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트북 AS를 위해 사무실에서 조금은 떨어진 서비스센터를 찾았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난 지하철을 내려 역사 위를 나와서 AS센터로 걸어가는 길이었다.길 건너편에 오래된 기억이지만 내겐 낯설지 않은 건물이 있어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시간도 꽤 지나고, 주변도 많이 변해서 그냥 지나칠법했지만 과거 20대 초반 2년이 넘는 시간을 먹고, 자고, 근무했던 잊지 못할 장소라 먼 기억 속에서도 또렷하게 생각났다. 너무도 반가우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난 멈췄던 발길을 돌려 길을 건너 부대 앞으로 갔다. 1996년 전역한 후에 처음 와봤으니 25년 만이었다. 다시 와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우연히라도 찾아오니 그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부대 출입이 가능한 위병소는 굳게닫혀 있었다. 문이 닫혀있는 부대 앞에 서서 그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웃었다. 그 시절의 나를 그려보며.
1994년 5월의 늦은 봄. 난 사단 훈련소를 막 퇴소해 부대 배치를 받고 2년이 넘는 병영 생활을 할 부대에 입소했다. 6주간의 훈련 후 반갑지만, 짧았던 부모님과의 면회를 마치고 부대로 입소한 날,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이나 두렵고, 겁이 났던 시간이었다. 21살 한창 혈기 왕성했던 나는 어디에도 없고, 6주 동안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만을 교육받아왔던 곳에서의 생활은 두려움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훈련소에는 곁에 있는 동기들 덕에 힘들어도 버틸 수가 있었지만 배치된 자대에서는 가장 막내로 가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막내로 들어간 소대에는 위로 전역을 불과 두 달을 남겨놓은 까마득한 선임부터 바로 한 달 위선임까지 예상했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정말 화장실 한 번 편안하게 다니지 못했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흘러 흘러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난 상병이라는 계급장을 달게 됐다. 난 상병 계급장을 달고서 처음이자 마지막 파견 나간 곳이 부대 내 법당이었다. 군대에 가면 없었던 종교도 생기고, 심하면 동기 따라 종교도 바꾼다. 훈련병 시절에 유일하게 밖에 음식을 맛볼 수 있었던 시간이 종교 행사 때였고, 그때 다녔던 법당을 기간병이 되어서도 꾸준히 다녔던 이유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파견을 가게 됐다. 물론 이 파견도 군종병과 조금의 친분으로 이뤄진 것이지만 어찌 되었건 한 달간의 파견으로 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던 한때였다.
파견은 여러 부대에서 병력이 차출되어서 왔고,그렇게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의 파견병이 법당에 모였다. 우린 기존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법당에서 보던 사이였다. 우린비슷한 나이에 계급도 같아서 서로 편하게 말을 놓게 되었고, 그렇게 재미있는 파견 생활을 보냈다. 우연히도 한 달이라는 파견 기간 동안 내 생일이 껴있었고, 함께 파견 나온 동료들은 그런 날 위해 생일 축하하는 자리를 계획했다. 우린 석가탄신일 준비로 부대 밖 외출이 자유로웠고, 때마침 부대 전체가 2주간 외부 훈련이 있어서 최소한의 잔여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훈련지로 나가서 부대 안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적막하고, 고요했다.
시간이 흘러 내 생파일은 다가왔다. 파견병 중 두 명이 생일 이틀 전에 외출을 했고, 복귀하며 생일날 빠질 수 없는 술과 외부 음식을 몰래 반입하여 들어왔다. 그렇게 반입한 술과 음식을 그날 저녁 우린 몰래 취식했고, 남은 술은 부대에서도 장교나 하사관 출입이 없는 법당 내 창고방에 몰래 숨겼다. 다음날은 석가 탄신일 연등 행사 바로 전이라 필요한 재료를 한꺼번에 사기 위해 나를 포함한 모든 파견병은 외출을 나갔고, 용무가 끝나고 부대를 복귀하면서 외출증을 끊어주는 본부에 있는 사병 하나와 부대 앞에서 마주쳤다.
"김 상병님, 법당에 뭐 숨겨놨었어요? 인사 과장이 노발대발 난리가 났어요"
"예에? 박 일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인사 과장 상태가 어떤데요?"
"조금 전에 법당 다녀오고 나서는 엄청 화가 나 있더라고요. 영창을 보낸다고 하던데요. 얼른 들어가 보세요"
인사 과장이 법당을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순간 머릿속에서는 빨간 경고등이 켜졌고, 4월 말 한낮에 조금은 더운 날씨임에도 등에는 '오싹'하는 한기가 들었다. 서둘러 함께 외출 나온 박 상병과 법당으로 복귀했고, 우리보다 먼저 외출 복귀하여 법당에 들어와 있는 이 상병을 마주했다. 이 상병의 얼굴 낯빛은 노랗다 못해 회색빛이었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 현실감마저 떨어졌다.
"창수야, 아니 이 상병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철수야 큰일 났다. 인사과장 와서 법당 창고 다 뒤집었어. 결국어제 우리가 먹다 남은 소주 댓 병 찾아내서 가져갔다. 일직 하사(당직 하사관) 말로는 다음 주 석가탄신일 행사 끝나고 영창 보내겠다고 그랬단다"
"헐, 이거 완전히 꼬였네. 어쩌냐. 선임들 훈련 복귀하면 엄청 깨지겠는데. 뭐라고 하지?"
