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함수 vs 무자성
새벽안개가 호숫가 정자 위를 감싼다.
물 위로 피어오른 안개는 실재인지 환상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용수는 발아래 놓인 물결을 바라보고,
파인만은 노트의 수식 사이에 진짜가 무엇인지 고심하고 있다.
파인만 :
용수 선생,
저는 양자역학이 ‘실재’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용수
무엇이 궁금하오?
파인만
입자는, 실재가 아닙니다.
측정 전까지 그것은 어디에도 없고, 동시에 어디에나 있죠.
우리는 그것을 파동함수라고 부릅니다.
가능성의 흐름입니다.
용수
그 흐름은 실재라 부를 수 있소?
파인만
정확히 그걸 묻고 있는 겁니다.
파동함수는 현실을 예측하지만,
그 자체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보는 건 결과,
그 앞의 가능성은 마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용수
그대는 지금,
‘무자성(無自性)’에 가까워지고 있소.
파인만
자성이 없다…
그 말, 지난번에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합니다.
‘자성 없음’이 실재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용수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오.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오.
그것이 바로 ‘무자성’이오.
파인만
그러니까, 입자는 그저 고정된 본질이 없는…
관계의 결과라는 말입니까?
용수
그렇소.
입자는 조건 따라 생기고,
조건 따라 사라지오.
그 자체로 어떤 ‘본성’을 가지지 않으며,
늘 변화하며, 비워져 있소.
파인만
놀랍군요.
그 말은 우리가 발견한 파동함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입자는 자신만의 고유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아요.
오직 ‘측정’이라는 조건이 주어질 때만
하나의 상태로 확정됩니다.
용수
그 확정은 진실이 아니라, 선택일 뿐이오.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가 드러났을 뿐.
그대는 그 하나를 보지만,
나는 그 전체가 ‘공(空)’이라는 것을 보오.
파인만
그 말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임시적인, 조건적 존재라는 뜻이겠네요?
용수
그렇소.
불교에서는 그것을 ‘가합假合’이라 부르오.
‘임시로 모인 것’.
형상도, 생각도, 이름도, 자아도.
모두 모였다 흩어지며,
고정된 본질은 없소.
파인만
이건 과학적으로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우린 모든 사물이 원자로 이루어졌고,
그 원자들조차 일정한 상태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전자 하나조차 파동처럼 퍼져 있고,
위치도, 운동량도 동시에 알 수 없어요.
용수
그대의 말은 ‘무상’(無常)의 언어요.
고정되지 않기에,
영원한 것도 없고,
지탱되는 실체도 없소.
파인만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
‘이 세계’라는 것은,
모두 착각입니까?
용수
아니오.
착각은 ‘없다’는 뜻이 아니오.
‘실재를 오해한다’는 뜻이오.
파인만
그럼 세계는 실재가 아니라,
실재처럼 ‘느껴지는 것’인가요?
용수
세계는 이름이고, 현상이며, 조건이오.
그대가 보는 것은
마치 안개처럼,
잡히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러므로, 실재는
그대가 믿는 방식으로는 없소.
파인만
(조용히)
우리는 그것을 ‘해석의 붕괴’라 부릅니다.
파동함수는 관측 전까지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지만,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현실만 선택되죠.
그러나… 그 외의 가능성들은 어디로 간 걸까요?
용수
그 가능성은 진실의 일부였소.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하나’로 규정한 순간,
나머지는 마음 밖으로 밀려났소.
그것은 실재의 붕괴가 아니라,
그대 인식의 제한이오.
파인만
그렇다면 우리가 측정한 현실은
전부 일종의 ‘선택된 가상’이라는 말인가요?
용수
선택된 인연,
선택된 그림자.
그러나 그것도 부정할 수 없소.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고통도, 괴로움도,
또는 자비도 생기기 때문이오.
파인만
… 결국 실재란,
‘있는 것’이 아니라
‘보게 된 것’이군요.
용수
그리고 그 보는 자 또한
자성이 없는 조건일 뿐이오.
파인만은 파동함수를 통해
존재가 확정된 실체가 아니라 측정 전까지는
중첩된 가능성이라는 점을 밝힌다.
용수는 그것이 불교의 ‘무자성’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응답한다.
존재는 고정된 본질이 없으며,
오직 조건과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실재는 착각이 아니라,
조건적으로 성립된 현상이며,
분별된 인식의 그림자일 수 있다.
과학은 이를 수식과 실험으로 이해하려 하고,
불교는 이를 직관과 수행의 통찰로 바라본다.
3편. 나는 누구인가 – 무아와 입자의 정체성
파인만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요?
내가 본다고 생각하는 이 자아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다면—
나는 누구입니까?
용수
‘나’는
다섯 가지 쌓임의 흐름이오.
사라지고 나타나는 그림자일 뿐,
그 안에 ‘주인’은 없소.