 된 아들과 놀아주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동화책을 열심히 읽어주고 시계를 보면 겨우 5분이 지났을 때도 많았다. 나는 졸린데, 아들은 말똥말똥하다. 억지로 아들을 재우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 날은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들.. 미안하지만 아빠랑 TV를 좀 봐야겠어..’ 넷플릭스의 키즈 컨텐츠가 생각났다. 재빨리 넷플릭스에 접속했다. 그런데 넷플릭스 메인 배너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장편 애니메이션들이 오픈된 것이 아닌가. ‘아들, 아빠 생각에는 붉은 돼지가 그나마 제일 덜 자극적일 것 같아.’ 그렇게 아들을 안은 채로 <붉은 돼지>를 시청했다. 10년 만에 <붉은 돼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이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다. ‘빨간 전투기가 예쁘다’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명작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됐다. <붉은 돼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공군 에이스 마르코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마르코는 전쟁 영웅으로 불릴 만큼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전쟁과 파시즘에 회의를 느낀 마르코는 스스로 돼지가 되는 마법에 걸린 후 공적(비행기 해적)을 잡는 현상금 사냥꾼의 삶을 살아간다.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마르코에게 국가 비협력 죄, 밀출입국 죄, 퇴폐 사상 유포죄, 파렴치하고 나태한 돼지라는 죄, 음란물 진열 죄로 영장을 발부한 상태였다. 마르코는 국가와 공적들의 적이 되었지만, 그에게 두려움이나 불안은 찾아볼 수 없다.      


나라의 전쟁 영웅으로 살 수 있지만, 신념을 굳히지 않아 도망자 신세의 삶.

생계를 위해 적을 만들며 살아가는 현상금 사냥꾼의 삶.

하지만 그 어떤 회유나 폭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여유를 가진 마르코.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지.”     


위태위태한 삶이지만, 마르코는 비행을 포기할 수 없다. 그의 비행은 세상의 돼지들과 그를 구별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마르코의 친구 지나가 운영하는 술집의 벽에는 마르코의 인간 시절 사진이 있다. 펜으로 거칠게 얼굴을 지운 흔적이 있는 사진이다. 지나는 마르코가 인간이었을 시절 마지막 사진이라며 사진을 아끼지만, 마르코는 그 사진을 싫어한다. ‘인간’ 마르코는 군국주의의 이탈리아를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 국가에 대한) 애국 따윈 인간끼리 많이 하라고 말하는 마르코. 파시스트보단 돼지가 낫다는 마르코의 확고한 신념은 ‘인간’인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인간’인 나는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국가적, 시대적 흐름에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삶의 방향은 무엇일까.     


한 때 '부자되세요~‘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카드회사 광고가 인기였다. 새해 덕담으로 ‘부자되세요’가 생길 정도로 대유행했던 광고였다. 당시 정부는 세금 탈루를 막고, 소비를 늘리기 위한 방책으로 신용카드 발급의 문턱을 대폭 낮췄다.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엄청난 카드 대란이 일어났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시장 정유율을 높이기 위해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카드를 발급해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러 개의 카드를 발급받아 카드 빚 돌려막기를 시작했고, 몇 달 후에는 대규모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됐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가장 큰 문제지만, 세상의 흐름을 따라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무리한 소비를 한 사람들의 과오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요즘에도 유행처럼 이야기하는 라이프 스타일들이 있다. 욜로, 소확행, 워라밸, 미니멀 라이프까지. 이처럼 다양한 삶의 방식들 중에 어떻게 하면 나다운 나의 삶의 방향과 철학을 만들 수 있을까.      


띠 띠띠띠     


아내가 돌아왔다. 아들은 잠들었다. 

아내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계속해서 멍하니 붉은 돼지의 화려한 비행을 봤다. 화려한 곡예비행을 하는 마르코가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는다. 붉은 비행기의 기관총은 나의 권태로운 일상을 휘갈겨 버렸다. 어느덧 엔딩크레딧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나는 습관처럼 일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어떤 돼지인가.

나의 어떤 행위가 다른 돼지들과 나를 구별시켜줄까. 

내 방 한쪽 벽에는 작년 여름에 붙인 작은 메모가 붙어있다. 나의 삶을 이끌어갈 한 줄의 문장이 적힌 메모다. ‘나의 감상과 생각으로 세상에 선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방구석에서 끄적이는 글과 그림이지만, 나의 삶과 생각이 선한 물결이 되길 기대하며, 세상에 작은 돌맹이를 던져본다. 

당신은 어떤 돼지입니까? 

저는 세상에 작은 돌을 던지는 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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