우린 불안 속에 그렇게 며칠을 더 지냈고, 그 며칠 사이에 수십 번을 후회하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웠다. 막상 군대 와서 겪어보지 않아도 될 영창을 경험할 생각을 하니 부모님께도 죄송하고, 앞으로의 사회생활도 걱정이 됐다. 그 당시 난 영창을 다녀오면 법을 어긴 범법자와 동일하게 신원 조회하면 전과자처럼 표시가 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석가탄신일 행사 전날이 되었고, 근심 걱정을 가득 안고 행사 준비를 하는 둥 마는 둥 준비했다. 그렇게 낙담하며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즈음 일직사관(휴일 당직 담당 장교 또는하사관)이 법당으로 찾아왔고, 그의 입에서 아주 희망적인 소식을 듣고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단결(경례 구호)~, 최 중사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이, 파견병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는데 뭐부터 전해줄까?"
"뭐 좋은 일이 있을까 싶지만 기왕이면 좋은 소식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 너희들 영창 가는 거 취소됐다.인사과장님이 연대장님께 종교 탄압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고 선처를 호소했단다"
"예~~?정말입니까? 저희 그럼 벌 안 받고 그냥 넘어가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 나쁜 소식이 그 벌이 군기 교육대 입소시켜서 2박 3일 굴리는 걸로 바뀌었다. 입소는 내일 행사 끝나고 오후 2시까지 군장 싸서 본부로 바로 집합. 이상~"
기뻐할 일인지, 슬퍼해야 할 일인지 혼돈은 있었지만 그나마 군생활에서 '빨간 줄' 안 가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디냐고 서로를 위로하며 조금은 걱정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우린 뒤가 찜찜한 채 석가탄신일 행사를 진행했고, 행사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빌었지만 야속하게 시간은 흘러 행사는 끝이났다. 다들 행사를 무사히 마친 안도하는 모습이 아닌 잠시 뒤에 닥칠 두려움과 걱정으로 울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들이었다. 우린 그렇게 각자의 부대로 복귀했고, 한 시간 뒤에 다시 완전 군장을 한채 본부에 집결했다.
"철수야, 괜찮냐? 선임들한테 안 까였어?"
"잔소리는 좀 하던데 어차피 군기교육대 입소하는 거 아니까 긴 얘긴 안 하더라. 그냥 잘 다녀오래"
"난 X 됐어. 군기교육대 다녀와서 보잔다. 위로 선임이 많아서 그런지 상병인데도 한참 막내니. 군기 교육대 퇴소하고 나서가 더 걱정이다"
"어찌 되었건 여기서 잘 버텨서 몸성히 나가야지. 암튼 이만하길 다행으로 알자"
"어이 교육생들 조용! 난 오늘부터 2박 3일 동안 니들 교육을 맡은 교관 최기동이다. 잘 부탁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대 막사까지 군장 매고 선착순 한 명 출발~"
우린 그렇게 난생처음 군기교육대에 입소했고, 2박 3일 동안 단내 나도록 뛰고, 구르고, 얼차려 받고 하루하루를 무척이나 쉼 없이 보냈다. 다행이라면 부대 내에 정식 군기교육대가 없어서 임시로 교육이 진행되었고, 교관으로 오신 양반이 자주 보던 최 중사여서 조금은 우리의 편의(?)를 봐줬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유죄 선고를 받는다고 호적에 빨간 줄은 가지 않는다고 한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대부분 잊지 못할 추억들을 한 보따리쯤은 가지고 나온다. 전역을 하고 한동안은 그 잊지 못할 추억들을 풀어놓을 기회만을 엿보다 누가 군대 얘기만 하면 그간 숨겨놓은 자신의 무용담들을 봇물 터트리듯이 풀어놓는다. 실제 사실과는 아주 조금(?) 다른 '뻥'을 가미하거나 혹은 자신의 무용담을 지나치게 미화하여 이야기를 하곤 한다. 듣는 사람들도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자체 검열하여 듣기 때문에 그들끼리는 이런 무용담이 사실과 거짓 어디쯤의 소설같이 이야기하고, 듣곤 한다. 나도 전역 후 어느 정도의 시간까지는 술자리에만 앉으면 군대 얘기를 하는데 열을 올렸다. 남의 얘기보다 조금 더 리얼하고, 생생하게 얘기하려고 살도 붙이고, 뺄 건 빼가면서 말이다. 군대를 갓 전역한 남자들은 이렇게 2년을 넘는 시간 동안 사회와 단절되어 지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어느 정도 위로받으려는 심리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역한 남자들에게 물어보면 열이면 아홉은 이렇게 얘기한다. '난 근무했던 부대가 있는 쪽으로는 오줌도 안 쌀 거야'라고. 하지만 20대 가장 뜨거웠던 시절을 보냈던 시간은 그렇게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추억과 우리 각자의 생경한 모습 그대로를 담고 있다. 긴 시간이 지나도 그래서 더 잊히지 않는 듯싶다.그 시절 날 것 그대로의 내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