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의문을 품는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고정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꾸는 일인가?"
그는 파인만을 다시 불러 세운다.
고요한 침묵 속에 질문이 떨어진다.
소크라테스:
파인만, 그대는 전에 말했지.
우리가 어떤 것을 측정하면, 그 순간 존재가 결정된다고.
그렇다면 나는 묻고 싶네.
우리는 왜 동시에 두 가지를 알 수 없는가?
왜 위치를 알면 속도를 잃고, 속도를 알면 위치가 사라지는가?
파인만 (잠시 생각하며):
그건 바로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 때문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처음 제시했죠.
미시세계에서는 어떤 양이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즉,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밀하게 알 수 없습니다.
알려는 순간, 다른 하나는 흐려지거든요.
소크라테스:
허면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라고 믿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변해버렸다는 말인가?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네.
그대는 '알아간다'는 일이 곧 '잃어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파인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 자체가 시스템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개입한 순간, 세계는 달라지죠.
그래서 측정이 곧 현실을 만들어내는 일이 됩니다.
파인만:
이 원리는 단순한 기술적 한계가 아닙니다.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이죠.
예컨대 전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려면 강한 빛을 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빛이 전자를 튕겨버려 속도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즉, 관측이 현실을 바꿔 놓는 셈이죠.
소크라테스:
나는 예전부터 배웠지.
진리를 알기 위해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하지만 그대의 세계에서는, 바라보는 순간 그것이 달라진다 하니,
진리는 우리 눈앞에서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파인만:
그렇기에 양자역학은 '확실한 진리'보다 '확률의 구름' 속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그림 대신, 가능성의 스펙트럼을 얻는 거죠.
소크라테스:
만약 모든 존재가 이렇게 불확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어떤 것도 알 수 있는가?
그대의 과학은, 끊임없이 흩어지는 안갯속에서 길을 찾고 있는가?
파인만:
맞습니다.
우리는 그 안갯속에서 패턴을 찾으려 애쓰는 항해자들입니다.
완전한 항로는 없지만, 별빛처럼 반짝이는 가능성을 따라 나아가죠.
소크라테스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의 말은 나를 사유하게 만드는군.
그대는 말하네 — 우리가 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무지를 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파인만: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과학과 철학의 시작이죠.
우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공간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그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이 태어나는 자궁입니다.
불확정성 원리는 위치와 운동량처럼
짝을 이루는 물리량을 동시에 정밀하게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원리는 자연의 본질적인 제한이지, 기술의 부족이 아니다.
관측이 곧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며,
현실은 관측을 통해 형성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이 존재를 바꾼다는 사실에 철학적 충격을 받는다.
파인만은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진리가 있다"라고 말한다.
〈5편. 파동이냐 입자냐 – 빛은 누구인가?〉
소크라테스:
"그대는 왜 하나의 존재를 두 가지 얼굴로 설명하는가?"
파인만:
"왜냐하면 빛은 스스로를 언제나 이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